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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017. 12. 29. 14:06

시편 95편 말씀 묵상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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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양 받으실 구원의 반석)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다윗은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구원에 대하여 갈망을 하였다.


다윗의 구원에 대한 갈망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절망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만약 이 시대에 다윗 같은 사람이 애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하여 갈급해 한다면, 사람들은 속된말로 “배불러서 고민할게 없어서 그런 고민하냐”고 핀잔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위대함은 인간이 진정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남달리 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구원에 대한 갈급함을 어느 누구보다도 애절하게 간구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이스라엘 역사가 죄에 대하여 증거를 해준 것에 근거를 두고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 하셨던 것은 그의 죄에 대한 인식과, 구원에 대한 갈급함과, 이로인한 애절한 기도였다.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다윗의 애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응답이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삶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도,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라고 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다윗는 왕의 체면을 무릅쓰고 언약궤가 돌아오는 날 미갈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다.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체면을 넘어서, 신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3, 크신 하나님을 찬양)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


다윗은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해야한다.


물론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종속시키고 죄에 얽매이게하는 우상들에 대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죄에 종노릇하였던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우상과 이들 기반으로한 악한 자들에 대한 승리로 인하여 즐거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윗은 전사로서 항상 싸움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다.


다윗은 영적인 싸움에서 수 많은 패배의 쓴 맛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표면적인 육적인 싸움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영적인 패배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게하는 통로가 되었다.


다윗의 즐거운 찬양은 궁극적으로 싸움에서의 승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었다.


신자들의 삶도, 다윗과 같이, 끝없는 실패와 좌절과 패배를 맛보는 삶이지만, 이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준다.


신자가, 다윗과 같이, 고통 가운데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 구원의 절박함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찬양 할 수 있는 즐거움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다.



(4-5, 창조주이신 전능자)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부요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부요는 신자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위해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운영된다.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실 수 있으시다.


하지만 우상 숭배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고서 이를 누리는 부요한 삶을 살아야한다.


이러한 풍요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 필요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물질적 공급보다는 우리의 성숙에 필요한 고난을 먼저 허락 하실 수도 있다.


물질적 풍요는 자칫 우리의 육적인 죄성의 촉매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의 찬양은 왕으로서의 육적인 축복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패배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6-7, 목자의 음성에 즉각 반응해야 할 양)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다윗은 우리의 존재의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양이다.


양은 바로 앞만 보고 움직일 수 밖에 없기에 목자의 인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죽음과 직결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목자의 도움을 받아야만하는 양같은 존재이기에, 잘못된 목자를 선택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양은 목자가 부를 때에 응답하고 따라가야 한다.


바로 응답하지 않고 생각을 해 보고 늦게 따라가기로 결정한다면 이미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믿어도 되지 않느냐도 말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놓친다면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8, 마음이 완악한 이들)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인생은 광야에서의 삶과 같다.


언제나 오늘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언제나 마음 문을 열고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광야의 삶이다.


성공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자녀교육에는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다.


한국 사람들의 지나친 교육열은 하나님께 대한 완악한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적  자아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들도 광야에서 멸망한 이들과 같이 완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9,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시험하고 조사하는 것은 어찌보면 과학적으로 옳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할 만큼 충분히 경험하고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험하고 조사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 거부하는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학문은 과학적이어야하며, 검증되어야만 한다.


특히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접근은, 믿음보다는 이성과 논리에 의한 과학적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만약에 하나님과 말씀을 검증해봐서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믿는다면, 이는 더 이상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라고 기록한다.


믿음은 보이는 현상 안에 감추인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어야한다.


성경의 증거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보이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성경의 증거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한다.


(10, 미혹된 마음)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미혹되었다는 것은,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마음의 결과물일 뿐이다.


마음이 잘못된 상태에서 아무리 옳은 길을 인도한다고 할지라도 잠시 후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뿐이다.


마치 잘못된 OS가 잘못된  연산을 하는 것과 같다.


미혹된 백성들은 40년 동안 길을 잃고서 방황하고 떠돌고 잘못 길을 가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잘못된 길을 가면서 방황하고 떠도는 인생들에게 참된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된 길임을 알고서 오늘 그의 말씀을 들을 때 더 이상 방황하거나 떠돌지 말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옳바른 길을 가라고 말한다.


짧은 인생 방황하면서 오래살다가 멸망하는 것보다는 짧게 살더라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제대로 된 길을 걸어 갈 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잘못된 상태 그대로 예수의 길을 걷는다면 문제만 일으킬 뿐이고, 교회로 하여금 욕을 먹게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가려면 거듭난 마음, 즉 잘못된 마음에서 벗어나서 주인되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한다.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하고 고백을 하면서 자고하지 않으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의 가시”를 받아들였다.


인생은 죄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잘못된 연산을 하는 마음의 OS로 인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하여야만 한다.


(11,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이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은 광야에서 증명되었고, 또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안식은 오직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회개와 구원의 반석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묵상)


현대인은 인터넷의 지식을 쫓아가는 목자를 잃은 광야를 방황하는 인생들이다.


현대인들은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만, 오래 살아도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삶이 된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생명이 되고 길이 된다.


과학의 발전은 결코 인간에게 길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 생명을 제시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과학문명의 발전에 온 힘을 다 쏟아부우며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참된 안식은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탄식이 전제되어야하지만 현대 과학은 죄에 대한 개념을 수용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은 오직 광야와 가나안에서 증명된 죄에 대한 인식과 탄식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멀리왔다.


현대의 문명에 익숙한 우리들은 죄의 문제와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이스라엘이 교사로서 그리스도께 죄인을 인도하였듯이,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안식이 있을 수가 없다.


신자의 삶은, 다윗과 같이, 죄에 대한 통회하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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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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