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24장'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8.06.11 :: 신명기 24장 10-22절 말씀 묵상
신명기 24장 10-22절 말씀 묵상
10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약자,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규정된 법이다.
비록 가난하여 돈을 빌렸을지라도,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을 당하면 안된다.
집 안의 영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 되어야 할 영역이다.
집 안의 영역은 공개적으로 노출되어서도 안된다.
초대받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오는 행동은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옷을 해입히심으로서, 수치를 가리우셨다.
벌거벗겨진 아담의 수치를 가림으로서, 아담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셨다.
아담의 인격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담의 수치는 하나님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약자건 강자건 간에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 이들의 고유 영역에 대한 침범은 하나님의 인격적 영역까지 침범하는 행동이다.
약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침범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동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수치를 가리우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수치를 가리우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희생을 넘어서, 인간이 받을 모든 수치를 받으시면서, 수치를 직접 담당하셨다.
집 안의 영역을 침범하여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립이 된다.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함으로서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빚진 인간의 수치를 가리시는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에서 시행되어야 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실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담겨있는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격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현대 문명의 악함은, 상대방에 대한 영역 침범 방식에서부터 볼 수 있다.
19세기말 산업의 발달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과 자원이 필요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일찍 발달된 산업으로 말미암아,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고, 산업 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다른 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뒤늦게 산업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나머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늦은 독일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이미 산업화가 된 나라를 침략하면서 제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었다.
현대 문명 사회는 산업의 발달로 특징 지워지며, 시장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영역 침범만이 생존의 길이 되었다.
시장 경제 원리로 운영되는 현대 사회는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빚진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일제 식민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외국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IMF기간에는 나라 안의 영역을 외국의 자본가들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원칙은, 역으로 현대 사회가 하나님의 구속 원리를 거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회 개혁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해방신학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만 사용될때는, 그 안에 담겨있는 구속의 원리를 상실하게 된다.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인간에게 매일의 안식은 그 다음의 생활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매일의 안식은 한 주의 안식을 이루어가고, 매주의 안식은 점진적으로 희년으로까지 나아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 주지 않으면, 그는 그 다음날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다.
해질 때에 가나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은, 자연법적 일반 은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행동이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행동이 될 때,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면 안되는 것이나, 해질 때에는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은, 가나안이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일상의 삶 가운데 적용되는 자연법적 원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안식이 전파 될 때,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비록 가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었지만, 땅에서는 빈부 격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빈부 격차는 제도로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속성을 가지려면,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이방 민족들에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공동체적 연대감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 사역과 같은 속성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가나안에서는 학대가 재연되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의 학대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를 망가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당일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매일의 안식은 성취 후에 가능하다.
에덴에서의 매일의 삶은 매주,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있었으며, 이는 아담의 수고를 근거로하였다.
에덴에서 수고의 결실로 안식이 약속되었듯이, 가나안에서의 수고에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수고에 의한 안식으로 귀결된다.
타락한 인간은 품삯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공급하심 가운데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있는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은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다면, 매일의 안식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 가운데 놓여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더 이상 죽음이 전달되지 않게 생명을 공급해 주신 것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죄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곳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실제 가나안에서도,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원의 범죄로 말미암아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의 죄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불순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대립된다.
아간의 범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아간의 범죄는 마치 암조직과 같아서, 제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암수술을 할 때는 암조직만 제거하면 쉽게 재발된다.
건강한 조직이라도 암조직 주변의 조직들은 이미 암 조직의 영향을 받은 상태이기에, 주변의 건강한 조직도 어느 정도는 같이 제거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아간에 속해있는 것들은 이미 아간의 범죄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이다.
이 부분도 같이 제거되지 않으면, 또 다시 아간의 범죄와 같은 죄가 재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은 언제나 환경만 조성되면 죄악으로 나타나게된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고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가나안에서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식이 죽은 것을 이해하려면, 내면의 본질적 죄와 죄를 짓는 악행을 구분하여 이해 할 필요가 있다.
가나안에서 행함의 죄가 없었다면,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행위 언약은 본질적 죄에 대한 것보다 행함의 죄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란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본질적 죄의 단절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내면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문제 해결이 없이 외적인 행함의 죄가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의 문제에까지 접근한다.
그리스도는 행함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면서,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하게하신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인간은 거듭났다고하더라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체질 자체가 사망의 몸이다.
본질적 죄는 해결되었어도 죄의 체질은 그대로 가지고있다.
성도는 행함의 죄와 본질적 죄, 즉 아담으로 인한 죄의 문제는 해결 되었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해결 될 것이다.
완전한 죄의 단절은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을 하셨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약자에 대하여 강퍅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였다면, 인간의 교만은 통제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자유인이 되었다면, 이는 평생에 기억에서 잊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되며, 교만의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속량 받았음을 인식한다면, 결코 약자를 괴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는 자신이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자신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소득의 일부를 남겨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의 부요를 자신에게 나누어주신 것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고아였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홀로 지냈었지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이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지만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있는 부요한 자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신명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26장 1-19절 말씀 묵상 (0) | 2018.06.13 |
---|---|
신명기 25장 1- 19절 말씀 묵상 (0) | 2018.06.12 |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0) | 2018.06.10 |
신명기 23장 1-18절 말씀 묵상 (0) | 2018.06.09 |
신명기 22장 13-30절 말씀 묵상 (0) | 2018.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