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장 32-43절 말씀 묵상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광야의 여정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처음있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출애굽 과정 자체가 구속 사건이었으면, 이후의 일들은 출애굽을 완성하기 위한 역사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은 길고 긴 구속 역사의 서막일 뿐이지 구속사의 결과물은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이러한 큰 일 자체를 구속의 사건으로 보면서, 성경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구속의 완성을 위한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구속 사건 자체라면,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타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그리스도 또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없는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새관점이 보는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일어난 큰 일은 아담의 타락과 관련된 내용이 없기에, 이러한 일이 아담으로 인한 타락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큰 일은 애굽을 물리치고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각가지 이적을 행사하신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이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속 사건으로 간주하면서,이스라엘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출애굽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비하는 모형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은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린다는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구속을 위한 일이 시작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구속이 성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의 과정은 목적을 위한 과정이었지, 출애굽을 하였다고 구속이라는 목적이 달성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 자체로 인해서 구원받은 민족으로 여기고서, 모세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본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 출애굽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구원받은 사건이면, 더 이상 행위 언약이 주어지면 안되기에, 톰 라이트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세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닌, 시내산 언약과 모압에서의 언약을 강론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기 위한 자리에 초대된 것으로 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과 불순종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이지, 구원에 머물라고 강론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어디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범죄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에,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심판을 의미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노의 대상에서 구속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큰 일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있는 상황 가운데 선택함을 받아야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 가운데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기 위해서 애굽의 종으로 있었다.
만약에 핍박받는 상태가 아닌 풍요한 상태에서 택함을 받았다면, 이들에게 하나님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삶에 어려운 환경을 허락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기에 호소력이 있었다.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기 위한 적절한 환경이기도하지만, 실제 인간의 상태가 종의 상태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닫고서 진실되게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펴신다.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이를 설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껏 본능적으로 섬겼던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최우선적으로, 인간이 섬겨야할 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정도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라서 안믿은 것이 아니라, 알아도 믿지 않을 것을 알고서 설명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정립되어있지도 않았다.
모세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을 설명하고있지만,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알려고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근거로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정작 기도 응답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과는 차이가 많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찾는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은 오히려 이방신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종교심에서 나온 교회 생활도 자칫 진정한 하나님과는 다른 신을 섬기는 생활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심은 결국 우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36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의 음성을 네게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의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네가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의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였던 하나님을 경험하였는데도 하나님을 외면하였다.
이는 인간의 뜻, 즉 욕심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의 욕심이나,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나아가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눈으로 직접보고 듣고 하였어도,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뵐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에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지 않는다.
이는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인간은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공동체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있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수평적 공동체를 형성해나아가지만, 이는 수직적 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조상이 있으며, 조상의 영향하에 존재한다.
또한 자신의 삶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수직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서는 수직적 공동체와 수평적 공동체가 상호 어떠한 관계를 이루어가면서 영향을 미치고있는가를 보여주고있다.
38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39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실 구원의 안식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영원한 안식으로의 초대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이 사는 삶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안식을 향하여야한다.
인생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 생각이 없이 습관적으로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는 것은, 실은 아무 욕심과 목적이 없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라는 육적인 욕심이 깔려있는 것이다.
인생의 삶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그리스도께 종속시킴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며,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생임을 깨닫고서, 자기 비하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으며, 무기력한 삶을 살아서도 안된다.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존재이다.
인생의 목적이 집을 장만하는 것이나, 자녀의 성공을 위한 것이나, 좋은 차를 사는 것이나, 비싼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하나님께 복종 시켜서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기업을 받는 자가 되어야할 것이다.
40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축복을 위해서 요구되는 외적인 행위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한도로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 위해서 행위가 요구된다면, 인간이 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하지 않기에 더 이상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구원을 위해서 믿음에 행위를 더하는 이들이나, 혹은 오직 충성을 말하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사역으로 만들뿐이다.
41 그 때에 모세가 요단 이쪽 해 돋는 쪽에서 세 성읍을 구별하였으니
42 이는 과거에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중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가 그의 생명을 보전하게 하기 위함이라
43 하나는 광야 평원에 있는 베셀이라 르우벤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길르앗 라못이라 갓 지파를 위한 것이요 하나는 바산 골란이라 므낫세 지파를 위한 것이었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도와 관계없는 살인은 보호받아야한다.
아담의 후손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범죄한 이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영원한 도피성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다.
도피성은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저지른 죄악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있는 의지는 노예 의지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모르고 한다고 말씀하신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지르는 일들이다.
인간의 죄악은 노예 의지에서 나온 죄악들이기에, 도피성이 되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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