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4. 22:14

신명기 2장 26-37절 말씀 묵상


26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  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겸손하고 온유한 모세와 교만한 시혼)

모세의 행동방식과 시혼의 행동 방식은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의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은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된 족속들로서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죄악이 가득한 족속이다.

에돔과 모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실질적으로 에돔과 모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아모리 족속이 멸망받을 족속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로서, 먼저 아모리 족속에게 심판을 선포하지 않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유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로 죄인이기에 결코 정죄하는데 앞장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바로의 아들로서 가장 정의감에 사로잡혀있었을 때, 가장 큰 실패를 하였던 것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는 행동은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화평을 선언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아모리 사람들은 공격받을 만한 행동을 하게된다.

표면적인 전투의 상황은 아모리왕 시혼에게 주어졌지만, 주권적 상황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교계나 세상이나 죄악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많은 시대이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인간이 자의적 판단으로 심판의 도구가 되려고해서는 않된다.

모세와 달리 아모리왕 시혼은 교만이 극에 달하였던 자이다.

세상을 대변하는 교만하고 악한 아모리인의 왕 시혼은 악한대로 자신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허락하는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아니라 굴복이었던 것이다.

종종 세상의 운영 원리는 지혜보다는 힘이며, 이는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승리이기에, 세상은 이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전쟁은 힘의 과시와 자존심의 싸움이며, 개인도 이러한 속성에 대부분 동참하고 있다.

개인도 이러한 이유로 망할 수 밖에 없기에, 성도는 제일이 되고자하는 세상 욕심을 피하는 것도 중요한 지혜 가운데 한 가지이다.

아모리 족속인 시혼은 에돔과 모압과 같이 세상에 속하여있는 자이지만, 에서와 모압과 달리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였다.

에서 자손과 모압 사람은 비록 구원의 영역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응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제일을 추구하는 아모리인의 왕 헤스본의 시혼은, 양보가 있을 수 없었기에,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악행을 행함으로서, 일반 은총의 특혜를 누릴 수가 없었다.


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

애굽의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애굽을 심판하셨듯이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헤스본 왕 시혼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민족이다.

순탄한 길을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대적자를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분이시기에 앞서서 자신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시고 축복하시는 방법의 한 가지로 대적자를 일으키신다.

지혜로운 자는 인생의 대적자들에 대하여 분노하면서 혈기로 자신을 통제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의 자녀를 연단시키고 성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부정적 상황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자숙하기보다는, 문제의 초점을 자신이 아닌 외부 상황에 돌리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정적 상황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

부정적 상황을 만났을 때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는 상황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종종 기독교인들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 사회 운동을 하곤하지만, 장작 하나님의 관심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헤스본 왕 시혼이 지배하던 영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고 루우벤과 갓 지파의  기업으로 삼은 것은, 이미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이었지만, 이는 아담에게 에덴에서 통치 명령을 실행함으로서 에덴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비록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기인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속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이머징 처치의 지도자 랍벨은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부분은 없다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혼동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이는 해석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한다.



32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모압의 땅이었던 야하스에서 이스라엘에 패한 시혼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시혼은 모압까지 자신의 관할로 다스리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악의 세력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악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강해지려고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심판하신다.

세상 사람은 스스로 강해지려는 속성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추구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외적인 강함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내적인 강함을 추구해야할 것이다.

교회 건물 외적인 규모의 확장은 세상의 풍습을 따라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유아까지도 진멸하게하시는 하나님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담겨있는 악의 씨앗이 가나안을 부패시킬 수 있었기에,  전부 멸하라고 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평화는 종종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제한 평화,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됨이 될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이 여러가지 매체를 통하여 하나된 지구촌에서 평화를 말하고있지만, 어디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평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화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서 선이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지만, 세상적인 윤리로는 결코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아모리 족속 전부를 멸하라고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심판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모리 족속에 대한 진멸은 마지막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다.

심판은 죄악의 보편성과 충만함으로 때가 찰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아모리 족속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성도는 모세와 같이 아모리 족속에게 바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세상을 심판하려고해서는 않된다.

성도는, 온유한 모세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화평을 추구해야한다.


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중간하게 점령하였을 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배울 수가 있었을 것이며,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가 되려고함으로서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량을 아시기에 적절한 분량만을 허락하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욕심을 주체할 수가 없기에 종종 적정선을 넘음으로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교회의 규모를 적정선으로 유지하면서, 그 이상으로 커질 때에는 분립을 하여야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같이 욕심에 파묻혀 파멸에 이르곤한다는 것이다.

교회 명칭에서 곧잘 사용하는 제일이나 중앙이란 명칭은 최고가 되고자하였던 아모리 족속과 같이, 최고를 지향하는 세상의 원리를 교회에 도입한 어리석은 명칭들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