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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7. 00:55

신명기 21장 1-23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무조건적인 용서는 성경적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공의라고 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라고 말씀하신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 대한 살인이기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이다.

땅에 흘려진 피는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을 하나님에 대한 살인으로 더럽히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는데 합당한 행동을 하여야한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주검을 만들어서 땅을 더럽히는 행위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행위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영원한 가나안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주검이 없는 거룩한 곳이다.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공동체에서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이 주어진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나 도움을 받아야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자에게 일차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삶 가운데 함께 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어려움이 생긴다면,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하는 것이 성경적 공동체의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은 가까이 있는 자들이 문제를 함께 공유함으로서 공동체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는 아직은 거룩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재물이 될 수 있다.

부림을 당하고 멍에를 맨 송아지는 이미 죄의 영역에 들어가있기에 속죄물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인자이시면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속죄물로 드려질 수 있었다.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도 흘려야하기에, 오직 깨끗한 곳에 흘려진 피로서만 정결케하는 효력이 있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창조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곳이다.

생명의 원천에 있으면서 아직 죄로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만 깨끗케하는 속죄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피흘림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셨다.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레위 자손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일정 권한을 위임한 자이기에 행함에 권위와 효력이 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가졌던 권한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상실된 직책이었다.

송아지의 목을 꺽음으로서 피살된 시체로 더러워진 땅에 대한 청결의식에 대한 공적인 판결이 레위 자손 제사장들에 의해서 판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암송아지는 피살의 죄를 감당함으로서 가까운 성읍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안수는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택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됨으로서 택한 자의 죄가 다 없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지만, 모든 인간의 죄가 다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은 아니다.

오직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장로들의 안수로 피살체에서 가까운 성읍이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정죄에서 자유케되었듯이, 성도는 믿음의 고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공의에서 자유케된 것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주의 속량하신 백성이 거룩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사람이나 짐승의 첫 태생을 죽이고서 속량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었다.

이러한 속량을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근원적 죄에 대하여까지 속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속량하신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되었던 상태에서의 해방이었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속량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듯이, 애굽에서의 속량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죄로부터의 속량을 예표할 뿐이었지 실체는 아니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해석을 하고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반면 새관점은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대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어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새관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지만, 기독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은 아담의 죄를 속량할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보혈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적 행동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10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가나안족속들과 달리 가나안 족속에 속하지 않은 족속들에게는, 대적하는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은 상태에서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준다.


포로를 결혼 상대로 맞이하는 것은 점령 당한 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생각하여야한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할 염려가 별로 없기에, 이들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인 대립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성도의 일상의 삶에서도 이원론적인 접근법보다는 일반 은혜의 영역을 자연법을 적용하며 살아야할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원리, 즉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야하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연법의 원리를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가 일반 은혜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성경의 원리를 따르도록한다면, 이는 결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랑은 객관적 진리를 넘어설 수가 없다.

편협된 사랑은 미움을 낳는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으면서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으로 마땅한 권리를 좌우하게된다면, 공동체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틀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결정이나 개인적 판단은 절제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키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객관적 진리의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한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토대에서 세워지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족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식에 대한 편애에서 출발된다.

자식은 모두 다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권리가 인정되어야만 한다.

자식에 대한 편애는 자식 간에 다툼과 미움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자식 간의 다툼이 꼭 편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편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가인의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가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패역한 아들의 첫번째 특징은 불순종이다.


불순종의 원조는 아담으로서, 아담의 자손은 모두 불순종의 아들이다.

불순종하는 아담의 자손을 교훈이나 두려움으로 다스릴 수 있다면, 성경은 교훈으로 끝나는 책이었을 것이다.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죽이는 방법은, 악한 아들을 다스리는 본보기가 되어, 다른 악한 아들에게 두려움을 낳게 하여, 악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이는 시내산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새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본질의 문제를 표면적인 교훈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사람이 교훈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있다.

톰 라이트는 인간이 꾸준한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간과한 주장이다.

복음은 교훈의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수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 명예까지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대속의 차원을 넘어서, 극단적인 모든 수치까지도 감당하신 것이다.

성도는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 때문에, 왜곡된 행동을 하는 것을 삼가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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