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6. 19:00

사도행전 10장 34-48절 말씀 묵상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생각의 경계를 넘어선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열정이 있었던 제자였는데 아마도 그의 열정은 예수를 유대 민족의 해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직접 지상명령(마 28:19-20)을 말씀 하신 것으로 인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생각은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베드로의 열심과 열정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열심은 민족적이고 폐쇄적인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집단 이기주의 안에서 폐쇄되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열심과 열정의 한계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집단의 폐쇄성을 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에게서 이러한 열심이 나올 수가 없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을 넘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열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외형보다는 중심을 보신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질 수가 있었다.

고넬료에게는 유대적 외형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은 베드로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에 대한 전환점을 제공해준다.

성도는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의 교회만을 위한 사람이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화평의 복음)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을 본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주이신 것을 세삼 깨닫고서 화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민족과의 화평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닭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과연 모든 이들과의 화평을 주시는 말씀일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평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규명해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화평이며, 이를 근거로 성도들 안에서의 화평이 확대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화평은 세상과의 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

복음은 세상과 화평을 말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평화의 메세지는 로마에 대한 민족적 무장 반란이라는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로마라는 세상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희생되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것이며, 예수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라고 보는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메세지는 그의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화평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평화를 외칠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는 바벨탑만 쌓을 뿐이다.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기름 부으심)

예수께서 기름 부으심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대한 왕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가 폭력에 반대하는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한다.


예수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해방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의 전유물이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모두 다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적용되는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적용되는 통치 영역으로 구분하여 접근하여야 한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톰 라이트는 예수가 로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처형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면서 죽였다는 것을 증언하고있다.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가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는 지극히 유대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이다.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사십이라는 충만한 숫자만큼이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불신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 증거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무 한테나 증거되어서는 안된다.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재판장이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불신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죄와 심판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신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죄사함은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온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자들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깨닫는 진리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싫어하는 톰 라이트는 특이한 해석을 한다.

라이트는, 이스라엘은 잘못된 행동 방식 때문에 포로 생활을 하였으며,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는 만찬이었으며, 예수의 십자가는 포로생활에서의 해방이 선언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행동방식, 즉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와 싸우는 방식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희생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여기를 참조하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결단을 요구하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대한 증거이다.

전도나 설교는 인간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결단을 촉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성령의 강권적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이 땅에서 증거되고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오히려 많은 지식과 철학이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사역을 증거했던 이들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었던 것과 같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증인이었듯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야한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방언은 인간의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표현이다.

방언은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외적인 응답으로서의 세례)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이 모두 다 성령 세례를 받고서 이에 대한 응답으로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던 것은, 세례는 외적인 교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었다는 승인의 개념으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응답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를 행하였듯이 할례와 세례는 같은 면과 다른 면이 공존한다.

할례는 율법과 같이 언약에 대한 응답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기 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모두 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성도의 응답으로,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징표로 받는 것이지만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교회가 전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세례는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조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외적인 교회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물세례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페더럴 비전은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지만 구원에 참여될 수 잇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아직 조직이 안되어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법 규모가 큰 집단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 교수(1968-1983)였던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2003년 어번 에버뉴 장로교회Auburn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시작된 페더럴 비전은 구원의 조건으로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로서의 세례를 들고 있다.

페더럴 비전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매우 유사하며, 새관점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여야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 혼탁한 현 시대에 외형적 교회를 대하는 성도에게는 어느 시대보다도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 때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5. 22:08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말씀 묵상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환상에서 성경으로)


지금은 성도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점진적으로 알아가지만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사도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의적 의지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에, 성도가 성경을 보고 깨달은 것이 사도시대에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내재되어있는 죄성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는 적극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베드로가 본 환상 못지 않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한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성도가 읽는 성경을 통해서 시기 적절하게 상황 가운데  인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시대에 더 이상 직접적인 환상을 통한 계시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신적 계시를 받으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직접 경험를 통해서 계시를 받으려는 인간의 욕심과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하나님의 섬세하심)


상황 가운데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과 깊으신 배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커다란 그림과 잘 조화를 이룬다.


환상을 보지 않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고넬료쪽에서만의 환상으로는 베드로를 설득하지 못하였을텐데 양쪽의 상황 가운데 시공간을 넘나들며 간섭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창조주로서의 세밀함으로 보려주시고 있다.


성령께서는 상황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셨기에 베드로의 생각과 상황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간섭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면서도 세심하고 은밀한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를 존중하시기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실 뿐이다.


인간이 느끼는 평안이 하나님께서 나의 세심하고 깊은 것을 모르실 것이라는 안심에서 올 수도 있다.


안심과 평안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해서는 안된다.


심판 때에는 인간의 가장 깊은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하는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보려고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간다.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에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경계를 넘게하시는 하나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사회 관습에 묶여있다.


가끔 이러한 관습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하기에 성령의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필요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면서 동시에 복음이 어떻게 유대인의 배타적인 틀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령의 직접적이고 강권적인 말씀이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한 유대인의 법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령이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이방인이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가두어 놓는 관습적인 틀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기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에 소속되어있기에 성도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복음 전파의 매개체)


이방인인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았다고하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연결될 수 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총의 영역이다.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말씀이나 환상은 일반 은총을 기반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베드로가 전하는 특별 은총으로서의 말씀은 일반 은총을 매개로 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즉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나라와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하여 있는 백성이다.


잘못된 이원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나라까지도 사단의 영역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자연법적인 상식과 일상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면서 상식과 자연법을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 전파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고넬료는 자연법과 상식을 존중하였기에 유대 온 족속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방인과의 교제가 금지되어있었음에도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욥바에서 온 형제들도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권적 역사와 더불어 일상에서 베드로가 신뢰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증인들이 필요했다.


복음은 공동체적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분리적 관습을 틀을 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같이 도움이 될 수 있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고넬료에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고넬료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행동은 복음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이었다.


공동체의 확장을 위해서는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가 꼭 필요하다.


분열된 사회에서 분리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인물은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되어야 한다.


한쪽을 무시하는 인물은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될 수 없다.


사회법을 무시하면서 그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목사는 사회에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회에서 복음 전파에 대한 의무와 사명을 가져야하지만, 이는 사회법을 존중하면서 사회에서 존중받고 영향력을 끼칠 때 가능한 것이다.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들은 복음을 전파 할 수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폐쇄된 세계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만족하는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리어 절한 것은 베드로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보다도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에 너무도 반갑고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방인이고 로마의 군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절을 하는 것은 로마법에도 크게 위배되었을 수도 있으며, 로마인으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야 한다.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 종종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목회자가 사회적 능력이 있는 성도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할 때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신앙의 영역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 사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넘어설 때 진정한 열매가 맺혀지지만, 현실의 교회 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어떠한 이유에서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렸든 간에 서로에 대한 과도한 높임은 결국 성도의 교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박사나 교수와 같은 사회적 칭호를 붙이며 서로를 높여주는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상식과 자연법을 넘어서야 할 때와 넘지말아야 할 때가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언급한 어떤 목사의 “사회법 위의 영적 제사법이 있다”는 주장은 전혀 적절하지 않은 독선이다.


사회법을 어기면서 건물을 지은 것도 문제이지만 건물을 크게 짓는 것은 영적 제사법에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비상식이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외적인 건물이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 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큰 건물은 욕심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 커야한다는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의 수단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위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것도 아니며 자연법도 아닌 폐쇄적인 민족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관계이다.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사도행전의 역사는 분명하게 성령의 새창조 역사이며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행보로서 하나님의 작정하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는 양립이 불가능하면서도 양립하고 있는 것이기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지으신 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 안에 상실되었던 인격이 회복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존중해 주신다.


성도의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구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셨으니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격체로 존재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인격적 표현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를  인격체로 대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반응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인협력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면서 또한 인격적 순종을 위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지만, 고넬료의 기도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문을 연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데리고 온 이들은 베드로 앞에 선 이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선 이들이다.


이들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듣고 싶어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모인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성도들의 무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성도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교회 모임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나, 윤리에 관한 것이나, 교회 건축이나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 주요 주제가 될 때는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회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가 말씀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4. 19:00

사도행전 10장 1-16절 말씀 묵상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넬료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역적으로 유대 이스라엘에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험 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로서는 자신이 로마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랴에 근무를 했었기에 복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주어진 환경이 비록 고향과는 먼 곳이었지만 이곳이 고넬료에게는 축복의 기회였다.

삶의 환경 가운데 종종 이방의 지역에 있거나 낯선 곳에 사는 것이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보게된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비록 자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었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지만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넬료가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불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넬료와 같이 전략적 요충지인 가이사랴에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나 백부장이 되기까지는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인간의 잔혹함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부정적 모습보다는 긍정적 모습을 기쁘게 여겨서 고넬료를 복음 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백 가지 의를 행하여도 한 가지 불의를 행하면 죄인이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아마 고넬료 옆에서 고넬료를 잘 아는 사람은 고넬료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문제 삼으시지 않으신다.

가장 부정적인 것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밖에 없지만 성도는 이러한 것에 묶이기보다는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할례받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할례받은 유대인 중심적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이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상식을 파괴하는 고넬료의 사건은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도 할례받은 유대 민족주의 중심의 메시아 사상에 깊이 빠져있는 유대적 시오니즘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아서 고넬료가 경험한 환상은 매우 구체적인 환상으로서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에 있는 천사가 이땅에 나타난 것이다.

이 땅은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천상의 영역과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다시 이 땅이 천상의 영역과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본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서 구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자는 그 능력에 맞게 사용하신다.

고넬료가 사회적 능력과 영향력이 없었다면 이와같이 사용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막연히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적대감은 옳지만은 않은 것이다.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베드로가 드리는 기도와 상황은 베드로의 상황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상황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이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간과 상황이 하나님 안에서 적절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상황 위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행동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든지 사단의 종이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베드로도 사도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살아가면서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방식에 대하여 몰랐듯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께서 종말을 어떠한 방식으로 마무리해 가실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의의 길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종노릇하면서 멸망의 길로 가게되어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과 행동 방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며,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드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지 몰랐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베드로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것과 같이 신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자신 가운데 이루고자하시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세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에게 속되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접아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배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라는 말씀이다.

네 발 가진 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기는 것으로는 뱀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봐도 잡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순한 거부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큰 보자기 안에 있는 짐승들은 모세 율법에 부정한 것들이었다.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에게 부정한 것에 대한 거부는 베드로가 아직 모세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대 민족은 거룩이라는 구별을 통해서 성별된 공동체였던 것이다.

부정한 동물을 잡아 먹으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모세 율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음식법을 넘어설 것에 대한 요구였다.

특히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던 베드로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베드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할 베드로가 넘어서야할 장벽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띤 모세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은혜 언약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되듯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듯이, 모세 율법과 복음은 배타적이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서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유대주의적인 사고를 복음 안에서 완성시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세상에 대하여 속되다고하는 배타성은 알 속에 머물기 원하는 정신이며,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비록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생명체는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는 죄성 가운데 한 가지는 스스로의 세계 안에 머물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소속된 가정과 집단과 민족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화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아가야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배타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야한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모세 율법의 틀 안에 머물고 있던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선포되어지는 틀을 수용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육적인 틀, 즉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민족적 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서야할 장벽들이다.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있던 막힌 담을 허무시는 것은 이제는 새언약의 시대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지못한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움직임은 베드로의 생각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던 것은(갈 2:12) 이방인이 깨끗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유대민족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모세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세워지는 과정에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배타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소유한 성별된 민족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은 전혀 화합될 수가 없는 두 진영이 동시에 움직이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

어느 한쪽만의 움직임으로는 쉽지 않지만 양쪽 모두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의한 과정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확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확신시켜주신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서는 인류 모두에게 향하여있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공격으로, 나라와 민족이 서로 분열되는역사 가운데 있다.

나라와 민족이 서로 화합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여도 이웃 민족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공동체의 회복은 외적인 국가간의 화합이 아니라 신자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공동체의 원형인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것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공동체적 회복을 통하여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시작된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일 수도 있겠지만 구원의 본질은 공동체성의 회복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 말미암은 관계성이 이 땅에서도 구현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공동체성을 구현한다는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없다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의 의미도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로 구현될 필요도 없다.

아간의 범죄나 다윗의 인구조사로 말미암은 공동체적 희생은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공동체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과제를 안겨 주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성령의 새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다.

 

속된 것과 깨끗한 것의 구분의 폐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경험한 베드로의 환상은, 홍수 전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노아 홍수 이후에 없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 입성때 구분되었던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폐지 되었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폐지됨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결과가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군인인 고넬료 이전에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받게한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은 사도들은 이를 확인하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게하였지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속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는 이방인을 만나는 일에 자유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환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로마 군인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의 초청에 응할 준비를 하게 하신다.

환상 가운데 깨끗하지 아니한 속된 것은 거룩하고 성결된 유대인들과 구분되는,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방인도 구원에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베드로에게는 아직 이방인이 깨끗하지 못한 속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구분은 이제 베드로만의 생각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대인들만 성별된 민족으로 여기시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신정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인들에 의한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신정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모세 율법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함으로서 부정한 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는 깨끗하지 않은 이방인과 구분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별된 거룩성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노아 방주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홍수 전에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여 방주에 들어가게하신다.

하지만 노아 홍수 이후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별이 없이 음식 섭취를 허용하신다.

이는 다시 모세 율법이 있기까지 허락된 것이다.

방주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폐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일반 은혜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창세기 3장 16-19절과 홍수 후의 노아 언약에서 약속하신 일반 은혜의 나라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까지 이 땅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말아야한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 가운데 임하였지만, 성도는 거룩하지 못한 이 땅을 살아가야한다.

이는 성령이 임하심을 경험하면서도 속된 것에 대한 배타심을 버려야하는 베드로와 같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배타심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속되고 교회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의 배타적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한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3. 19:21

사도행전 9장 32-43절 말씀 묵상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베드로는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이 복음화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로마카톨릭과 같이 이스라엘도 부패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아셨기에 초대 교회의 집단화를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은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성전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으며,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종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멸망당할 이스라엘이었지만 베드로의 전도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각지에 흩어졌을 때 교회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면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줄 수  있었다.

성령 사역은 단편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총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애니아에게 오랜 고통은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베드로가 내려간 룻다에 병든 자가 없었다면 베드로의 사역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풍병자의 고통 만큼이나 치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과 같이 중풍병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질병들이나 부정적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들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그만큼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면서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모든 부정적 상황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멸망시키는 수단이되며,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된다.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에게 임한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이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실 때에는  능력을 함께 주신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능력과 마찬가지의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영적인 치유 사역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사역으로 인하여 맺어진 열매들은 주님께로부터 온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상황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간청하였던 백부장을 연상시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과 유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베드로의 사역과 서신서들이 복음서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주는 것이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증풍병자뿐만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는 능력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산자를 치료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준다.

죽은 자를 살리는 현상적 이적은 죽은 영혼에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를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능력과 생명을 주시는 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실상과 허상)

에니아와 도르가에서 보여준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있었던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준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무리들이 육의 양식을 넘어서 영의 양식을 얻기를 원하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을 단지 굉장한 이적을 베풀었다는 이적의 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일 것이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은 베드로가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단지 육적인 생명을 살리는데 그쳤다면 어차피 죽을 인생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치유는 현대 의학으로도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가 있지만 베드로의 치유 사역과 현대 의학의 치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현대 의학에 의한 치료는 육적인 생명에 한한 것이다.

베드로의 치유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과 능력은 이 땅에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베드로가 행한 치유 사역은 이 땅에서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린 베드로의 이적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에 의한 새창조 사역으로서,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다는 새 창조의 유형을 보여준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능력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죽음의 허물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인하여 사울의 눈을 덮었던 비늘같은 허물이 벗겨진 것과 같이 죽음의 허물을 벗김으로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주어져야만 해결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죽는 것과, 사는 동안 온갖 죄악에 시달리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세계는 아담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진체 어둠의 세력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구속 사역은 인간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가리키는 모형이면서, 동시에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환상 가운데 거하는 비현실적 세계로 생각하지만, 인간이 눈으로보는 현실적 세계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인식의 한계 가운데 있으며, 궁극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위해서 이러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고계신다.

인간의 삶은 허무한테 굴복하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실상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육체가 갖는 의미는 영원한 것에 대한 씨앗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영원한 것을 싹트이기 위한 사역이다.

성령의 새창조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있다.

인간의 의료의 발달에 인한 치료는 영원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영원에 이르게하는 생명과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2. 18:07

사도행전 9장 19-31절 말씀 묵상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이 다메섹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울을 인도한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신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마 사울이 아나니아가 아니라 별로 여론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인도를 받았다면 사울도 다메섹에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이였기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다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일은 없어야겠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있다는 사실은 이들 교회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힘든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울은 자신이 이제껏 어떠한 일을 하고있었는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바울이 앞으로 감당할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울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더불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식의 변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말을 담대히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의 손에 죽으셔야만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사울이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어서 사울을 죽이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유대인들이나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며 왜곡시키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입장에 동참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것이며, 로마와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유대인들의 잘못되었던 행동방식을 고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행동방식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신 증거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려는 일을 하시고 나면 모든 나라가 그분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에 들어올 것이라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의 토대였던 전형적인 유대적 개념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215)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시려는 일을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의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 안에 귀속시키려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사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은 개인적 자격이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집단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이는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유대적 이스라엘과 바울이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대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도 행할 수 있는 수준의 역할이기에, 이는 궁극적으로 톰 라이트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말까지 나오게된 근원이 된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의 급격한 변화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모든 변화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사울과 같이 급작스러운 변화와 깨달음은 마치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서 모인 이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함과 같이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사울을 죽이기로 한 것은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 조직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울의 싸움은 개인이 조직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거대 조직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싸움인 것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해를 당할지라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이러한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너무도 많은 신앙조직들이 이 세상의 조직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사울의 고난은 예고된 것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사람은 이미 받은 고난으로 성장이 다 된 다음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어지는 가운데 고난을 감당해야한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임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고난을 잘 극복할 수 있게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쫓아가는 입장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이된 것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상황의 변화를 행동 방식의 한 가지로 보지만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려는 이들은 사울의 행동방식까지도 따라서 하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은 방법론적 접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세상과 충돌되는 현상을 보여준 것이다.

방법을 배우려거나 따라하려는 것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간 시기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삼년 만이었다.

사울은 분명 스데반 순교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신앙인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없이는 진정한 사역의 진보를 가지기 어렵다.

이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사울의 회심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사울 또한 적극적인 활동의 진전을 가지지 않았었지만 사울의 방문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 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은 생각이 있다고 바로 시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많은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참된 순종은 자기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함을 본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성도의 친밀한 교제는 꼭 필요하다.

자신에 대하여 분명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아무 이해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의 회복이기에 성도 간에 교제가 없이 혼자하는 신앙 생활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의 사역이 처음에는 상당히 더딘 진보를 보인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사울이 사역의 시작에 대한 공적인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위협으로 인해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돌아가 바나바가 다시 찾아 올 때까지 꽤 오랫동안이나 머문다.


다소는 나름대로 문명의 중심 가운데 있었기에 사울은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와서 자신의 변화된 관점에서 이전의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문명과 문화를 다시 한 번 변화된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의 기록은 주로 서신서에 나타난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서신이 복음서 안에 제대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보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신앙 생활의 정립을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오랜 삶의 환경 가운데 형성된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정립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도는 고난과 환란 가운데 더욱 장성해진다.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나약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축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하는 근거가된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핍박이 없는 환경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지 몇년도 안되어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한국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고난과 핍박이었다.


현재와 같이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상실되었기에, 교회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는 사도 시대와 같이 핍박과 평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1. 20:08

사도행전 9장 10-19절 말씀 묵상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 땅이 아직 천상의 영역과는 분리되었음을 말한다.

이 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구속이며, 궁극적인 우주적 구속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임할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선교적 교회론으로서의 우주적 교회는 현재의 이 땅에 대한 구속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택한 자들에 대한 제한을 넘어서 이 땅에 대한 현재적 구속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백성들에게 말씀 하실 때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는 자연적 방법으로 말씀 하셨을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마지막 심판 때의 구속 사건은 천상의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이 땅의 하위 구조lower-register가 만나 하나님과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인간이 거하는 땅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완전한 구속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땅의 구조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이며, 그가 말하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 유대적 하나님 나라로서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뜻을 지닌 같은 용어일 뿐이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나시는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자 행하는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직접 만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아시고 직접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머리로는 그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모든 이들로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를 택하시고 모든 거리의 명칭과 상황을 아시고 직접 지시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컴퓨터 기술을 통해서 놀라운 방법으로 정보를 얻어내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첨단 컴퓨터보다도 더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제한limit이라는 자체가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생각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아시고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 사울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셨듯이, 우리가 골방에서 조용히 속싹이는 기도까지도 정확하게 다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완전히 알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숨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침묵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고난 가운데 얼굴을 감추시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참된 안식은 우리의 문제를 다 덮으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의탁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하나님께서 직접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지만 성도들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길 원하신다.

에덴을 세우시고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서 아담으로하여금 에덴을 다스리게 하신 것은 아담을 통하여 에덴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를 부르신 것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제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사울을 준비시켜서 아나니아로 하여금 안수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대한 새창조로서, 실패하였던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여야한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왜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울을 택하셨을까?

유대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듯이, 민족주의자인 사울을 택하셔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항변도 할 수가 없었으며,  자신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자신감도 가질 수가 없다.

철저한 유대적 민족주의자였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신의 뿌리와 재능을 전부 박탈당한 것이다.

사용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쌓은 수고에 대한 보답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공로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공들인 것에 대하여 보상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아시기에 철저하게 무너진 사울을 선택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일꾼으로 삼으신 것이다.

종종 교회의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한 가지는, 오랫동안 교회에 공들이면서 교회의 장로가 된 이들 가운데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부축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들은 교회에서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울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도 자신이 어떠한 자였는지를 알고있었기에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도 이미 다메섹에는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있었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마 다메섹의 성도들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구원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대제사장 무리들과 사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기세등등하게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겠지만, 다메섹 성도들의 기도로 인하여, 긴장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간섭 하심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때 상황의 긴박성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준비해야한다.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모든 것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대제사장과 사울의 박해 만큼이나 북한과 미국의 긴장감 가운데, 다메섹의 성도들과 같이, 대한민국이 위기로 치닫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듯이,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 하심으로 북핵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성도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은 이미 창세 전에 준비되었던 것으로서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다.

분명히 잘못한 것은 현재인데, 잘못한 결과에 대한 징계는 이미 잘못을 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잘못한 이후에 알게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생각의 틀에 집어넣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박해하였던 사람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될지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도에게 현재는 단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일 뿐이며 앞으로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현재가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야 할 뿐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무조건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세상적인 축복의 개념을 성도들에게 적용시켜서 복음을 왜곡시키고있다.

성도가 누리는 축복과 평안은 세상적인 풍요와 만족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진정한 축복은 고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다.

고난이 없이는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사용받는 자는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깨끗함으로 준비되어야한다.

깨끗함은 우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가득했던 모세는 40년의 세월을 허무하게 보내었지만,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고난받는 시간은 가장 무익한 시간 같지만, 실상은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비실용적이고, 가장 손실이 있는 시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가장 유익하고 귀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유물론적 사고에 물들어 있어서 실용주의적 방식을 신앙에 적용시키기도한다.

성도는 삶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는 실패와 손실과 낙담과 좌절의 시간들을 절망적이고 손해본 시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위험한 상황은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 만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안수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것을 전달하고 위임하는 방법이다.

사도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할 때 사울이 사도도 아닌 단순한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사울의 성령 충만은 아나니아의 성령 충만함이 안수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성령은 아나니아의 소유가 아니기에 안수하는 이는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성도를 새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시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동시에 시작 되었다.

사울이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성령과 더불어 시작 되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서 이루어져야한다.

성령의 렌즈로 보는 세계는 인간의 관점에서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형성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성도로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 세계관들이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있다.

대표적인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버트 월터스Alv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는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담을 오실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설명하면서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하는 교회 개혁이 윤리적 교훈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변화될 수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텐리 그랜츠는 성령의 사역을 주로 회개할 수 있는 역할로 제한 시킨다.

회개는 성령을 받은 이들의 열매 가운데 한 가지 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지만 회개는 변화의 조건이 아니라 변화의 열매이다.

회개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 되었기에 회개하는 것이다.

새관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한 회개를 강조하지만 ,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열매일 뿐이다.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에 일어나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지 세례를 받았기에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음식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초자연적인 신앙생활도 자연적인 삶의 법칙 가운데 진행되어야한다.

금식도 금식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금식은 경건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이며, 진정한 금식은 인간적 혈기를 제어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0. 17:33

사도행전 9장 1-9절 말씀 묵상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정의에 사로잡혀있던 자이다.

정의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정죄하는 일에 앞장선 자였다.

홍길동, 스파이더맨, 황금박쥐와 같이 정의의 사자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었으며,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의 역할이 있었다.

이러한 이들로 말미암아 표면적인 정의는 실현되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복음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는 나서서 정리하는 이들이 있기에,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이들로 인하여 사회가 안정을 찾는 면도 있다.

이러한 정의는 민주사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공산권 국가인 예전의 중국의 영화들도 대부분 권선징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사회를 깨끗이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의 정죄는 사회를 표면적으로는 깨끗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정의를 외치면서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이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깨끗함을 위해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곤 한다.

이와달리 복음은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지도 않으며,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없다.

참된 복음의 진리를 아는 이들은 사회개혁이나 교회 개혁을 위해서 정죄를 일삼거나 마녀 사냥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를 하는 구약의 율법의 방식을 넘어선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일깨워준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보다는 사랑과 용서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상황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전한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상황 가운데 직접 간섭하시는 은혜를 구한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기를 간구한다.

준비되어지지 않은 본질적 죄인에게 아무리 정의를 외쳐받자 더욱 죄만 드러낼 뿐이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하기보다는 사도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전념한다.

어둠과 싸우기보다는 빛을 비추는 것이다.

사울의 잘못은 자신이 알고있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율법의 틀 안에서 정의의 사도와 같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섰던 것이다.

현재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이들도 사울과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는 입장에서 율법적인 방식으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설 뿐, 정작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의 빛을 비추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데 능숙할 뿐이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의 박해는 공적인 집행이었다.

이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서 유대적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였으며, 성직자들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왕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결산은 왕들과 성직자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관계성이었다.

사도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복음화되고 사마리아 성이 복음화되었다고하더라도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역사적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결산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서의  확장 개념으로 접근하지만 하나님과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분명한 결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성을 비롯한 이스라엘 곳곳에서의 개인적 복음화와는 달리 공동체로서의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신약의 교회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기에 톰 라이트의 주장과 같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역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있어야지만 획기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짓게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을 준비하게하셨으며,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구속자를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셨다.

이제 성령의 오순절 강림하심으로 새롭게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역사 가운데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강권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기세등등했던 사울에게 임한 하늘로부터의 빛은 이방인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 대한 부르심으로 인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 실행되었으며, 사울에게 비추인 하늘로부터의 빛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인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성도에 대한 박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이다.

성도를 대함은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회복되었기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의 자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모든 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변하고있기에 행동에 있어서 무척이나 조심하여야만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기에,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자신을 잘 가꾸어야한다.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청천벽력같은 말씀이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될 것이다.

인생이 가장 비참하게되는 순간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로 살았는데 자신이 틀렸다고, 더군다나 틀린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악인이었다고 판별될 때 이처럼 비참한 일이 없을 것이다?

사울의 행동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행동방식을 대변해준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타락한 아담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아담의 후손인 인류를 대변해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의 본능에 의한 정의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따라서 행동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러한 일들이 악으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문명의 발전과 의학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세계, 즉 하나님과  분리를 추구하는 악한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사울과 같이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악으로 결론 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가끔 희생 당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무죄한 이들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지만, 이 세상에 무죄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모두 다 사울과 같은 이들이며, 단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죄가 억제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은혜가 없이는 모든 인간의 삶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로 판가름 날 것이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 스스로의 변화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사울은 모든 이들로부터 스스로 독립적이었던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졸지에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서 배워야하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눈이 안보여 무장해제된 사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철저히 무너진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추행 혐의로 지탄을 받는 J목사는 예전에 항상 청년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하여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각 분야의 최고를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설령 최고의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자신의 교만을 완전히 꺽으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낮은 자를 사용하시어 높은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서 잘되었다고 하나님께 복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모세와같이 꺽이고 사울과 같이 눈이 안보이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축복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아부일 뿐이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같이 가던 사람들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에게나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않된 이들이 구체적인 상황에 개입이되면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말씀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준비가 도

어있었고, 또한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비가 되어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문을 연 이들에게 임할 때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도록 기도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모세는 왕족의 기운을 빼는데 4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사울은 그 혈기가 빠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짧은 시간 안에 변화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가 있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사울이 바울이 도

는 시간은 길지가 않았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오랜시간 공동체적 훈련 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는 결코 사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모든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9. 23:07

사도행전 8장 26~40절 말씀 묵상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의 행보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성령께서 이 땅에서의 새창조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디오피아 내시를 예루살렘에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박해 가운데 있었던 예루살렘보다는 광야에서 만나게하신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는 구별된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것을 연상케한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축복의 장소가 아니었으며, 바로의 박해 가운데 있었던 애굽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음을 보여준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무(ex nihilo)의 장소로서 성령의 창조 사역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을 떠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였다.

성령의 새창조에 의한 역사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면, 성령은 예루살렘을 축복의 장소로 남겨놓으셨을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사도행전의 역사가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복음 전파는 선교사가 직접 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까이 있는 그 지역 사람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시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각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여듯이 성령께서는 각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적절하게 환경을 이용하시기도 한다.

후에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했던 것도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로마를 통하고있었던 것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임한 복음을 통하여 상황이 획기적으로 급진전되고있음을 보여준다.

현 시대는 혈통에 의한 민족주의가 붕괴되고있는 시대이다.

글로벌 경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의 교류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교류는 복음 전파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문화 가정들을 통하여 이슬람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한다.

유럽에 밀려온 난민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위협을 받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무슬림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세계 각국이 민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서로 교류하는 것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결산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를 넘어서 에디오피아로까지 전파된 복음이 이제는 소수 부족을 제외하고는 저의 전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성전으로 인하여 자신의 세계 안에만 머물렀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람을 장소에 제한시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됨으로서 성도는 각 족속과 불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조그마한 행동과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계신다.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 것을 아셨지만,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게끔 마음의 동기를 부여하시기도 하신다.

성령께서는 에디오피아에서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자를 사용하셔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빌립과 내시의 관계처럼 성령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여 가신다.

성도의 교제는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서로에게 나누어야한다.

성도가 그냥 만나서 세상 이야기나 하는 교제는 별로 의미가 없으며 공기만 진동시킬 뿐이다.

성도가 세상이야기를 하더라도 세상 이야기는 말씀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선지자는 사도 시대에도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받아서 전하였다.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도 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이 갖추어진 지금은 성령께서 직접말씀하시는 경우가 드물다.

성령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고하는이들은 대부분 이단들이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사도행전이 성령의 창조 사역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 사역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빌립과 같은 집사에게도 직접 관여하신 것을 볼 수 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내시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관심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내시가 관심을 갖는 것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된다.

현대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관심을 빼앗아 감으로서, 인간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성에 더욱 가둬놓는다.

스마트폰이 제공해주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게한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보기에는 발전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을 고착화시키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요즘 젊은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일단 관심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출석교인 수의 급속한 감소의 한 가지 원인은 현대 문명이 제공해 주는 인간의 편리함이 교회와 진리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죄성을 활성화시키면서 심판의 시기만 앞당길 뿐이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가르침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로 귀결되어야한다.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인한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조차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설교가 교훈이나 윤리 도덕으로 바뀌고있다.

교회가 생명력이 상실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짧은 시간에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세례는 성령의 역사가 앞선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먼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먼저 있었기에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모든 은혜의 과정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내시의 행위와 같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오늘날 집사가 세례를 베푼다면 많은 비난에 직면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자 구제하는 일등을 위하여 집사를 세웠는데 실제 빌립 집사의 사역은 사도들의 사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즘의 교회 직책을 사도시대에서 인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예를 오늘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집사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교회의 질서를 위한 직분이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역자는 자신의 성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 만들어야한다.

성도들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을 외인처럼 대하는 분위기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신천지같은 이단을 경개해야겠지만, 자기 교회 바깥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단절하는 교회당 중심의 신앙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인도받았다는 간증에 대하여)

빌립과 내시의 움직임에는 성령의 강력한 간섭하심이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결론적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

성도는 상황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인지 사단의 간섭함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불신자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간증을 하기도한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말 가운데 “귀신같이 안다"라는 말이있다.

일이 너무나도 잘풀리고 마음을 다 빼았겨서 “이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해주실려고 인도하는 거다”고 간증을 하며 기쁨 마음과 더불어 모든 마음이 빼앗겨서 올인을 하기도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경우가 있다.

축복에 대한 간증도 넘쳐나지만 대부분이 세상적인 관점이고 이를 성령의 인도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행동하게되어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곤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 의지라고하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고있다.

이는 인간에게는 사단에게서 자유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행동에 앞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고서 초자연적인 역사에 놀라곤 하지만 성도는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해야만 한다.

강남에 값비싼 예배당을 지어놓고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면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지를 보게된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빌립 집사의 사역에 대해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신약의 교회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연속선 상에서 확장된 것이라는 새관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가 연속선상에 있느냐, 혹은 불연속선상에 있느냐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점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모세 언약의 속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에서 보는 모세 언약의 속성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과 본질적인 은혜 언약이 모두 다 내포되어있다고 본다.

행위 언약만을 놓고보면 유대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완전한 불연속선 상에 있지만 은혜 언약의 속성에서보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이라고 하더라도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참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행위 언약이 배제된 은혜 언약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게 된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혹은 언약적 신율주의, 신율주의)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만 보기에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한 선상에서 보고있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듯이, 언약적 율법주의에서보는 신약의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이야기의 목적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한 이사야서 해석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유대인들의 무리에 참여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인본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철저하게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한 신학으로서,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 맞춘 작업의 결과물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8. 21:45

사도행전 8장 14~25절 말씀 묵상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하나님의 도성으로서의 성전의 확장)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빋았다는 의미를  처음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사역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과의 비교를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새예루살렘으로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거할 종말론적인 장소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져던 에덴에서의 목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안식이 예정되어있었다.

하늘의 도성으로서의 하늘의 예루살렘은 에덴에서 예정되었던 종말론적인 안식의 장소와 일치된다.

이 땅에서의 예루살렘은 최종적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모형이다.

이 땅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하나님의 도성이다.

처음 에덴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성전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직책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왕으로서의 역할이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3중직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즉 통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에덴 바깥의 모든 피조세계에 충만케 하는 것으로서, 장차 그리스도가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에덴에서 주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선악과 범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포를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번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이 실패한 사역을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완성 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성전이 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새예루살렘을 이 땅에서 시작하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셔서 성도들과 연합된 한 몸으로 세우시는 하늘의 도성의 모형이다.

사도들이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지켰던 것은 지상에서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완성될 도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성에 세례받는 자들이 더하여 지는 것은, 처음 아담이 순종을 통하여 확장 시켜나아가야 했던 영역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며,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을 대체하는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28:19-20)으로 이 땅에서 실행되고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내려간 것은, 성전의 확장을 의미하며, 이는 에덴에서 실패하였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에덴 바깥이 에덴의 확장이되어야 했듯이 사마리아 성에서의 복음화는 새예루살렘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손수 성전이 되셨기에 더 이상 이 땅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또한 영적인 새예루살렘의 실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유형적인 성전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이는 후에 로마 군인에 의하여 황폐하게된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에덴의 확장은 성령의 창조 사역에 의한 것이다.

태초에 혼돈 위에 운행하셨던 성령의 창조 사역은 노아 홍수를 말리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으며, 이제 새예루살렘의 확장에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창조 사역을 직접 수행하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게 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성령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역만이 하나님 나라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행할 수 있어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없다.

요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개혁을 실행하는 이들이 있지만, 운동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주체가 되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운동으로 확장될 수는 없다.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물 세례는 인간의 의지로부터 출발되어 행하여지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는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외적인 제도하에 있는 교회에서 성령 세례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가 없다.

제도적 교회는 외적인 세례, 즉 물 세례만으로 교회를 구성해야하는 한계가 있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 세례를 받은 이들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제도적 교회가 우선시되는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경우지만, 로마카톨릭과 같은 권위 조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취약점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간의 욕심으로만 확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은 창조주이시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과 같이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서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열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이 만남으로서 이루어지는 나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연합과 성령의 창조 사역을 통한 새창조로 이루어진다.

유대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의 거룩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새 창조에 의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는 형성될 수 없는 나라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오순절 성령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창조 사역의 주체이시며 성령께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다.

아담에 의하여 일그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회복이 되었으며, 성도 가운데 역사하심으로서 성도로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성령이 이를 보증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다.

사마리아 성에 임하신 성령은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신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선물은 공로를 기초로하지 않는다.

새언약을 통하여 임하신 성령은 오직 은혜를 근거로 선물을 주신다.

복음에 공로의 개념이 추가된다면 이는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일 것이다.

한 때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였던 김세윤 교수는 최근에 자신의 강의록을 정리한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새관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칭의 개념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시켰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유대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라는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신율주의 개념을 주장함으로서 칭의에 공로적 개념을 추가하였다.

김세윤 교수도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 수용함으로서 성도의 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신 공로적 의" 대신에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한 개념을 수용한다.

이는 성도의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에서 성부 하나님으로 옮긴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주장과 동일한 것이며, 새관점과 동일하게 최종적 칭의의 근거를 인간의 행위에 두고 있다.

새관점은 자신들이 은혜를 근거로한 신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는 공로주의적 신학이다.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 즉 종말론적 안식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되는 안식론적 구원을 행위라는 공로로 취하려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시몬이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사함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구원에의 참여는 최종적으로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이를 결정할만한 권한과 능력이 없다.

오직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하더라도 그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는 것은 일단 신앙의 영역에 들어왔다고하더라도 자기 욕심에 끌려서 행동하는 잘못을 보이고 있다.

자기 욕심이 믿음을 넘어설 때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주게된다.

더군다나 목회자가 성도들의 욕심을 부추기면서 열심을 유도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쓰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가 직업을 목적으로 신학을 하고서 교회를 자신의 성공의 수단과 발판으로 삼을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러한 경우가 너무 많다.

이들에게 성도는 유물론적 가치에 의하여 평가되는 존재일 뿐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기도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해야한다.

기도는 사람의 필요에 의한 것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필요한 것을 채움받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다.

시몬은 자신이 기도를 해야 할 상황이고, 베드로가 시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였는데도, 대신 기도할 것을 부탁한다.

요즘도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매우 일반화되어있지만, 이러한 기도의 요청에 의한 응답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도는 기도 요청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25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7. 22:29

사도행전 8장 4~13절 말씀 묵상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루살렘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사역자가 되었다.

이들이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이들은 아마 예루살렘에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서 선교 사역은 이차적인 소명으로만 감당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적극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지 않으리란 것을 아셨기에 필요한 환란을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의 역사가 있었다.

100여년 전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화된 조선은 일제의 압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국으로 흩어져야만 했다.

특히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이주정책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이 들고간 복음은 중앙아시아의 복음화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 선교사들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

환란 가운데 있던 이들은 본의 아니게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종의 선교적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오늘날 말하는 선교적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와는 구별되어야한다.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는 교회 자체가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며,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교회 자체가 파송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하는 선교적교회missional church의 근거는 칼 바르트가 생각해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근거로하고있으며 만인구원론적 성향을 지닌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선교적 교회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며,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 교회를 세상에 보낸다는 개념의 보냄받은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의 최종 목적지는 세상인 셈이다.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로서의 전통적 교회의 최종 정착지는 교회로서 세상 사람을 전도하여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의 최종 종착지는 세상이기에 만인구원론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선교적 교회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의 우주적 구원을 위한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신학을 지향함으로서 불신자들과의 구분이 없는 일상에서의 예배를 지향하고있다.

이는 박해받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전하였던 것과는 다르다.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마리아에는 박해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가고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고 말씀하신대로 빌립은 이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빌립은 하나님을 전한것이아니라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하나님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의 차이는 그리스도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현대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며, 그리스도를 전하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과 믿음을 통한 죄사함에 대해서는 인색한 자세를 취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은 구시대적인 사람인 것과 같이 취급한다.

하지만 초기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구시대적인 사람들이었다는데서 위로를 받는다.

사마리아는 영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곳임을 생각해 볼 때 빌립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풍요를 이들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예루살렘에서의 대제사장 무리들이 스데반 집사를 박해하였던 것괴는 대조적으로 마음이 가난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 집사를 따를 수 있었다.

외적인 풍요를 누리던 대제사장 무리들과는 달리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이 오히려 영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더러운 귀신과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마리아성이 그만큼 영적으로 황폐해있었다는 것이다.

육적인 질병은 영적인 질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난 육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의 그림자이다.

현대 사회는 의학의 발달 이상으로 질병이 급증하고있다.

특히 성인병과 암의 증가는 그 특성상 영적인 질병과 많은 관계가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법을 떠난 생활을 하는 만큼 영적인 황폐함과 더불어 육적인 질병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질병의 치료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어져왔는지를 보는데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자연법에서의 이탈이 심각한 이유는, 자연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로 인도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일반 은혜를 무시하고는 특별 은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상식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특별 은혜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기에 자연법은 존중되어야한다.


사회법을 어기면서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우기는 목사를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교회가 얼마나 상식이 안통하는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본다.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쁨은 그들의 영적인 치유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사마리아 성의 슬픔은 이들이 영적으로 어디에도 속해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척되었지만 이들에게 전하여진 복음은 말 그대로 구원의 복된 소식이었다.

이들이 누렸던 기쁨은 육적인 충적을 넘어서 영적인 풍요로 인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발달하고 모든 곳에 복음이 전파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고갈을 느끼는 것은 교회는 많지만 참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별로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진정한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관련된 것이어야한다.

설교의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예화나 교훈, 도덕적인 문제로 비껴가면서 신학이 없는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교회 생활이 영적인 풍요를 경험하기보다는 여러가지 중요하지 않은 외적 조직에 성도를 묶어놓음으로서, 진정으로 자유케하는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 현실이다.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거짓 능력은 자기를 높인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능력은 능력을 행하는 자로하여금 철저하게 겸손하게 만든다.

바울은 많은 능력을 행하고도 자신이 교만하게 될까봐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감사한다.

간증을 하는 이들은 특히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암묵적으로 자랑하면서 교만해 지기도 한다.

페북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부족함과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의 자랑이나 자신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을을 주로 전함으로서 스스로 교만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랑은 자신을 높이는 결과를 낳기에 이는 페북스타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하나님의 사람이나 사단에게 속하여있는 사람이나 능력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높임으로 연결되게 되어있다.

사도들은 전도의 과정 가운데 높임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를 하였다.

하지만 시몬이라하는 사람은 오히려 높임을 받기를 즐겼다.

이적은 천상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것으로서 천상의 영역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단은 높아지기를 원하기에 이적을 통하여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그 이적이 사단으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간증을 통하여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있다.

성도는 이적과 간증을 통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마술은 기쁨이 아니라 놀라움을 준다.

하나님께 속한 이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준다.

신사도 운동에서의 이적은 놀라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귀신들린 것과 같은 추함을 드러내주기에 하나님께 속한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례를 통하여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에는 운동이라는 용어를 붙일 수는 없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는 관련이 없는 유대주의적 도덕 운동이다.

세례는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선포이며,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기네 그들이 말하는 세례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겠다는 단순한 마음 가짐 이상도 아니다.


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구원에 참여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빌립의 표적과 능력에 놀라기보다는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면서 기뻐하였지만, 시몬은 주로 능력의 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도 그 능력을 따라하고 싶었다.

교회도 외적으로 확장되면 욕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하며,어떤 이들은 자신이 큰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자신과 교회의 크기를 연계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이는 시몬과 같이 외적인 능력을 보고 따르는 이들일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