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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3. 22:31

신명기 18장 15-22절 말씀 묵상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무수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호렙산 총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였으면서도,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거역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나마 모세로 인하여 죽음을 피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비록 여호수아가 모세의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선지자의 역할은 광야에서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땅의 수확을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가나안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단순한 선지자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가면서,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선지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비롯하여, 다윗의 범죄의 한 가운데 임해야만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일으키시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했기에, 이스라엘의 동족 가운데 세워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최종적인 선지자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어왔다.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요한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로 오신 그리스도는 죄악의 한 가운데 오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도는 그리스도가 담당하신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죄의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문제이기에 또 다른 각도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로서 짓는 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성전이 더러워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또 다른 차원의 심각한 문제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죄의 문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에 성도는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하나님을 뵙는 것을 두려워하고 애써 하나님을 피하는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자로서의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새관점의 주장과 달리 이스라엘은 구속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구속을 필요로하는 상태이지 결코 구속된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인간의 연약함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에게 연약하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고 스스로 강해보이는 태도가 교만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라는 솔직한 고백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이러한 고백은 제사장이시고 왕이시고 선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무리 가운데서 사역을 하셔야만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는 예언자의 개념보다는 대언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자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선자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면, 호렙산에 모인 총회의 날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없다.

호렙산 총회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호렙산 총회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쇼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쇼를 보는 이들은 두려워 떨 필요가 없듯이, 하나님의 관한 말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이들이다.

선자자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하나님에 관한 말이냐는, 성경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된 사람의 말이냐, 아니면 성경이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냐의 차이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일종의 연구 자료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에 관한 기록은, 기록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구약에서는 선지자의 입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사람의 책이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인 책일 수 밖에 없다.

칼 바르트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철학적 사고로부터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칼 바르트의 신론, 기독론, 교회론은 이러한 바탕에서 정립된 것이다.

선교라는 용어로 인하여, 선교적 교회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겠지만, 여기서 사용되는 선교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의 선교를 적용한 개념이다.

선교적 교회는 Missio-nal Church, 즉 미셔널 처치, 혹은 미션얼 처치라고도 불리운다.

“하나님의 선교MissioDei”는 WCC에서 채택한 개념으로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WCC의 교회론이다.

선교적 교회에서 보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기록으로서, 교회의 중심에는 인간의 문화가 있다.

선교적 교회는 인간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이러한 변화는 호렙산에 총회로 모인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두려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게 멀리 간 개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있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참고서적과 같이 사용하여서, 스스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선교적 교회의 발상이 얼마나 교만한 인간의 생각인지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를 통해서 증명해주고있다.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 즉 대언자들의 대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참고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은 사람들 앞에 구원과 심판을 선고한다.

성경이 인간 세계에 보편적으로 놓여있는 현재의 상황은 이 땅에 대한 구원과 심판을 선고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최종적 선지자는 그리스도이지만 이전의 가나안의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이었다.

다른 신의 이름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거짓된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만, 이러한 이적과 기사가 증험과 상취함과 구별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있는게 한정되어있다.

증험과 성취함은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구약과 사도 시대에 한정되어있다.

정경이 갖추어진 신약시대에는 모든 말씀이 성경으로 전달된다.

이적과 기사에 집중하는 신사도운동은 성경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방법이다.

인간은 분별력이 없기에, 정경이 갖추어진 시대에도 증험과 성취함을 찾는다면, 분별력의 상실을 가져올 뿐이다.

신사도운동이나 경험을 추구하는 이머징미셔널 처치에서의 관상기도, 혹은 레노바레, 트레스디아스같은 운동들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이머징처치의 선구자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진리는 나무테와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이는 펜넨베르크의 제자인 스탠리 그렌츠의 영향에 의한 것이며, 펜넨베르크의 자의적 만유내재신론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말씀은 주관적으로 점증되는 진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이며, 구원과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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