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11. 23:00

신명기 5장 11-21절 말씀 묵상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며, 거룩함이 상실된 이들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것은, 창조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수 많은 상황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모독을 가하는 인간의 행위였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거룩함이 요구되는 곳이기에, 그 곳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으실 수 없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십계명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한 가장 기본되는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서양에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이 욕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한 것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미 기독교와 관계된 이름들이 욕이 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잘못된 행함의 결과이다.

기독교인들이 비록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망령되이 일컫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행함에 있어서 사회에서 욕을 먹는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가나안을 안식을 예표하는 곳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통치 명령을 실행하는 능동적 순종과 선악과를 금하는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나안은 아담이 실패하였던 에덴에서의 종말론적 안식을 기억하게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고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들어가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마음에 새겨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삶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피조물이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 안에서 쉼을 누리는 것과 같다.

자녀가 부모 앞에서 부모의 수고에 값을 치르고 대접을 받는다면 이는 부모를 더 이상 부모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안식은 그냥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한 삶의 조건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안식을 성취하기 위한 일상이 아니라, 안식으로부터 출발된, 안식을 누리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토요일이 안식일인 것은 일주일이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 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일주일은 안식을 위한 삶으로서, 공로가 요구되는 삶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거하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삶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이었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에덴에서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검증이 요구되었다.


가나안에서의 삶이 안식을 위한 공로적 삶이었다는 것은, 모세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하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실질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을 공로가 요구되고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종으로서의 신분일 뿐, 자녀는 아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

참된 자녀이어야만 안식에 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기에,  이들에게는 더 이상 안식을 위한 삶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어야한다.

에덴에서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에 들어가는데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순종을 통하여 안식을 성취하심으로 안식의 주인이 되셨다.

신약에서 일주일의 시작이 주일이 됨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으로부터 출발된 한 주를 살아가는 것이다.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엿새 동안의 힘써 행하는 것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아담에서의 에덴의 상황을 재연시키신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는 인간은 안식을 위해 요구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무능한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한다.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경험을 통하여 깨닫지 않는 한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죄인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야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삶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인도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 성공한 삶은 우선 이 땅에서 실패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성도가 자녀의 성공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실패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법을 가르쳐야한다.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아담이 순종을 통하여 안식에 도달하였다면, 아담 뿐만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하여있던 모든 피조물들도 안식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들도 마찬가지로 탄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식은 공동체적으로 완성된다.

피조물의 탄식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안식에 도달될 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체적으로 확장된다.

노아를 구원하실 때 노아의 가족을 돌아보셨고, 소돔성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셨으며, 여리고성을 정탐할 때 기생 라합에게 속하여 있던 자들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개인의 구원은 가족 공동체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음을 본다.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도달하여야 할 안식은 종이었던 상태에서 도달되어야 할 안식이다.

이는 아담이 순종하였더라면 도달할 수 있었던 안식보다도 더욱 길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이었다.

애굽 땅에서 종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애굽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였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현재적 삶의 환경에 대한 어려움과 자신의 힘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게되며, 하나님께서는 역경 가운데 기도를 귀하게 여기시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다.

하지만 인간이 환경에 대한 역경과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은 인간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가를 인식하는 차이로 인하여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오직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식하게되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넘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스스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할 것이다.

인본주의 사상에 깊게 물든 현대 신학에서는 구원론 중심의 기독론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론으로 중심의 이동을 보여주고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 신정통주의자들도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론적 기독론을 배제하면서, 실존주의적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있다.

칼빈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카이퍼에게도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을 찾아볼 수 없기에, 인간의 노력에 의한 문화 변혁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극단적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을 강조하는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은 찾아 볼 수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바꾸려하고있다.

실제로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제거함으로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라고하는 것과 같이, 인간은 죄의 종노릇하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인간인 것을 인식하여야만,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부모의 원형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이른다.

모든 인간의 족보의 최상위는 하나님이시기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종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육신의 부모는 그림자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부모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유물론적 실용주의에 물든 현대의 젊은 이들에게, 나이드신 분들은 더 이상 공경의 대상이 아니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더욱 멀리하고자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반역의식이 자리잡고있다.


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처음 나타난 비극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살인은 공동체의 일원을 제거함으로서 공동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가인은 살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임으로서, 아벨과 하나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였다.

인간이 추구하는 공동체는, 성경적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개인의 이익을 위한 집단일 뿐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공동체의 속성을 변질시켜 자신과 다른 이들을 제거하려고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희생이다.

공동체를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죄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심으로서, 집단을 해체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다.


18  간음하지 말지니라

아담은 최초로 간음한 자이다.

간음은 공동체에서의 이탈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뱀의 유혹으로 인하여,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장차 교회를 신부로 맞이할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남자와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한 몸이기를 거부하고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를 떠난 아담의 후손들을 다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로 부르시기 위한 말씀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장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참여하게될 영원한 안식을 위한 것이다.

동거 문화나 동성간 결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거부하거나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간음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거부가 담겨있다.

아담의 범죄 자체가 간음이다.

궁극적으로 신랑되신 그리스도가 간음한 아담을 대신하여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간음은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위와 맥락을 같이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간음에 대한 금령은, 이스라엘이 간음한 아담의 후손임을 상기시킨다.


19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도둑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뱀을 통해서 하나님께 속하여있던 아담과 하와를 자기에게 종속시킴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였다.

도둑질하는 것은 자신의 애비가 사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기에 도둑질을 함으로서  사단의 속성을 공유하여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양심에 부끄러운 도둑질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다.


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말을 함으로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거짓은 진리와 대비된다.

거짓은 비슷하지만 다른 유사성을 갖고있다.

거짓에 참여한 자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천지 집회에 모이는 이들의 한 가지 특징은, 이들이 집회에 가는 길에서 얼굴을 좀처럼 쉽게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모임에 양산을 쓰는가하면, 5월에도 모자달린 겨울옷을 뒤집어쓰기도하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에도 마스크를 쓰는가하면, 차를 일부러 좀 떨어진 구석진 곳에  주차시키기도한다.

이들은 십여년을 정통교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자신을 포장을 하기도한다.

이들에게 거짓은 모략으로서, 일종의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한다.

신천지가 이단인 것을 알 수 있는 첫 번째는 이들이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아비는 사단으로서, 하나님께 속하여있지 않다.


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탐내는 것은 사단이 시작하였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가꾸게하신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이를 파괴시킨 장본인이다.

가나안은 더 이상 사단이 탐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사단의 속성을 공유해서 안된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못했다.

이세벨은 아합의 포도원에 대한 탐심을 충족시켜주었으며,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였다.

이세벨은 회개가 없었지만, 다윗은 눈물을 흘리면서 통회하였다.

다윗의 눈물은 가나안에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간절함이 구속주를 예비한 것이 되었다.


모든 이들이 가나안에 거할 자격이 없음이 증명되었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된 가나안의 통로가 되실 수 있으셨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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