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장 1-25절 말씀 묵상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모압 땅은 지나가야할 땅인데, 모압 땅 세일 산에서 두루 다닌 것은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가 표류하는 모습이 연상이 된다.
이렇게 목적도 없이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닌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가 덜 된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잔재를 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마치 훈련소에서 가스실에서 나온 병사가 두 팔을 벌리고 가스가 다 바람에 날려가기까지 기다리듯이,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애굽에서의 우상 숭배의 잔재를 씻어 버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애굽의 잔재를 버릴 수가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일제 시대에 한 가지 역할을 생각해 본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일제의 압제 그 자체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지만, 일제의 36년이란 압제 기간은 이조 500년의 뿌리깊은 유교와 성리학 사상의 잔재를 없앰으로서 대한민국에 교회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100년 일찍 들어왔던 카톨릭은 환경이 조성이 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피흘림에도 불구하고 별로 결실을 볼 수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지금도 유교의 뿌리가 깊이 남아있는 강릉이나 전통에 파묻힌 경주와 배타적인 제주가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일제라는 세상의 악을 사용하셔서 택한 자를 깨끗케하시는 섭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일제가 한국이 교회가 뿌리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고 하더라도 악은 악일 뿐이다.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을 연단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다고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인간은 자기의 길의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 스스로가 알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 이상을 생각하거나 이해 할 수가 없다.
사람이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가야할 때가 있다.
머물러야할 때 가려고하거나 가야할 상황에서 머무르려고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길이 열리지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갈 바를 제시해주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가 가는 여정은 왜 그러한 여정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길을 인도하시기에,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순종하며 나아가야한다.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에돔왕은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에돔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다.
다른 족속 같았으면 이미 싸움에 휘말렸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존중해주는 만큼 에돔을 배려해주셨다.
세일 산에 거주하는 에돔 사람들은 야곱의 형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의 배려하심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대적하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민족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적자를 남겨놓은 것은, 마치 바울이 지닌 육체의 가시와 같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축귀 사역에 익숙한 이들은 종종 자신은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이원론적 논리에 파묻히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로하여금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악을 허락하시기도 하신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angel of satan는 악 자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로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악을 허락하셨다.
성도에게 주어진 가시와 같은 악한 환경들은 종종 성도를 겸손케하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겸손을 위해서 상황을 수용하고 같이 존립 할 필요가 있다.
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위해서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동들을 정당화시키기도한다.
십자군의 경우, 예루살렘 회복 전쟁을 정당화시키면서 자신들이거쳐가는 도시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수단으로 특혜를 빌미로 상납을 강요하기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어느 누구도 결과가 좋지 못했다.
무력에 의한 갈취는 상대를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상대에 대한 존중만이 악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는 후에 에돔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가나안의 진입 과정에서 원한을 산 적대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에게 양식과 물을 탈취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으로서, 가나안 생활 시작부터 에돔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지 않도록 하신다.
과정 가운데서의 원한 관계는 지속적인 적대관계의 빌미를 제공해 줄 수 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풍요라고 할 수 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는 모든 풍요가 당연하게만 여겨질 것이다.
가장 풍요로운 환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져오는 가장 열악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환경이 풍요로우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려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열악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풍요를 경험 할 수 있었지만, 정작 풍요로운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빈곤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종종 세상적인 관점에서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하여 간증하는 것은 대부분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서 충성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복주신다는 말들은 목사가 하는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연단시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에 온갖 험난한 여정을 극복하여야만 했듯이, 삶의 환경에서의 고난을 주시며,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주시곤하신다.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다.
모세는 40의 젊은 나이에 편안했던 바로의 궁을 떠나 40년간 열악한 환경에서 자신을 비우는 훈련을 받았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든 기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자신과 다르다고, 아니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대적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모압도 에돔과 마찬가지로 장차 이스라엘을 연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녀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어려움과 장애물들을 말끔하게 제거하시지 않고 놓아두신다.
성도는 대적이나 자신을 힘들게하는 이들이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지려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임을 인식하여야만 한다.
10 (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시내까지 38년동안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는가?
가나안을 바로 앞두고 그 앞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거나, 모세가 무능해서 자신들을 인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효율성과 능률이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빨리 빨리”로 표현되는 급박함은 정작 하나님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상실하고있다.
밥 버포드의 “하프 타임”에서는 중년의 나이에서의 인생의 실패를 통해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삶의 의미”로 관심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상황은 최악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을 때의 성공은 최악의 인생이 될 수 있으며, 중년의 실패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인생은 더딜 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대부분 멸망받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멸망은, 뿌리 깊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은 안식의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인생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에 대하여 교만하면 않되고, 타인에 대해서도 쉽게 비난해서는 않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인간들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은혜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뿐이다.
1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암몬 족속도 아브라함의 조카들의 족속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족속이다.
이들도 모압과 마참가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하기 위해서 세우신 족속이다.
인생에게 육체의 가시와 같은 존재는 도처에 깔려있다.
인생은 이들과 싸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생은 오직 자신을 돌아볼 때 바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
20 (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 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이 명성이 있다고 이스라엘이 잘난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들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너무나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는 신약의 성도를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맥락의 성격으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스데반과같이 순교의 피를 흘리는 것이 승리의 삶이라고 규정하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중요시하는 것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의 영생이다.
광야의 여정에서 보여주는 승리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처인 새하늘과 새땅을 소망하는 가운데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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