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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0 ::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 2018.06.09 :: 신명기 23장 1-18절 말씀 묵상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자를 받는 행위는, 꾸어주는 대상을 상대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세계는 경제 원리로 운영이 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경제 원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 유지된다.
이자를 받는 행위가 조직화 되고 확대된 것이 은행이다.
은행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주체이다.
가나안에서 형제에게 이자를 받는 행위가 공식화될 때, 가나안의 공동체는 이익 공동체로 전락 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투영되는 곳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기에, 이들에게까지 이자를 받지 않을 필요는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려면,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창업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줘서 청년 실업률을 낮추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청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경제 원리도 도입되면 안되며, 도와주려면 차라리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도와 주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하지만, 경제 운영의 원리에서 교회가 사회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경제공동체는 단지 자연법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될 뿐이다.
무슬림 국가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가 된 곳이다.
무슬림들은 국가를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은행에서 서민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대출해주는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이를 본받아서 시행하려고하지만, 신정국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한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은 생각이 그리스도에까지 미치지 못하고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희년에는 꾸어준 것까지 면제해주는 제도를 가지고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은, 더 나아가 이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전가받아야할 것을 예표한다.
이자를 받지 않는 행위는, 희년제도로 이어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은 언약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쪼개진 짐승과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일종의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행한 서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갚겠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이다.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말라는 구절은, 교회에서 약정한 헌금을 독려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약정의 성경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서원에 적용된 구절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이며, 돈주고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원한 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이유로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였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나의 경우는 하나님께 수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행한 약속이기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입다는 그러하지 못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주님의 소유이기에,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 부재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전에 예배당 건축 후에 있은 부흥회에서, 부흥 목사가 와서 갑자기 쪽지를 돌리면서 그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약정하도록 쪽지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부인은 성가대석에서 떨어져있는 남편과 손짓으로 서로 싸인을 하면서 적어내는 것도 보았다.
부흥회가 교인들을 상대로 협박하며 삥뜯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성도는 결코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며, 성경 말씀이 헌금 강요에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잘못 약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깊이 회개하며, 정리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서원을 무조건 지키어야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서원을 하지 말아야하고, 서원을 했을 경우에는 가능한 지켜야하겠지만, 능력이 없을 때에는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서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주고 얻어내려는 잘못된 방법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정헌금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나쁜 방식이다.
약정을 해놓고 교회의 여러가지 낙담되는 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도 보게된다.
헌금은 오직 감사를 기초로하는 것이며, 이미 주어진 능력 안에서만 하면된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헌금을하게 하고서는 대단한 신자라고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한다.
목회자의 의도도 나쁘고, 성도도 자신의 욕심과 명예, 체면을 위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헌금을 독려하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교인이 마음에 낙담이 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 보면 안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헌금은 서로가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보면서 나오는 결과이며, 교회 변질을 가속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려면, 이제껏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고치면서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도 가장 잘 써먹는 나쁜 관행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칭하면서, 헌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헌당예배를 성전 봉헌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다.
예배당은 절대로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단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을 볼 때, 아직도 교회와 교단이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부흥의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러한 제도를 이방인과 나그네를 위한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포도원과 곡식밭의 이웃 사람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
전혀 못먹게 하면 서로 각박해지며, 그릇에 담아가면 대책이 없다.
도움을 받는 규모를 정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규모가 없는 과도한 요구는 서로에게 해를 줄 수가 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가끔 가진 자나 능력있는 자가 교회의 과도한 기대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적용하면 대책이 없어진다.
교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좋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해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이 거룩한 안식의 땅이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강한 제도적 규제가 없으면,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님을 드러낼 뿐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고,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생길 수 있는 악행을 규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재결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내를 맞교환하고서 즐기다가 다시 돌려받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내를 서로 바꾸어 일주일간 생활해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다.
이것이 좀 더 발전 된다면, 충분히 아내를 교환하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 8)”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제도를 악용하여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다.
스와핑같은 극단적인 예를 보게되기도 하지만, 이는 순결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희롱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가나안은 거룩함에 부합된 행동만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심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여도,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가 없이는 어떠한 대책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값으로 성도를 사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남으로서, 더 이상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를 예표하듯이, 교회는 거룩함을 입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이 땅에서의 가나안은 많은 대책을 세워도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율법의 규제가 없어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혼인의 귀함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일 년이라는 기간은 일반 군대에서 결혼한 이에게 주는 며칠간의 휴가와는 비교가 안된다.
1년이라는 기간은 혼인하고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후에 산모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이다.
일 년의 휴가는 혼인한 이에게 단순히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도 출산과 더불어 생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혼인하고서 바로 군대에 간다면, 모든 힘든 상황은 아내의 몫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혼자 놓아두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성하게된다.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땅에서 실천하여야한다.
맷돌의 위짝을 전당 잡는 것은 가나안을 야박한 사회로 만드는 행위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본래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그나마 가나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생존의 기회를 얻게하심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생존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는 자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한다.
사단은 현대인들이 자신에게 종속되도록, 온갖 유혹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의 필수적인 문명의 기기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걸려들게 하는 속성들이 있다.
현대인들은 발달될 문명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시간과 공간을 사단에게 종속시키고있다.
현대 기기들의 편리하고 빨라진 처리 속도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더욱 시간이 모자라게된다.
더욱 편리해진 기기들은 사람들의 모든 관심들을 빼앗아가면서 하나님께 향할 시간을 없애버린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사람을 더욱 더 바보로 만든다.
얄팍한 정보들은 결코 사람을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가나안이 심판을 받은 것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였을 때이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죄악의 보편성은 마지막 심판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나병 환자가 진영 안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에 나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
나병 환자를 진영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미리암의 경우와 같이, 나병은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병 환자가 격리되어야 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격리하는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을 치리하여야한다.
요즘 교회에서 치리가 사라진 것은, 잘못한 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교회가 치리를 행사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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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3장 1-18절 말씀 묵상
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자들이다.
여호와의 총회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생식기관은 혼인과 자손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혼인과 구원 사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환이 상하거나 음경이 잘린 것은 돌이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인 것이다.
흠이 있는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의 거룩한 영역에 참여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에 참여시키신다면, 이방인인 우리도 다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라고 하더라도, 백성까지 안식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라고 할 수는 없다.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단지 땅이 주는 축복을 넘어서 공급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의 땅에서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조건이 주어진다.
가나안의 속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구원의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잘못된 해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율법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직결된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적당히 은혜를 베푸셔서 해결하신다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성경의 중심이고 그리스도는 부차적인 존재라면,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은 이제껏 잘못을 범해 온 것이 된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다면, 개신교 500년 역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 된다.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하여 밑에 따로 정리해보겠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신율주의적 관점은, 복음을 전혀 다르게 풀어나가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함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게된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하나씩 더해짐으로서 이스라엘은 점점 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만약에 현대 사회에서 사생자에게 총회에 들어올 자격을 제한한다면, 아마 법적인 고소가 들어갈 것이다.
인권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 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는 자격 제한이 본인의 잘못이 아닌 태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절에서 고환이 상하거나 음경이 잘린 것도 사고로 인한 장애가 요인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제한도 인권 문제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사항들은, 보편적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에서의 여호와의 총회는 거룩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가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기에, 가나안에서의 안식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참된 안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며, 온전한 의가 조건적으로 요구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충족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은혜가 참된 은혜가 되려면, 인간에게 조건이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태생적인 조건은 인간의 능력 밖에 문제이기에,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과제만을 안겨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태생적으로 잘못된 존재들이다.
육체적 결과들은 타락의 이차적인 결과물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흠이 있는 자들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면, 하나님은 실패하신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충족되어질 것을 예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새관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가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있다.
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거룩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질 참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를 위한 것이다.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한 이들이었다.
일종의 성령 훼방 죄에 속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모압 여인 룻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듯이, 구원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되고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과거의 행적이나 선조의 악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모압 여인 룻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참여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이방인들에게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적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실 뿐이다.
사용되어지는 사람은 중요하지가 않다.
발람이 활동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방신들의 발상지였다.
발람은 이방신들 사이에서 움직였던 점술가였다.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으며, 마치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던 자일 뿐이다.
발람은 결국에는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로막는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한때 가룟 유다는 과연 죄인인가?”라는 논제로 활발한 토론이 있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나중에 배도한 교역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효력이 있으며,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고하더라도, 이로인하여 발람이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저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받을 모든 저주를 감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받을 저주를 대신 다 받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는 피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저주는 변경되지도 않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임하는 것이다.
성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저주를 하여서는 안된다.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행함을 기억하시고 이를 자손들에게 적용시키신다.
인간의 존재는 조상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사고를 하는 철학자들이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담 이후로 쌓아온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악에 대하여 자유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여호와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한 에돔과 애굽 사람에 대한 징계는 비교적 가볍다.
암몬이나 모압 사람과는 달리 에돔과 애굽 사람에 대하여는 가벼운 징계가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과 존재가 어떠한 지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적으로 잘못된 관계에 있어도, 그 근원은 축복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러한 차별 마저도 없어진다.
구약에서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공로가 인정되었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마치 달빛에 의지하던 이들이 해 아래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도는 불교에서 공양을 하듯이 이 생에서 업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조명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9 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10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11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12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13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온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자는 정결함이 요구된다.
인간적인 불결함은 자칫 하나님의 거룩성을 손상 시킬 수 있다.
성적인 것과 배설의 본능은 인간의 체질적인 것이지만, 이는 인간의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기에 부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도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체질까지도 변한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거룩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을 볼 때, 값비싼 복음이 너무 값싼 복음이 되어버린 것 같다.
15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이는 마치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말아야하는 것과 같다.
탈출한 종을 그 주인에게 다시 돌려보낼 때 그 종은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성도는 사단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된 이들이다.
그리스도는 종되었던 우리를 결코 옛 사람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신다.
배교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되었던 이들이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의 모양만 가지고있었을 뿐이었다.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는 가나안의 더러운 문화가 수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 세워지는 현대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창기나 남창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성을 더럽히는데 가장 앞장 선 이들이다.
성은 궁극적으로 구원과 직결되어 있으며, 우상 숭배는 성적 타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이들이 여호와의 전에 번 돈과 소득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혼전 순결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성도의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순결을 경히 여기고, 성을 문란케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를 거부하며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어야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선교적 교회나 이머징 처치는 창기나 남창들의 헌금도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있으며, 동성애자들의 결혼 장소가 되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였듯이, 교회는 잘못된 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곳이 되어야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졌는가?
여호와의 총회의 거룩성이나, 이스라엘 진영의 거룩함,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서 창기가 허락되지 않음등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가운데 있기 위한 조건들이다.
여기서 가나안 땅의 거룩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성은 구분이 된다.
가나안은 거룩함이 요구되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거룩성에 맞게끔 거룩함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해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는 새관점의 주장은 너무나도 확대된 해석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지 실체는 아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고 묘사하는 새관점의 주장의 토대는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지킨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하여 간단한 정리와 비판을 하고자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와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2.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4.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선택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5. 순종에 대한 요구는 선택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이다.
7. 속죄를 통해 언약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롭게 할 수 있다.
8.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이나 속죄, 혹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9. 선택이나 궁극적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상이 언약적 율법주의를 제창한 새관점주의자인 샌더스E. P. Sanders의 주장이다.
울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식으로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을 조사해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지침으로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이 톰 라이트의 주장이다.
이 자체만 볼 때에는 설득력이 있고,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기에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1.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 중심은 출애굽과 율법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출애굽과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그리스도에게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의 구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거나 예표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일 뿐이었다.
만약에 예수의 역할이 이러하였다면, 구태여 하나님이신 예수의 성육신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통적 삼위일체 개념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우상 숭배나 불순종의 개념은 주요 주제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즉 음식법과 제사법과 할례법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이스라엘이 감당했어야했던 선교적 사명을 배타적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교만하여졌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개념을 아담의 범죄와 연계시키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는다.
3.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제거하고 언약 축복을 온 세계에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
이로서 신약의 교회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4. 새관점의 근거가 되는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가 과연 당시의 초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해주고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예수 탐구에 근거한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해석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라는 근거가 없다.
좀 더 광범위한 자료들을 살펴보아야하며, 해석 또한 부분적이 아니라 포괄적이어야만 한다.
몇몇 표본 자료만을 토대로, 신율주의라는 전제하에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5. 사도행전의 주제와 제2성전 유대교의 주제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변이 없다.
성경의 자료보다는 성경 이외의 자료에 더욱 비중을 둔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6. 언약적율법주의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말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부분적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하며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선행을 요구한다.
은혜언약이 은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행위언약이 성취되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은혜를 성취하기 위하여 행위가 요구된다면 이 요구를 누가 담당하는냐에 따라서 전적인 은혜냐 아니면 절반의 은혜냐가 결정이 된다.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기에, 반펠라기우스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7. 언약적 율법주의의 주제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이다.
바울은 행위 구원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라디아서 3:1-4 )
이외에도 많은 비평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음이 성도에게 또 다른 행위를 요구한다면,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복음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이다.
새관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인간이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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