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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2. 23:24

신명기 25장 1- 19절 말씀 묵상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아무리 사람이 범죄를 하였을지라도 인격체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손상된 형상이 회복되어야 할 땅이기에, 범죄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경히 여김을 받으면 안된다.

공정한 재판에 의한 판결이라도 사십이 넘는 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는 집행이다.

재판은 공정하게 하되, 인격에 손상을 입을 정도의 지나친 집행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십은 더 이상이 필요없는 충만한 숫자다.

성경에는 사십에 관한 숫자는 수 없이 많이 나온다.

모세는 사십세에 광야로 도망을 갖고, 사십년을 광야에서 지낸 후에 사십년을 사역했다.

노아 때에는 사십주야를 땅에 비가 내렸으며,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가나안 정탐꾼들은 사십일 간을 정탐하였던 것과 같이, 사십은 더 이상이 요구되지 않는 충만한 숫자임을 볼 수 있다.

죄인에게 사십 이상을 때리는 것은 인격의 손상을 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존중받아야할 사람을 경히여기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예표적으로 회복되는 곳이다.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일을 하게하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는 것은 비열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성이 상실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가나안은 모든 피조계물의 탄식을 씻어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선취적으로 경험하는 곳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선취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곡식을 떠는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한 하나님 나라를 떠는 사람으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는 특혜를 누릴 수가 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바울은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라고 남편이 죽으면 자기 뜻대로 시집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부러 형수치수제를 거부하는 것인가?

바울이 전하는 말에 형수치수제를 지키고있던 이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바울은 반율법주의자가 되고말 것이다.

하지만 형수치수제가 원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에까지 존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구속을 약속하신다.

흔히들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속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할 것을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고자, 헤롯을 이용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가나안은 영원한 구속의 나라를 예표하는 곳으로서, 구속주가 오실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원시복음이 실현되어야 할 곳이었기에, 형수치수제는 꼭 필요하였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룻이 들어간 것은 형수치수제에 의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신약에서는 이미 원시복음이 실현되었기에 더 이상 형수치수제가 필요치 않다.


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정당 방위나 성적인 개념보다는 대를 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위를 손상시킴으로서 대가 끊길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이러한 조치를 취함으로서 사단의 계략을 사전에 막고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대를 끊는 행위를 한 손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이므로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두 종류의 저울추는 상대방을 속임으로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속임수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은 가나안이 받게될 심판을 왜곡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속이는 것은 비단 저울추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것도 일종의 속임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학위라든가 경력등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나간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가치 평가는 경제 활동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하는 위선적 행동은 일종의 속이는 저울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에게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속이는 행동이다.

서구에서는 종종 기독교인을 hypocrites라고 부르기도한다.

즉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이해한다고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으로하여금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공정하지 못한 저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사회이기에, 가나안의 속성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막는 행위는 단순한 방어 전쟁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가로막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다.

아말렉이 악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고자하는데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서 산꼭대기에 선것은,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이 일종의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 속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뱀이 되어 애굽 술사들의 뱀을 잡아 먹었던 지팡이였다.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수아의 승리는 사단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아말렉이 천하에 기억되지 않으리라는 모세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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