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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0 ::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자를 받는 행위는, 꾸어주는 대상을 상대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세계는 경제 원리로 운영이 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경제 원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 유지된다.
이자를 받는 행위가 조직화 되고 확대된 것이 은행이다.
은행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주체이다.
가나안에서 형제에게 이자를 받는 행위가 공식화될 때, 가나안의 공동체는 이익 공동체로 전락 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투영되는 곳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기에, 이들에게까지 이자를 받지 않을 필요는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려면,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창업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줘서 청년 실업률을 낮추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청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경제 원리도 도입되면 안되며, 도와주려면 차라리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도와 주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하지만, 경제 운영의 원리에서 교회가 사회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경제공동체는 단지 자연법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될 뿐이다.
무슬림 국가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가 된 곳이다.
무슬림들은 국가를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은행에서 서민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대출해주는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이를 본받아서 시행하려고하지만, 신정국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한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은 생각이 그리스도에까지 미치지 못하고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희년에는 꾸어준 것까지 면제해주는 제도를 가지고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은, 더 나아가 이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전가받아야할 것을 예표한다.
이자를 받지 않는 행위는, 희년제도로 이어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은 언약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쪼개진 짐승과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일종의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행한 서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갚겠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이다.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말라는 구절은, 교회에서 약정한 헌금을 독려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약정의 성경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서원에 적용된 구절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이며, 돈주고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원한 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이유로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였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나의 경우는 하나님께 수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행한 약속이기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입다는 그러하지 못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주님의 소유이기에,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 부재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전에 예배당 건축 후에 있은 부흥회에서, 부흥 목사가 와서 갑자기 쪽지를 돌리면서 그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약정하도록 쪽지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부인은 성가대석에서 떨어져있는 남편과 손짓으로 서로 싸인을 하면서 적어내는 것도 보았다.
부흥회가 교인들을 상대로 협박하며 삥뜯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성도는 결코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며, 성경 말씀이 헌금 강요에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잘못 약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깊이 회개하며, 정리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서원을 무조건 지키어야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서원을 하지 말아야하고, 서원을 했을 경우에는 가능한 지켜야하겠지만, 능력이 없을 때에는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서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주고 얻어내려는 잘못된 방법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정헌금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나쁜 방식이다.
약정을 해놓고 교회의 여러가지 낙담되는 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도 보게된다.
헌금은 오직 감사를 기초로하는 것이며, 이미 주어진 능력 안에서만 하면된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헌금을하게 하고서는 대단한 신자라고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한다.
목회자의 의도도 나쁘고, 성도도 자신의 욕심과 명예, 체면을 위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헌금을 독려하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교인이 마음에 낙담이 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 보면 안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헌금은 서로가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보면서 나오는 결과이며, 교회 변질을 가속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려면, 이제껏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고치면서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도 가장 잘 써먹는 나쁜 관행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칭하면서, 헌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헌당예배를 성전 봉헌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다.
예배당은 절대로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단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을 볼 때, 아직도 교회와 교단이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부흥의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러한 제도를 이방인과 나그네를 위한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포도원과 곡식밭의 이웃 사람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
전혀 못먹게 하면 서로 각박해지며, 그릇에 담아가면 대책이 없다.
도움을 받는 규모를 정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규모가 없는 과도한 요구는 서로에게 해를 줄 수가 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가끔 가진 자나 능력있는 자가 교회의 과도한 기대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적용하면 대책이 없어진다.
교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좋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해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이 거룩한 안식의 땅이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강한 제도적 규제가 없으면,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님을 드러낼 뿐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고,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생길 수 있는 악행을 규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재결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내를 맞교환하고서 즐기다가 다시 돌려받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내를 서로 바꾸어 일주일간 생활해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다.
이것이 좀 더 발전 된다면, 충분히 아내를 교환하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 8)”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제도를 악용하여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다.
스와핑같은 극단적인 예를 보게되기도 하지만, 이는 순결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희롱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가나안은 거룩함에 부합된 행동만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심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여도,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가 없이는 어떠한 대책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값으로 성도를 사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남으로서, 더 이상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를 예표하듯이, 교회는 거룩함을 입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이 땅에서의 가나안은 많은 대책을 세워도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율법의 규제가 없어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혼인의 귀함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일 년이라는 기간은 일반 군대에서 결혼한 이에게 주는 며칠간의 휴가와는 비교가 안된다.
1년이라는 기간은 혼인하고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후에 산모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이다.
일 년의 휴가는 혼인한 이에게 단순히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도 출산과 더불어 생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혼인하고서 바로 군대에 간다면, 모든 힘든 상황은 아내의 몫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혼자 놓아두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성하게된다.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땅에서 실천하여야한다.
맷돌의 위짝을 전당 잡는 것은 가나안을 야박한 사회로 만드는 행위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본래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그나마 가나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생존의 기회를 얻게하심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생존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는 자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한다.
사단은 현대인들이 자신에게 종속되도록, 온갖 유혹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의 필수적인 문명의 기기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걸려들게 하는 속성들이 있다.
현대인들은 발달될 문명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시간과 공간을 사단에게 종속시키고있다.
현대 기기들의 편리하고 빨라진 처리 속도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더욱 시간이 모자라게된다.
더욱 편리해진 기기들은 사람들의 모든 관심들을 빼앗아가면서 하나님께 향할 시간을 없애버린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사람을 더욱 더 바보로 만든다.
얄팍한 정보들은 결코 사람을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가나안이 심판을 받은 것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였을 때이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죄악의 보편성은 마지막 심판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나병 환자가 진영 안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에 나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
나병 환자를 진영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미리암의 경우와 같이, 나병은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병 환자가 격리되어야 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격리하는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을 치리하여야한다.
요즘 교회에서 치리가 사라진 것은, 잘못한 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교회가 치리를 행사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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