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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5 :: 신명기 20장 1-20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장 1-20절 말씀 묵상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를 넘어선다.
크고 대단하고 강하고….등등을 추구하는 세상의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하나님과의 대립 관계 가운데 추구함으로서 나오는 결과물들이다.
하나님께서 크고 강한 자를 사용하신다면, 쓰임받은 사람은 자신이 잘나서 쓰임받은 것으로 착각한다.
인간은 가장 약할 때 하나님의 쓰임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시어 영광을 취하신다.
하나님께 사용받기 위해서 크게되고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욕심을 위한 것이다.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군대 장관이 아니고 제사장이 고하는 것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전투는 인간적인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의 확장이다.
이는, 비록 타락 후의 경우지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재연됨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가나안에서의 정복 전쟁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승리로 마침이 되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심으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성도가 세상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의 확장이 아니라 구속 영역의 확장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치 영역이 모두 구속 영역은 아니다.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은, 대위임령을 수행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전쟁과, 성도가 세상에 대한 싸움의 차이는 통치 영역과 구속 영역의 차이에 있다.
가나안 땅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졌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을 누리지 못함으로서, 땅은 구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성은 구속은 커녕, 통치의 영역 안에도 있기를 거부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진 가나안에서 안식을 성취하지 못함으로서, 안식의 성취라는 과제를 남겨주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실 종말론적인 안식의 땅에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관점의 주장과는 달리,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받은 백성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만이 참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구속받은 백성이다.
성도가 주일로부터 시작되는 한주를 살아가는 것은, 아담에게 안식의 조건으로 주어졌던 통치 명령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과 같이, 통치 명령을 문화 명령으로 해석하고서 이를 다시 수행하려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안식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싸움에 임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권고는 믿음을 요구하는 권고이다.
싸움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싸움에 참여하지만, 승리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도의 일상에서의 성취물들은 인간의 공로물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운명론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도 인간에게는 책임이 주어진다.
일종의 순종을 요구하는 책임이다.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무책임한 운명론적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최선의 순종과 최선을 다하는 행위는, 또 다른 형태의 믿음의 고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믿음은 행위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가 아니듯이, 신자의 행위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하는 믿음의 고백이기에 공로적 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
구원을 위한 믿음과 행위에 대한 논쟁이 끝이 없는 이유는, 행위를 공로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행위에 공로의 개념이 적용된다면, 행위는 구원과 연계되어서는 않된다.
하지만 공로의 개념이 아닌,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행위는 구원에 있어서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행위가 되어야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힌 자이기에, 행함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공로를 쌓는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
또 다른 행위구원론의 형태로 부각되는 “오직 충성에 의한 구원Saved by Allegiance Alone”을 주장하는 메튜베이츠Matthew Bates가 말하는 행위는,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행위구원론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5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가나안 정복 전쟁은 믿음의 행위이다.
책임자들이 집에 돌아갈 자에 대하여 명령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형제들을 낙심시킬 것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근원에는 인간적인 염려가 믿음의 행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에는 자신에 대한 희생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성도의 행위가 믿음의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옛 사람이 자신의 주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육적인 소욕은 육신을 입고있는 동안에는 필요하지만, 희생을 결단해야 할 때가 있다.
가나안 전쟁은 인간의 욕심을 쟁취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행위이기에, 손해 볼 것에 대한 염려를 버려야한다.
성도의 믿음의 행위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야하며,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야하는 것과 같다.
가나안 전쟁이 힘의 전쟁이 아니듯, 성도의 믿음의 행위는 자존감이나 이익의 싸움이 아니다.
9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친 후에 군대의 지휘관들을 세워 무리를 거느리게 할지니라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이들을 구태여 진멸할 필요가 없다.
먼저 화평을 선언하는 것은, 먼저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기에,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전적인 상대방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화평을 선언하지만, 화평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세상에는 중립이 없다고도하지만, 일반 은혜의 영역이라는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이들을 적대시 하여서는 안된다.
귀신론에 집중되어있던 베레아아카데미는 세상의 모든 영역을 귀신의 영역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일반 은혜 가운데 성도들과 협력을 해야하는 영역들이 있다.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데이비드 반드루넨은 이러한 관점을 “하나님의 두 나라”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있지만,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일반 은혜 아래에서 자연법의 적용을 받는 모든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다.
이러한 영역에 대해서까지 성도는 불필요하게 영적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다.
교회를 거부하고, 복음에 대항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기에, 성도는 이미 승리한 전쟁을 이들에게 선포하여야한다.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화평이나 전쟁 모두 다 통치를 위한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의 유형적 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성도의 세상에서의 삶은 아담이나 가나안에서와는 다른 것이 되어야한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통치 명령을 근거로, 성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야한다.
성도가 세상의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의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이원론적 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 일원화시키는 것이다.
이원론적 접근방식에서는, 성도가 마귀와의 싸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려는, 흔히들 말하는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싸움을 통해서 통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있다.
성도는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서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로 변화를 시켜야한다.
하지만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신칼빈주의,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된 신정통주의,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히나님의 단일한 구속 영역으로 봄으로서 우주적 교회를 추구한다.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이스라엘에 대한 대적은 곧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셨기에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듯이 진멸되어야만 한다.
남자는 여자와 아이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있다.
남자만 제거된다면, 여자와 아이의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에게 넘어온다.
멀리 떠나있는 성읍은 통치의 개념만이 적용된다.
이스라엘의 변방에 있는 이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라고 볼 수 없다.
통치 영역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행사하면된다.
화평을 통한 지배는 조공을 받음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
하지만 구속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안식이 제공되는 구속의 영역을 예표하는 곳이다.
구속 영역에서는 남아있는 여자와 유아들이 이스라엘의 영역에 포함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속 영역은 배타적 영역으로서, 이방인들과 합류될 수 없는 영역이다.
전통적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배타성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 형태인 선교적 교회는, 배타성을 제거하고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일상에서의 예배를 추구한다.
1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가나안 족속을 진명하는 것은 일종의 에덴에서의 상황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성격을 가지고있으면서 동시에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헤렘 전쟁을 성격을 지니고있다.
가나안의 정복은 에덴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에덴에서의 실패를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는지를 검증해보기 위함이었다.
에덴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었으며 사단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전하면서 공격을 시도하는 장소였다.
아담은 에덴에서 뱀을 쫓아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게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출애굽을 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가나안을 허락받았다.
이미 가나안에서 살고있었던 족속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었기에 가나안에서 이들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은 마치 에덴에서 뱀을 존재를 허락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가나안 지역에 있던 족속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에 대한 배타성을 지니고있다.
가나안 지역의 호흡이 있는 자들은 다 하나같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이들이었기에 가나안 땅에 있는 이와같은 족속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와 공존할 수가 없다.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진멸, 즉 헤렘 전쟁은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이 마땅히 하였어야할 전쟁이었으며, 동시에 마지막 심판 때에 유기될 존재를 예표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찰 때 애굽의 이스라엘을 불러서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심판은 이들의 죄악이 보편적으로 가득할 때 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은 세상의 죄악이 가득할 때에 임할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이 땅에 임할 최후의 심판과 이 땅에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예표하고있다.
아브라함이 멸망받을 아모리 족속 한 가운데서 생활하였던 것과 같이, 이 땅이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되기까지 이 땅에 거하는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악한 자와 공존은 마치 세균이 묻어있는 주사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면역력이 한계가 있듯이 오염된 것은 건강한 매체를 감염시켜서 죽음에 이르게한다.
비록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민족도 가나안의 족속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지만, 가나안 족속들은 외적인 타락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내면의 죄성이 가장 활성화되어있는 상태였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은 외적으로 깨끗하였을지라도, 전염으로 인한 부패의 가능성이 충분한 이들이었기에,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들을 멸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없이 성경을 보는 이들은 종종 기독교를 잔인한 종교로, 혹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묘사하는 잘못을 범하기도한다.
19 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과실을 맺는 수목 자체에는 악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환경이다.
다만 악한 인간이 이를 악용할 뿐이다.
20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수목은 전쟁도구가 될 수 있듯이 자연을 이용하는 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다만 전쟁의 도구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결코 전쟁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전쟁의 방법을, 각 나라가 전쟁을 위해서 첨단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것에까지 적용해서는 안된다.
신약 시대의 인간의 전쟁은 단지 욕심으로 시작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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