신명기 2018. 5. 15. 23:18

신명기 7장 1-11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가나안은 에덴을 유형적으로 재연시키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있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생물(창 1:28)이 있었으며, 이러한 생물 가운데에는 들짐승(창 3:1)이 있었다.

생물과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로 사용하고있기에, 동일한 존재이다.

뱀도 들짐승 가운데 한가지이기에, 에덴에는 뱀이 공존하고있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뱀을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뿐만이 아니라, 뱀까지 포함하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할 통치 명령(창 1:28)도 주셨다.

에덴에서 아담이 악한 짐승까지도 다스려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뱀과 같은 부류의 존재들을 쫒아내고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는 뱀에 대하여 아담에게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셨듯이, 가나안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을 쫓아내고 다스려야하는 통치 명령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관계를 유형적으로 연결해주고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타락한 이들이기에, 가나안의 족속들을 쫓아내는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신다.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시는 작업은, 혼돈 가운데 창조하시고 에덴을 세우셔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의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참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도행전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의 배타성은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과 공존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려면 악과 공존해서는 안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지만, 삶에 있어서 죄에 대하여  극도로 예민하여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노아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행동 방식은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구속의 나라로서의 삶이 요구된다.

신앙 생활에는 포용성이 요구되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여야하지만, 성도에게 요구되는 구속의 나라에서의 거룩함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정통 칼빈주의와 문화 칼빈주의의 주된 차이 가운데 한 가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정통 칼빈주의에서는 세상을 구속의 나라가 아닌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로 보고있다.

신칼빈주의라고도 불리우는 문화 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영역에 이 세상 모든 피조세계 포함시키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데 주된 관심이 있다면,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을 변화시켜 기독교화하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거룩성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과연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불신자를 포용하면서 이 세상을 구속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방향성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죄에 오염되어 멸망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이면서 거류민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지는 않았다.

성도의 궁극적 본향은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본향에 대한 갈망은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시에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혼인은 서로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는 긴밀한 관계였기에, 이미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를 같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하와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은 먹지를 않았다면, 처음 부부는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 의한 연합은 사람이 이혼을 생각하는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혼인은 교회를 예표하는 기능을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가리키고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혼인에 비유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의 혼인에서 시작되었다.

혼인은 같이 산다는 의미를 넘어서,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거문화는 반기독교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교회의 개념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이방 문화이다.  

혼인을 통한 하나됨은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성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존재이다.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사단은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사단이 바로 아담을 유혹하였다면 아마 사단은 실패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하와를 유혹하면, 부부 관계의 긴밀성으로 인하여 아담은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혼인은 하나가되는 긴밀한 관계이기에, 둘 다 견고하지 않고는, 유혹에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만이 있었다면 에덴은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아담이 에덴에서 문화를 발전시켜서 고도로 문명화된 발달된 기술을 갖고있는 에덴을 만들었어야했으며, 성도들은 이를 다시 수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을 에덴에서 수행하였기에, 에덴은 문화 발전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어야했다.

가나안은 에덴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재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되어야만 했다.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이 에덴을 통치하였던 것과 같이,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성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가나안이라는 특수적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현재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가나안은 에덴의 재연이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인 것과는 달리, 이 땅은 이미 아담이 에덴에서 쫒겨나 살아가는 영역이며,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는 곳이다.

가끔 땅 밟기를 한다거나, 절에가서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세상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곳에까지 가서 그들의 신상을 파괴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잘못된 행동이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택함받은 구별된 성민, 즉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구별된 정체성은 단지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부패해있었기에, 하나님의 구별된 성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후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택함받은 성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내적으로, 즉 근본적으로 변화를 입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는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구별된 하나님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나 도덕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성추문을 일으켰던 J목사의 주장은, 오늘의 말씀과는 대조를 이룬다.

자기가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만은 잘남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며, 이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의 상실과 그로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근거가 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받는 성도의 택함의 근거가 되기도한다.

S교회의 O목사도, 거대한 중국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며,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떠들었지만, 결과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였다.

외적인 규모의 자랑은, 그 규모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온 지극히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근원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즉 구원 협약이 있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으로 이어지며, 이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구체화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마무리된다.

출애굽은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근거로 시행하신 것이지만, 이는 아담의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속사로 전개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구속사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제거하는 대신에 톰 라이트는 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유대인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해서 찾은 근거일 뿐이다.

선택하시고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고해서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에덴에 아담이 있다고 해서 아담이 구원받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의 실행이라는 과제가 주어진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타락과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속으로 마침이 되어야한다.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행동에 제한된 순종보다는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의한 접근 방식을 원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야하기에, 행동이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만 한다.

모세 율법과 산상수훈의 차이는 외적인 행함과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의 차이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은, 종과 상전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언약 관계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완성된다.

유대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있는 새관점이 자녀의 개념 대신에 백성의 개념만을 사용하는 것도, 구약의 율법으로는 자녀의 개념까지 도달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외식적 행동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중립이라는 것은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외면과 무관심으로 이어지기에, 이는 미움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윤리적인 접근 방식은 인간의 실체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시도일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를 입지 않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 모두의 현실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으로, 모든 인류에게는 자연법으로, 인간의 현실이 드러남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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