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장 15-31절 말씀 묵상
15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제한되어있다.
호렙산에 불길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불길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불길은 눈에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고 왜곡된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실재의 모습을 담아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내적인 거룩한 능력이 상실됨으로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의 왜곡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눈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자신들이 벗은 줄을 몰랐다.
이는 범죄하기 전에 눈이 어두웠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거룩한 본질이 상실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태가 수치로 드러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인간은 내적인 거룩한 본질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남아있는 외적인 형상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를 입어서, 하나님을 내적으로 알고, 하나님은 물론 뱀하고도 내적인 교통을 할 수 있었으나, 일단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면서, 내적인 본질의 상실과 외적인 껍데기만 보이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내적인 시야가 상실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하나님과 교통도 불가능하기에, 무엇인가 보이는 외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외적인 형상에 대한 추구는 부패한 마음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의 모형인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곳이되어야함에도, 이미 아담 안에서 손상된 인간은 거룩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낼 뿐이다.
16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아담의 불순종과 더불어 눈이 밝아진 인간이 보는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상실된 왜곡된 모습일 뿐이다.
불순종한 인간의 형상은 불순종과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은 왕에서 종으로의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었다.
타락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단의 종노릇하는 종의 형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간에 의지할 대상을 만들게 되어있지만, 인간이 만든 인간의 형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종의 모양일 뿐이다.
17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짐승은 종종 힘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각종 짐승들은 저마다의 특징적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짐승들을 자신의 상징으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강인함을 나타내고자한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는 아담이 이러한 짐승들의 이름을 지음으로서 이러한 짐승들이 인간의 권한에 종속되었던 존재들임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 이러한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왜곡시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인간에게만 제한 시켜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각종 짐승이나 곤충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의 형상을 동물이나 곤충과 공유하는 행위로서, 원래 거룩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동물에 귀속되도록 하는 행위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림의 대상에 포함된 짐승과,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있음을 봄으로서, 뱀은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이었지만, 유혹을 당하여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뱀은 아담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아야했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였지만, 타락 이후에 이들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단을 섬기겠다는 인간의 의사표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던 인간을 동물이나 곤충에 귀속시키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을 통해서 각종 짐승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왕권이 표현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곳이기에, 짐승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허락되지 않는다.
종종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기도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게되면,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발견 할 수가 없다.
짐승을 형상을 만들고 이를 숭배하는 것은, 통치하여야할 대상으로부터 통치를 받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아담의 타락은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된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증명되고있다.
각종 형상들을 만드는 행위는, 자신이 이러한 형상들에 종속되어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왕권을 짐승에게 내어주고, 짐승에게 종속되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모욕을 주는 행위이다.
미션 스쿨에서조차도 짐승을 학교의 싱징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학교가 미션스쿨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 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
일월성신을 섬기는 행위는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사람 중심의 신앙은 인간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는 현상적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는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행위였다.
성전에서 인간의 필요가 하나님으로만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성전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장소로 삼으려고한다.
성전은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지만, 인간은 이를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곳으로 바꾸어버렸다.
성전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를 비롯하여, 목적이 이끄는 삶의 형태로, 한때 유행하였던 많은 비지니스 유형의 교회들이,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운영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교회들은 거의 다 실패를 하였던 것을 본다.
타락한 인간은 유물론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모든 대상을 실용적 가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접근하려고한다.
교회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으로 변질되어가고있다.
성전에서 일월성전을 섬기는 행위나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주로 세상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의미와 기능이 변질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월성신에 묶여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부하는 행위로서, 교회에서 세상의 필요를 채우려는 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보다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아를 완성시키려고한다.
교회는 성전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 되어야하기에, 교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외적인 필요를 채우려고해서는 안된다.
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선택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순종만이 요구된다.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과 동일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택받은 자는 선택하신 분의 요구에 순응할 의무가 있다.
선택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선택하신 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마땅한 조건이다.
순종이 없이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은혜의 선물을 누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와 사랑조차도 누릴 수 있는 능력조차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러한 구제불능의 인간에 대한 구속사이다.
21 여호와께서 너희로 말미암아 내게 진노하사 내게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의 일차적인 원인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모세의 역할은 율법의 역할에 유형적으로 대비시킬 수 있다.
율법의 역할은 죄인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교사로서의 역할이다.
모세 언약으로 표현되는 율법은 새언약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입성할 수 있도록, 가나안 입성 직전에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율법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사역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그 역할을 다함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앞에까지 인도한 모세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을 이어 받음으로써, 모세 자신의 역할을 완성시킨 것이다.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언약과 우상 숭배는 밀접하게 대립되어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방법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언약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를 최우선으로 하고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모세 언약은 행위를 요구하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상을 조각하는 것은 우상을 만드는 행위로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순종의 표현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없이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다.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다른 표현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요구는, 메마른 이분적적인 상벌이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상과 벌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메마른 표현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행위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 있을 뿐이다.
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미리 경고를 하였는데도 그렇게 한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악을 행한 자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떠할지를 미리 아시고 경고하시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벌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경고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할 지를 아신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이미 사단의 종노릇하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받았다는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개념이다.
27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도 이스라엘과 유사할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유토피아적인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있다는 것을 인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종말의 처지가 이스라엘과 유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들이 스스로 잘할 수 있었다고 하나님의 심판에 항의를 할 것이다.
마지막의 재앙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인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8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이는 아직 범죄하지도 않은 이들을 이미 범죄한 이들로 여기는 말씀이다.
이는 이미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인간의 범죄 행위는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범죄행위 이전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기독교는 표면적인 행위론적인 문제보다도 더 나아가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다.
바리세인의 문제는 죄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함이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할 때는 항상 존재론적인 접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은 죄가 가득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려하지 않기에, 죄로 인하여 극단적인 불행의 상태가 되어야만 회개하고 돌아온다.
죄가 가득 드러났을 때 길을 열어주시는 것은,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단계에서 기다리시는 것은, 죄의 행위 이전에 본질적 죄에 대한 해결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생에서의 실패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신명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4장 44절- 5장 1-10절 말씀 묵상 (0) | 2018.05.10 |
---|---|
신명기 4장 32-43절 말씀 묵상 (0) | 2018.05.09 |
신명기 4장 1-14절 말씀 묵상 (0) | 2018.05.07 |
신명기 3장 12-29절 말씀 묵상 (5) | 2018.05.06 |
신명기 3장 1-11절 말씀 묵상 (0) | 2018.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