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7. 00:08

사도행전 3장 11~26절 말씀 묵상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면 일차적으로 사람에게 주목한다.


하지만 참된 목자는 자신에게 주목된 상황을 하나님께로 전환시킨다.


목회자는 구조상 항상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수 없기에 처음에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더라도 목회자는 이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난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이 될 것이다.


이는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이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더욱 더 조심하여야한다.


인간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교만의 관점에서 보면서,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도가 부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생명의 주를 너희가 죽였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정죄이지만 이러한 말을 하여야지만 문제의 심각성에 직시할 수가 있다.


조상과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까지 정죄 당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달리 해석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죄할 때 살해 위협을 당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부정적 상황은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상황을 정죄하는 많은 이들이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를 위한 정죄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방식은 구약만의 방식이다.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차이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정죄로 끝날 것이냐 아니면 복음에서 말하는 희망을 접목시킬 것이냐의 차이다.


현대 사회는 부정적 상황을 말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첫 번째는 결국 자기 자신은 예외로 둔다는 것이다.


부정적 상황의 현상은 본질적인 죄성이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인간은 어느 누구나 그러한 환경이 조성이 되면 똑같은 죄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누구나 거미줄과 같이 얽혀있어서 바른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자칫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정죄에 묶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꾸미며 정죄할 상황만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는 이들도 있다.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믿음과 치유의 연관성을 드러냄으로서 믿음에 대하여 언금하기 시작한다


믿음으로 완전히 낫는다는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 밖에 없는 개념이지만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역사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지만 위로는 될 수 있다.


자신의 악함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서 알아야할 필요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로 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알게한 내용들이 세례 요한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할을 하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하고있다.


베드로가 언급한 조상들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신뢰하였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공부하여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롭게 되는 것은 이전 것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주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볼 경우에는 위로부터의 새로움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새로움이다.


판네베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신학들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특징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새롭게 됨이 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르게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근 구속 사건은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과 예정과 섭리를 인간이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억지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근원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고있음을 말한다.


이는 구약 성경을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역사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그리스도께로 귀결됨을 말하고있다.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신 것을 고려해 볼 때 아담 언약으로부터 이어지는 노아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 언약을 그리스도의 새언약과의 연계성 가운데 정립해 볼 수 있다.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궁극적으로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근거가되는 그들의 조상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시킴으로서 매우 설득력있는 설교를 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들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연관시켜 전도하는 놀라운 방식이다.


이는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존중해주면서도 전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5. 23:53

사도행전 3장 1~10절 말씀 묵상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것은 유대교의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영역으로 성전이 올라간 것이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갔다고해서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사용하면 안된다.

교회당에 성전의 명칭을 붙이는 것은 성도를 속이는 삯군 목회자의 농락이다.

예루살렘의 제2성전은 70년 경에 로마군에 의해서 파괴가 되었으며 더 이상 성도에게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최근의 제3성전 건축과 관련된 논란은 잘못된 세대주의적 발상이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질병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대변해준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육적인 질병의 증상들은 영적인 죽음을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나면서부터 불구인 자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이들에 대한 희망을 제시해준다.


이는 나면서부터 일그러지고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사람은 불구가 계기가 되어 새생명을 얻게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인생의 부정적 상황들은 종종 하나님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계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본질적인 복음을 접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부분 다른 목적을 위한 기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저주가 돠지만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은 붕괴를 경험하면서 광야에서와는 달리 하나님께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도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와 처지를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한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비록 잘못된 동기나 혹은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하더라도 교회 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로 택하였듯이, 성도는 비록 교회가 외적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로 사용하여야한다.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고침받을 이에게 자신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일방적인 베품보다는 최소한도의 반응이 요구되어야 한다.


준비가 안되고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은 오히려 자기 과시가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시대에는 정경이 없었기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능력을 허락하셨다.


만약 정경이 있는 지금 시대에 신자에게 이와같은 권능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말씀보다도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는 반드시 교만하여 타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권능은 그들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던 자이기에 걷거나 뛰는 방식을 배울 기회도 없었다.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기도하고 뛰기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새로운 창조로서 치료나 개선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걷거나 뛰는 것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창조로서 성령의 새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 신약의 시대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대로서 아담 안에서 죽었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시대이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나면서 못걷던 자가 걷거나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모든 이들이 놀라는 역사가 일어나야한다.


교회가 사회의 근심이 되는 것은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생명의 문제보다는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려고한다.


생명이 없어서 나는 썩은 냄새는 향수를 뿌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의 전환


톰 라이트는 사도행전을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을 전환시킨 기록으로 보고있다.


이스라엘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난한 자와 재산을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회개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삶의 방식의 문제로 보았다.


톰 라이트에게 새로운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을 적용하는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공동체이다.


베드로가 행한 기적은 단순히 획기적으로 더 좋은 것이 아니다.


회개한 자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는 단순한 삶의 개선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아담 안에서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 구현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무에서(Ex Nihilo)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새창조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부패를 개선하고자 많은 이들이 톰 라이트의 책을 참조하지만, 교회의 문제는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톰 라이트는 구약과 신약을 윤리의 차이로 보고있기에 올바른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병패는 교회가 제대로된 복음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접목시켜서 교인의 행동 방식을 고치려고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가냘픈 생명의 불씨 마저도 꺼뜨려 버리려는 위험한 행동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에게 전가된 의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단지 삶의 방식을 개선시켜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5. 00:41

사도행전 2장 37-47절 말씀 묵상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복음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죄에 대하여 분명한 선포를 하였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마치 보험을 드는 것에 비유하면서 권하는데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복음은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야한다.


한국교회의 타락은 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의 설교들은 죄에 대한 선포가 없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할 수가 없다.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죄사함의 결과로 성령을 받지만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다.


회개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신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랑 할 수가 없다.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먼 데 사람, 즉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알고있었으며 이를 직접 경험하게된다. (행 8:14)


사도행전은 우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된 시초를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미가 있다.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유대인들에게 패역한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자칫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실질적 상태를 직언함으로서, 베드로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상황과 확실하게 다르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서 담대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담대함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행하는 표적과 기사도 베드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베드로의 변화는 가장 놀라운 표적과 기사 가운데 하나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도 아니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근거로서 타락한 세대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한 날에 삼천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도 힘든 출애굽의 과정을 겪었고 끊임없이 불평을 하였지만, 베드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아가고있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은 이미 교회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교회라는 실질적 공동체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교회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성령의 창조 사역의 증거들이다.


사도시대가 끝나고 정경으로서의 성경이 갖추어진 이후에는 더 이상의 사도의 역할이 필요없으며, 사도들의 역할이 끝났기에 기사와 표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사와 표적은 말씀이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들에게 권위를 입혀주기 위함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신사도운동은 성경말씀에 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면서 성경 말씀의 권위를 훼손시키고있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거짓 영의 역사도 같이 일어나고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영적 분별력이 요구된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현재도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일도 일종의 기사와 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이와같은 기사와 표적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현재는 사도의 시대가 아니지만 이들의 행함을 본받아 지혜롭게 행할 필요가 있다.


이단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모든 재산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바치기를 강요하지만 이러한 강요는 분명 성격상 신사도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시대는 아직 교회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성전에서 모였지만 교회와 성전을 혼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용어를 붙이면 거룩함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오늘날 교회 건물을 지으면서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삵군이다.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들은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있다.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 실질적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의 근심이 된 한국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사랑이 식어진 한국교회의 상황은 단지 교회의 상황이기 이전에 이 세대가 얼마나 패역한 세대인가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세균의 내성이 강하지면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여야 하듯이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를 인식할 때에는 교회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 하여야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전혀 방어능력을 가추지 못한 무력함을 보여주면서 허무하게 무너져가고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영적으로 무장되고 숙련된 목회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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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3. 21:31

사도행전 2장 14~36절 말씀 묵상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여러가지로 부족한 모습을 보였어도 이번 설교를 통하여 얼마나 베드로가 성숙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성격대로 사용하시지만 이번 베드로의 설교는 단지 성격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깨달은 사도로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에 대한 소명으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증언은 단지 베드로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인한 성령의 사역이다.


비록 부족한 성격이어도 수동적인 성격보다는 능동적이 성격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열심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있음을 본다.


인간은 누구나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는 과정일 뿐이다.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오해나 잘못된 이해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


신학자들의 변증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논술 방식이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육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요엘 예언의 성취를 말한다.


말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허락된 은혜의 시대이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굳은 자들이기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인하여 마음을 돌이키지는 않겠지만 마음의 찔림은 있을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증거되었듯이 타락한 이들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하여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여야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은 마음에 찔림을 받은 이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믿음은 증거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능과 표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은혜가 인하여야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죽인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을 분명히 말하고있다.


유대인을 변호하는 톰라이트는 예수를 죽인 이들이 로마이며, 예수는 로마로 대변되는 세상 권력을 향하여 어떻게 희생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왜곡시키고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의 손을 빌려 그리스도를 죽였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것은 에덴에서 약속된 영원한 안식을 근거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약속되었던 영원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으신 것이다.


처음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 안에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행위는 행위 언약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부활은 행위 언약에 대한 공로적 축복으로 인한 것이었다.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베드로는 다윗의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8)”를 인용함으로서 다윗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것은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순종의 성취에 따른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선물이며,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다윗을 통하여 증거되고있다.


사도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는 것이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사역을 충족시키심으로 안식을 성취하셨기에 성령의 창조 사역이 이 땅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 땅을 축복하시는 통로이다.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예비하였음을 증거하고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통하여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보았다.


인생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패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세상의 성공을 위한 곳이 아니라 세상에서 패배한 자들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다.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단이 행동하는 근거와 정당성을 없애는 것으로서 사단의 패배를 선언 하는 것이다.


사단은 패배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발등상이 되기까지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사단을 소멸케하실 것이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못박은 이들이 이스라엘인 것은 아담의 죄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 속성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한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좀비와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한다.


현대 사회는 마치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이 사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상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사단의 종노릇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세상에서의 불행은 단지 불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증거)


예수를 증거하는 베드로와 달리 현대 신학은 기독론보다도 신론 중심으로 변화되고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윤리와 도덕이 자리잡아 간다.


현대인이라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지는 않다.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 교회론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신론 중심적 교회론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한다.


이처럼 현대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거나 변질되고있는 것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은 단지 이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내내 있어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못박는 이들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에서 바리세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듯이 이 시대 교회에서는 목회자, 신학자,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있다.


겉으로 평온해보이는 이 시대에 교인수의 급격한 감소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느때보다도 더욱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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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 23:54

사도행전 2장 1~13절 말씀 묵상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과 안식)


오순절은 언약, 즉 행위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오순절은 안식의 성취로서, 유대인들은 칠칠절, 혹은 맥추절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지만,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참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율법에서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모형과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인 그리스도의 안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완성시키신 분이시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안식을 위한 요구 조건으로서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이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안식의 주인이되신 것은 안식을 위해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처음 아담은 범죄 후에 에덴에서 쫒겨남으로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죽음을 경험하였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성취와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에덴에서의 한시적 요구의 충족에 대한 결과로서의 안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부활은 처음 아담에게 에덴에서 요구되었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금령의 성취에 대한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된 안식을 기초로 시작되는 새로운 창조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안식으로서의 첫 열매인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임하게 될 보편적 안식의 표현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한시적 검증의 시간이 종결된 뒤에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을 완성시키셨기에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안식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오순절은 부활과 더불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안식이 오순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짐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창조 사역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면서 성령의 새창조를 의미한다.


성형의 창조 사역은 사도행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의 다음 날 보리의 첫 단을 드리는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시킬 수가 있으며, 50일째 되는 날 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와 기쁨의 절기로서 맥추절,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이 날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성령강림절이다.


오순절의 의미가 약화된 장로교에서의 오순절은 단지 맥추절이며, 맥추감사헌금을 내는 날로만 인식되고있는 것이 안타깝기만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대비 관계 가운데 볼 때 처음 아담이 실패한 통치 명령 (문화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안식을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칼빈주의로 표현되는 카이퍼의 후예들은 에덴에서의 문화 명령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보고있지 않기에 문화 명령을 성도의 과제로 보고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으로 대변되는 문화칼빈주의의 세계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이들이 권하는 문화변혁운동은 그리스도의 안식과 연결시킬 수 없으며,   성령의 새 창조 사역과는 동떨어진 개념이다.


알버트 월터스가 수용하는 새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 보는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개혁주의에서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일뿐, 새관점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실체로 보지는 않는다.


참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안식과 더불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모든 나라들 가운데로 확장 되어야함을 알리는 사건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문화변혁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도 아니며,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시기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성령의 창조 사역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이땅에서 실체로서 구체화되고있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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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 23:20

사도행전 1장 12~26절 말씀묵상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제자들이 아직 유대 율법을 준수하며 생활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아직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안식을 위한 한시적인 명령이 재연된 것으로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기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가 일주일의 첫 날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일상의 모든 삶이 그리스가 성취하신 안식을 기반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오직 기도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모임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를 뽑는 과정이었으면서 동시에 오순절에 임하실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다락방에서 모였지만 모인 이들의 숫자가 백 이십명이나 되었던 것으로보아 다락방 모임이 좀 더 규모가 커진 야외모임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맛디아를 뽑으면서 오순절을 준비하는 제자들의 모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시내산에서의 모임을 준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상시킨다.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 세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과 시내산에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심이 유비적으로 재연된 것이다.


마치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홍해와 시내산 강림은 실체로서의 믈세례와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한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기다렸지만,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보다는 간절한 사모함과 기대감 가운데 오직 기도로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렸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심 하나님과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도행전의 과정을 통하여 유비적으로 재연되면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여정은 이 땅에 실체적으로 임하게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는 모형이었으며 실체는 아니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과 더불어 이 땅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보고있다는 것이 개혁주의와 다른 점이다.


새관점은 유대 중심적 신학이기에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에서 보고있다.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제자들의 모임과 더불어 시작된 무리들의 모임은 힘써서 기도한 이후에 진행되었다.


자신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순종의 행위인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심겨지고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아담에 의해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이 이 땅에서 다시 선포되면서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정의와 섭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정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인간이 본질적 죄인임을 감안할 때 반드시 불의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완악함과 본질적 죄성을 고려할 때 허용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도록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도 과거의 상처에 묶이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 가운데 임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을 통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되는 것이 복된 자의 길일 것이다.


가롯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이기심에 묶임바되어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경험하면서도 사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적 환경들을 자신의 욕심에 이용할 때 어느 누구나 가룟 유다의 길을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도는 과거에 집착하는 피해의식보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앞으로 행할 것에 대한 준비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적 상처와 불행했던 과거들을 앞으로의 진보를 위한 계기로 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숫자의 중요성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


창조 과정으로서의 7일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로서의 12와 충만한 숫자로서의 40등 숫자의 의미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숫자들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도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12사도를 필요로하였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각각의 직무가 있었듯이 12사도도 각각의 직무가 있었다.


12사도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구현시키고있다.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자이다.


가룟 유다는 죄인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가룟 유다와 손을 잡고서 예수를 죽인 자들이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이었다.


가룟 유다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된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감당했어야할 직분을 다른 민족들이 대신하여 감당하게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를 다시 세우는 것은 말씀을 응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도 종종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행하셨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말씀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유혹을 거부하면서, 말씀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신자의 삶이 말씀에 반응하여 하는 것이다.


멸망할 자들도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유혹에 응답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팔아먹는 자들도 유혹받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있는 것이다.


욕심이하는 유혹에 이끌려 이스라엘 성전에서 장사하였던 이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신의 욕심이 성취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요한의 세례에서 시작된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예수의 사역이 요한의 세례와 더불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사역이 시작되었듯이 사도들의 사역도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시작된다.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은 성령의 임하심과 더불어 시작될 성령과 함께하는 사도들의 역사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신자의 신앙생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가운데 행해져야 할 것이다.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는 증인으로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부활하심과 예수의 40일동안의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들은 자들 이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에게는 사도라는 용어를 붙이면 안된다.


사도행전 29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이어가는 사도들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가끔 이상한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자신 스스로를 사도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된다.


심지어는 베드로를 목사라고 부르고 자신을 사도라고하면서 목사와 사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단지 스스로 높아지면서 예수를 팔아먹는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다.


성도는 비록 사도는 아니지만 성령의 쓰임받는 도구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들이다.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제비뽑기는 도박이 아니라 인간적인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는 행위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제비뽑기는 도박에 불과하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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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7. 12. 31. 19:56

사도행전 1장 1~11절 말씀 묵상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의 본을 보여준다.


어떠한 관계성에서든지 복음은 관계성을 통해서 전파된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관계성의 형상을 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파괴를 경험하지만 복음은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어진 공동체의 회복을 경험하게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궁극적으로 깨어진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사도들의 행적을 통하여 보여주고있다.


문화칼빈주의에서는 문화나 사회변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촉구하지만 사도들이 보여준 행적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즉 대위임령을 근거로하고있음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행적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공동체의 회복이다.


공동체의 회복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전하였던 복음과 달리 과거 한국교회의 국가 조찬기도회는 한국 교회가 어떻게 권력에 아부하면서 커졌는지를 보여주고있으며, 한국 교회가 왜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과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이후의 사십 일동안의 행적은 이 땅에 시작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가나안을 준비하는 40년의 광야 생활이 불순종으로 인한 징계의 시간이었는데 반하여 부뢀하심과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40일 간의 행적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시는 시간이었다.


40일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던 기간이었으며, 기다림의  시간이며, 더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충족된  시간이었으며 또한 완성의 시간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십 일간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족된 완전한 시간이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기까지 참복음에 대하여 깨닫지를 못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사도들이 알고있었던 예수는 단지 인간적인 차원의 가르침뿐이었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야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게되었다.


사복음서만을 강조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와 바울을 대립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복음을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고한다.


이들은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따름의 대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새관점은 유대교의 틀에다 복음을 짜맞추어 넣었기에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제자들은 예수께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인지를 물어보았듯이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새관점주의자들에게 예수는 오직 유대교의 회복을 위한 존재일 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하고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보는 예수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이 보는 복음은 비록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지만 그 안에 참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은 홍해라는 물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사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육적인 세례는 어디까지나 모형과 그림자로서 실체를 예비하고있다.


성령은 창조 사역자로서 태초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노아 홍수의 물을 바람으로 말리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하여금 홍해를 건너게하셨으며,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게하셨고, 솔로몬 성전을 구름으로 덮으셨으며, 예수님의 세례에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이제 사도들에게도 임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공식적으로 세우신다.


첫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같이 성령의 창조 사역은 점진적이었으며, 이러한 사역들은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시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였다.


성령 세례는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하고도 진정한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3년간의 직접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음으로해서 깨달음의 한계를 노출하였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신학교에서의 훈련 과정을 이수하면서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내주하심이 없이는, 새관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은 참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대답하셔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서 사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되면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되었고 더 이상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참된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도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민족적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제한되어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은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갈릴리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승천을 보았지만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


그리스도의 승천 당시에는 교회가 제한적이었지만 재림시에는 전 세계적인 교회의 확장으로 인해서 재림시 모든 성도가 알 수 있도록 인식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후 3:10)”


천사들이 흰 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났었듯이 마지막 때에는 천상의 영역upper-register과 지상의 영역lower-register이 서로 하나가되는 세상이 도래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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