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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0 :: 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히브리서 9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장래 좋은 일은 천상의 나라, 즉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 지으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서, 처음 창조의 궁극적인 완성을 위한 일이었다.
이는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때 임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대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으로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에덴에서의 과제, 즉 흔히들 문화 명령이라고 말하는 통치 명령을 통해서 에덴에서 성취되었어야할 하늘 나라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을 시키셨다.
흔히들 말하는 문화 명령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잘못된 해석이며,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수행하였어야할 통치 명령으로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이 통치 명령을 대신 완성시키심으로, 에덴에서의 과제를 완성시키신 것이다.
이 땅에서의 문화 변혁을 위한 문화 명령의 수행은, 그리스도가 완성시키신 안식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다시 에덴에서의 과제를 수행하려는, 카이퍼로부터 시작된, 인간적 발상이다.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아담이 맡았던 에덴에서의 제사장직에 대한 종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의 제사장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모형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은 대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옛 언약 안에서의 제사장직은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 담겨져있던 제사장직으로까지 올라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성취되는 것이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 땅의 외형적 구조는 타락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건물이 성전으로 불리우는 것은 현 시대 목회자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형적인 것을 추구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거룩함은 인간의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단번에 들어가심으로서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더 이상의 제사장의 역할이 요구되지 않은 만큼 성도에게도 더 이상의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많은 윤리적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성경의 근본 교리인 이신칭의의 개념마져 흔들려고한다.
성도들 가운데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들은 잘못된 구원론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육체, 즉 바울이 말하는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기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죄에 대하여 고발을 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한 문제를 구원론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들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윤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는 행위와 충성이 요구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육체에 대한 정결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결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짐승의 피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구약의 제사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의 표면적인 그림자에 불과하다.
행위로 깨끗해지려는 이들은,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면서,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로서의 무덤에 회를 칠하려는 이들이다.
요즘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성도에게 행위가 포함된 충성allegiance이 요구된다는 Matthew Bates의 새로운 주장은 톰 라이트의 주장의 또 다른 변형일 뿐이다.
기독교를 유대주의적이고, 윤리적으로 만들려는 톰 라이트나 메튜 베이츠와 같은 이들은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깨끗케하신 근원적 해결을 축소시키는 것이며, 이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체를 정결케하려는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노력일 뿐이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는 표면적인 행실을 깨끗케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죄를 깨끗케하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피에 의미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표면적이고 윤리적인 정결로 제한시킨다.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인 것이었다면, 성도의 부정적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피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게 된 이가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종이 아들로 변화된 것과 같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메튜 베이츠Matthew Bate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의의 전가를 인정하지만, 오직 충성allegiance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취소되어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인간의 근원적 죄가 아닌 행위로서의 죄악에 한정시킴으로서 범하는 실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존재론적이 아닌 행위론적 관점에서 보았던 오류에 기인한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신 이유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행위 이전에 아담 안에서 생긴 존재론적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담이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는 행위 언약의 개념 안에서만 성립된다.
행위 언약이 없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기에, 행위 언약의 개념은 아담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규정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모세 언약 안에서 언급된 첫 언약은 근원적으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모세 언약은 많은 면에서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으로 보아야만, 모세 언약을 충족시키신 예수를 둘째 아담의 개념 안에서 자리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언약을 아담과 관계없는 언약으로만 제한 한다면 둘째 아담의 개념의 정립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규정할 경우, 둘째 아담으로서의 역할이 상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이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으로 분류되어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한 죄가 성립된다.
칼 바르트나 존 머레이와 같이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 인간의 죄성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의 역할을 약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둘째 아담으로서의 죽으심이며, 이는 처음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 안에서 성립된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죄악된 행실은 인간의 근원적 죄성의 표면적 현상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죄악된 행실에 대한 해결을 위해서 본을 보여주신 모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 대한 것이기에, 이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에 관한 것이지 결코 행실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둘째 아담으로서의 속죄제에 대한 개념에서가 아니라,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 삶의 방식의 본을 보여준 희생으로 왜곡시킨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예수 자신의 희생적 죽음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이상한 믿음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의 로마에 대항하는 희생적 죽음이 옳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데 의미를 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대로라면,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의 절기 행사가 되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와 신정통주의도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같이 끊임없는 오류 가운데 헤매는 것은, 이들은 하나같이 아담과 맺어진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고있지 않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이 실패한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둘째 아담으로서의 새 언약의 중보자로 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진정 성도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성도를 살리신 분으로서, 앞으로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 즉 언약이 죽으심과 더불어 성립되는 것은, 아담 언약 안에서 이미 죽으리란 약속이 성립되어 아담과 아담의 후손이 언약 안에서 죽었기에,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의 죽으심이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 밖에 없다.
아담의 죽음이 행위 언약에 대한 것이었다면, 아브라함 언약에서의 하나님의 죽으심은 은혜 언약, 즉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음은 아담의 죽음의 문제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직접 죽으심으로 해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아담의 범죄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하지만 ,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없던 것으로 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언약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에,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는 없었던 일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분명히 아담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이며, 또한 새 언약의 모형인 아담 언약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모세 언약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피와 항상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언약이 아담 언약과 연계되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이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는 모세 언약 안에 있던 유대 이스라엘 백성을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모세 언약으로서의 첫 언약은 실상으로서의 아담 언약과 실상으로서의 새 언약을 이어주는 허상으로서의 그림자일 뿐이다.
유대 이스라엘은, 아담의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그림자일 뿐이지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일 수가 없다.
모세가 뿌린 피는 죄를 용서하는 피를 가리킴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미 죄악으로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톰 라이트의 주장은 유대인들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피의 장막이 세워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미 존재론적으로 죄악 가운데 있다는 전제에서 세워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행하였을 때에도 속죄제를 위해서 피의 제사를 드려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였기에 장막은 오직 피흘림을 통하여 세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막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질 참이스라엘 백성인 신자들을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허상일뿐 실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허상인 이스라엘의 범죄함 이전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죄용서를 위한 실질적 구속 행위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첫 언약을 아담 언약과 관계 없는 모세 언약으로 제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모세 언약 아래있던 유대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으로 제한하려는 시도를 한다.
바울이 히브리서 저자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히브리서가 바울의 서신들과 대립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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