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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13. 23:25

신명기 26장 1-19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처음 소산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받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자의 기본 자세이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오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이었다.

현재의 존재와 풍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과정에 빚을 진 것이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성도가 현재 누리는 풍요는 수천년의 구속 역사의 과정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룬 결실들이기에, 결코 감사함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가진 것을 아무리 많이 하나님께 드린다할지라도, 이제껏 주신 축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예배하려오는 자는 감사 예물을 가지고 온다.

제단 앞에 놓여진 광주리 안의 맏물은 속죄와는 무관한다.

가나안에서의 제단의 우선적 역할은 속죄에 대한 것보다도 감사에 대한 것이다.

속죄에 대한 것은 이차적으로 가나안에서 드러나는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다.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제단 앞에서 아뢰는 고백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기에, 아뢰는 것은 사실을 고하는 것보다는 마음에 새기기 위한 것, 마치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서, 마음에 기억하게하는 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일종의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를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선택받아 애굽에서 크게 번성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에서 다시 번성하여 크고 강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반복된다.

이는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된 상태가 최종적 상태가 아니었듯이, 크고 강하고 번성되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최종적 상태가 아니라 그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발전을 하면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지만, 이는 최종적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크고 강하고 번성된 민족은 오직 패망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고난 가운데 출애굽을 하였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를 맞이했듯이, 번영된 대한민국은 어려움 가운데 또 다른 희망을 기다려야만 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어려운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또 다른 희망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당한 대우와 고통과 심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결코 애굽에서 나와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이방인의 압제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일제의 압제가 없었다면, 선교사들에게서 희망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며, 한국이 복음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는 마치 바벨론이나 애굽과 같은 필요악일 뿐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졌다고 이를 미화한다면,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미화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악이 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36년은 이조 500년의 뿌리깊은 유교 사상의 맥을 잘라내는 역할을 함으로, 대한민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으며, 한국전쟁은 각 지역의 뿌리깊은 배타성과 지역 텃세를 없애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아직도 지역 텃세가 남아있는 경주와 제주와 강릉이 가장 복음화율이 낮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일제와 한국 전쟁도 어디까지나 애굽과 바벨론 세력과 같은 존재로서 결코 미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이유로 미화될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더라도 악일 뿐이다.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원동력이 된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인격적 반응이며, 응답으로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기도한 이들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기도를 원하신다.

기도 없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인격적 반응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중보자의 기도가 있었지만, 구체적 응답을 위해서는 당사자의 기도가 요구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에서 출발된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존중되어야하며, 기도 응답은 인격적 존중으로 인한 반응이다.

말을 하는데도 반응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부여한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시기에, 결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출애굽 과정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간섭은 애굽에 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미 애굽의 문화에 깊게 물들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내에 자리잡고 있던 내면의  세계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보여주시는 것은 외부의 세력 못지 않게 내면에 자리잡은 세계관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이들에게까지 항상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기도하지만,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방법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신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을 끊임없이 구해서는 안된다.

지속적으로 부흥회를 쫓아 다니거나, 신사도 운동에 심취하거나, 관상기도에 몰입하여 잘못된 인위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한다면, 이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성한 신자는 오직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 요구되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안식의 땅이다.

가나안에서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거룩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능력 밖에 것이었다.

가나안과 달리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도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교회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거룩함의 요구라는 점에서 가나안이 애굽과 구별되었듯이,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곳이다.

외적인 건물 위주의 유형의 교회는 무형의 교회를 제대로 표현해주지는 못하지만, 세상 속에 들어가는 무형의 교회는 거룩함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한다.

무형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세력이 커지면 경계의 대상이 된다.

이는 애굽에서 번성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결코 교회를 수용하려고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변화시켜서 거룩하게 만드시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구별된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상에서 성도를 구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거룩함에 참여한 구별된 사람들이 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만,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탄생된 교회가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이며,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구별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려는 전통적 교회와 구별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문화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은 모든 피조세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One Kingdom개념이며,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두 나라Two Kingdom와는 구별이 된다.

One Kingdom개념의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되었기에,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를 종식시키는 안식의 땅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안식은 거듭난 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피조세계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으며, 새옷으로 갈아입을 헌옷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이라면, 이미 이 피조 세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어야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신앙의 고백 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산물을 가지고 왔다.

성도는 이제껏 자신을 인도하신 것에 대한 고백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성도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13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는 공동체적 풍요로 이어져야한다.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는 빈곤한 자들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풍요를 어느 정도만 나누었다면 세상이 교회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이다.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풍요를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성물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애곡하는 것과 부정한 것과 죽은 자는 생명과는 반대되는 것들이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풍요를 제대로 누릴 수만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의 요구가 성취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곳이 될 수 있었다.

가나안은 생명으로 향하여있기에,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의 소산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덧입혀져서는 안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감사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에덴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면, 하늘과 땅은 완전한 연합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이 땅에서 특별하게 구분되어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과의 연합을 준비하는 거룩한 안식의 장소로 준비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하늘의 풍요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된 가나안에서, 정작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아담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참이스라엘이 되시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도록 필요성을 제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도는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현재적으로 임한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한다.


16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살기에, 규례와 법도를 넘어서는 안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가나안은 한 가지로 획일화 되어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법도이며 삶의 방식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여야한다.

가나안과 달리 이 세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진리의 기준이며, 자신의 생각이 삶의 방식의 기준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말하는 자를 용납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는 이스라엘의 종말과 유사하다.



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구이다.

가나안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먼저 들어가게 하고서 자격이 있는 삶을 살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 응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된 것은, 이들이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하시고, 후에 가나안에 합당한 삶을 요구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서 모든 명령을 지키라고하는 것은, 마치 돈을 벌어서 물건을 사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물건을 주고서 후에 갚으라고하시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애굽 땅에서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간구에 응답하시고 명령을 지키라고는 요구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이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전부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인 공급만  하신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였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도 누구나 다 하나님께 간구한 응답으로 구원에 참여하였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의무가 있다.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선택받은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뛰어나게 하신 것이지 원래 뛰어난 민족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만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기대되었던 성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성도들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백성인 성민이 된 것이다.

성도의 존재와 위치가 어떠한 지를 생각할 때, 최소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은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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