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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시편 93편 말씀 묵상
시편 93편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2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3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4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5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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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치하시는 권위)
다윗은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우주적 왕이시다.
다윗은 피조계의 안정이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확립된다고 말한다.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한 간섭하심에 기인하기에, 다윗은 이로 인해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어버려두신다면 이 세상은 불안정해지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 혼란 가운데 들어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 인한 다스림을 받기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고 찬양과 감사들 드려야함이 마땅하다.
다스릴 수 없는 권위는 이미 권위가 아니다.
권위는 다스림, 즉 통치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윗은 이 세계의 안정이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땅에서의 최초의 다스림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진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다스림을 위해서 이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왕을 허락하셨지만, 동시에 인간의 부패에 대하여 염려하셨고, 경고도하셨다.
하나님의 염려와 경고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가 말해주고있다.
왕들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된 옷을 입었다.
옷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옷의 모양에 걸맞는 능력과 권한을 부여한다.
왕에게 부여된 권위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다.
권위가 상실되면 안식도 상실된다.
권위는 잘못 사용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권위자가 아닌 이들이 권위자의 옷을 입는 경우도 문제가 된다.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걸치는 가운도 권위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만, 이는 목회자를 타락시키며 우상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구별된 제사장이 있었던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의 만인제사장의 개념에서 본다면, 강대상에서 목회자가 입는 가운의 성격은 성경적으로 규명되어야 될 것이다.
(2, 영원부터 계신 보좌)
주의 보좌는 다윗의 왕권과 직결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귀결된다.
다윗은 자신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계신 분이었음을 찬양하며, 이스라엘의 왕권이 지속되기를 원한다.
이 세상은 원래 왕권에 의하여 통치 되는 곳이지만, 사람들은 왕들의 부패로 인하여 왕권을 거부하게 되었다.
다윗은 주변 이방인들의 위협을 목도하였으며, 이 땅에서 불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서의 왕권의 안정을 하나님의 보좌와 연계시킨다.
다윗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3, 다윗을 위협하는 세력들)
큰 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다윗은 사는 동안 항상 전사로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고 띠를 띠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다윗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싸움 한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을 위협했던 세력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이었다.
신자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 세상의 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여야하기에, 다윗의 고백과 찬양이 신자의 고백과 찬양이 되어야 한다.
북한 핵문제와 미국의 전쟁 위협이라는 큰 물결 안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축복을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악을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악을 일으키실 때에는 우리에게 그만큼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색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도움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악보다도 크신 하나님)
두려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두려움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다.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공포가 사라지는 때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경우 뿐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 안에 귀속 시킴으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의 위협으로 인해서 도망을 다니기도했다.
두려움은 다윗에게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였지만, 다윗은 삶의 모든 두려움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안에 귀속 시킨다.
이 세상의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의 권세 안에서는 위협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위협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 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 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악이 도전해 올 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하였는데도 이 세상에서 악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심이 아니고, 신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간섭 하심이며,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5, 증거를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지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 하심과 섭리는 일반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구체화 시키심으로서 특별 은총을 위한 확실한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다윗의 경험은 하나님의 구체화된 증거들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자손으로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확증된다.
다윗은 자신의 삶이 주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경험이었으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대한 소망이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게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에도,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속 언약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신자에게 많은 증거들을 보여주신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가 경험하는 증거들은 하나님의 구속하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증거들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묵상, 실종된 권위)
다윗이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참된 안식은 참된 권위자의 보호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자녀가 부모 아래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누릴 참된 안식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었기에, 참된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에서 안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참된 권위자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안식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특징은 권위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권위와 권력과 전통의 상실이다.
이 땅에서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종종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권위와 안식을 설명해준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는 민주주의보다는 왕국kingdom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땅에서 왕국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왕권의 오용과 부작용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만 보더라도 이 땅에서는 왕이라는 개념이 적합하지 않아보인다.
결국 인간의 죄성과 부패로 말미암아 왕의 통치가 오용됨으로서, 사회 제도가 바뀌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 할 모형과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왕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던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은 사람들이 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후로 발전된 민주주의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다.
인본주의 신학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급속히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카이퍼는 이에 맞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에 실현시키고자 반혁명당을 중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위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지금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시대라고 생각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자유 의지를 상실한 사단의 좀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동안 나름대로 한국교회의 성장에는 목회자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으며, 목화자라는 이름은 존경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한국 교회가 몰락한 원인 한 가운데 목회자들의 부패와 몰상식이 자리잡고 있다.
다윗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다운 평안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왕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 문명은 많이 발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권위가 사라짐으로 인한 안식의 실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문명이 퇴보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참된 안식을 누렸듯이, 신자는 참된 권세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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