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1. 23:45

신명기 1장 19-33절 말씀 묵상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호렙산에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 40년 간의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훈련 과정을 거침으로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 할 수 있었다.

40년의 세월과 40일간의 정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의 금식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감당하신 것과,  부활 후에 40일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심으로, 다가 올 일들을 준비하게하는 충만한 숫자인 40과 연계시켜 생각 할 수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인간적인 것을 없애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준비되어지는 숫자다.

광야에서의 40년은 광야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하면서, 인간적으로는 가장 연약하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만히 준비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십일 간 광야에서의 금식 후에, 인간적으로는 가장 지치고 연약해진 상태에서 사단을 물리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 영원한  가나안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40일간 말씀하심으로서, 가나안을 준비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원형이 되실 수 있었다.

우리의 인생은 어디에 속하여 있는가?

가장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함이냐 아니면 아모리 족속과 같이 가장 강함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불신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존재로 살 것인가를 선택하여야한다.

참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었기에, 더 이상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거나 세상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인생의 여정 가운데 넘어야 할 험난한 난관들이 결코 성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여야만 할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아모리 족속의 죄악에 대해서는 이미 아브라함 때에도 언급되어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시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승리가 선언된 곳이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세상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여야한다.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하여야할 일을 못하는, 아모리 족속들 앞에 선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이들이 아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스스로 강한 자가 되어야겠다는 유혹은 물리쳐야한다.

성도가 스스로 강한 자가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의지하며 교만해진다.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외적인 규모를 키워야한다는 논리도 지극히 인간적인 논리인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족속 앞에서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표현되어야 할, 왕으로서의 직책을 상실한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이미 아담 안에서 실패한, 왕으로서의 역할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3중직, 즉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어야했지만, 이 3중직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흔히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실행하는 통치 명령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아담은 다스림의 대상인 생물 가운데 속하여 있었던 들짐승으로서의 뱀을 다스리는데 실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선악과 금령을 범하게 되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죄악이 가득한 아모리 족속을 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이 뱀을 다스렸어야 했던것과 같이, 우상을 멸하고 다스려야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담과 같은 실패를 한 것이다.

아모리 족속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권을 상실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궁극적으로 사단을 제압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더딘 반응으로 정탐군을 보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에 의지하여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서 믿고자하는 것과 같이, 불신이 행동의 동기가 되고있다.

이는 만약에 그 곳에서의 소산이 보잘것 없거나, 환경이 열악하다면 정복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에덴에서 실패한 아담의 역할을 재연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실현된 정복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중요한 과정이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왕으로서의 역할은 에덴의 확장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정복은, 실패한 아담의 역할에 대한 재연이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되어야 할 모습의 유형적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이 정복할 가나안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야할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이다.

열두 지파의 대표들의 정탐은, 그 땅이 정복할 만한 땅인가에 대한 정탐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땅을 준비하셨는가를 확인하는 정탐이었으며, 정탐한 땅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에 대한 정탐이 되어야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아모리 족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약속하신 땅이었으며,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기에, 앞으로 있을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설레임 가운데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통치 명령(창 1:28)을 근거로하여, 대위임령이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사도행전의 역사의 유형학적 모형이었다.


23  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 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열두지파의 역할의 원형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창 1:28)을 통한 에덴의 확장에 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열두지파는 세상을 정복할 하나님의 군사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제자를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심으로 에덴과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완성하셨다.


24  그들이 돌이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 곳을 정탐하고
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지상 명령을 통하여 확장될 하나님 나라는, 자연법 아래에서 이미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온갖 문화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경험 할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풍요로운 공급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우상 숭배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만 배타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하나님에 대한 왜곡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발전되고있는 것을 본다.

성령에 의한 믿음이 없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성과 논리와 자연법은 존중되어야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가 임할 때도 분별하여 받아들어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아담은 처음 타락 한 후에 바로 여자를 원망하며, 하나님께 불평을 하였다.

성도는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힘든 환경을 만날 수 밖에 없지만, 힘든 환경은 성도를 더욱 성숙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방편임을 기억하여야할 것이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도우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인간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도우심이다.

성도가 세상을 향해서 선한 싸움을 하여야할 상대들은 결코 인간적으로는 감당 할 수 없는 이들이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감당 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있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믿음에 대한 훈련을 받았지만, 이는 거듭나지 않고는 훈련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힘입어, 모든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이러한 난관들을 감당 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된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있어서 사단의 방해를 물리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들과의 싸움에서 결국 패하였고, 아담도 에덴에서 유혹을 받아 실패를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희생을 통하여 승리를 하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신자에게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기에, 성도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위축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영역의 확장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이라면,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하나님의 일은 항상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하신다.

인간은 결코 주체가 될 수가 없다.

다만 순종이 요구될 뿐이다.

순종은 승리를 위한 조건이다.

비록 에덴에서 아담은 정복을 통한 에덴의 확장에 실패를 하였지만, 가나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앞서서 싸우시기에 승리 할 수가 있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성도의 하나님 나라 확장은, 순종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도행전의 역사와 같이, 성령의 강림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사도들이 승리를 경험 할 수 있었듯이,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들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장차 아들로 부름을 받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즉 성도들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이어주는 아들의 신분이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스라엘은 아들로 부름을 받아 출애굽을 하였지만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두 번의 구원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성취하셨으며, 동시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모든 과정을 단번에 이루셨기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된 것이다.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순종은 아들에게 요구되었던 절대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있다.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수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다고하지만 이는 거짓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을 가장 잘 알았던 아담도 타락 할 수 밖에 없었고, 광야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은 우선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기에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불행한 상황에서 일차적인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모를 뿐이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셔도 따라올 능력과 자격이 없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긍휼하시기에, 이렇게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행위나 충성을 통해서 구원의 조건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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