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9장 1-12절 말씀 묵상
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세상이 전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인간에게 세상을 정복하는 과제를 주신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복해야할 세상은 인간적 논리로는 정복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정복이 가능하다.
정복해야할 대상은 가나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살던 에덴에도 있었다.
아담도 하나님께로부터 통치 명령(창 1:28)을 받고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다스려야할 대상으로서의 들짐승 가운데 간교한 뱀에게 유혹을 받아 도리어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나게 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결코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담대하게 정복하라고 말씀 하시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정복했다고 착각하며 교만해진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의 후손이기에 불순종의 자식들이며, 이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과 합류할 수 밖에 없는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대표하는 백성들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타락한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참여할 자격과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거듭난 이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언약 백성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 하셨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거듭난 신약의 성도들이 참된 가나안 정복 전쟁인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이 아니기에, 성경은 유대 이스라엘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2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세상에서 잘난 백성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잘나고 성공한 이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못나고 부족한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신다.
성추행으로 유명했던 J 목사는 항상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잘난 이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유명한 강사를 소개할 때 종종 그가 어떠한 경력을 가졌던 사람인지 그의 화려한 과거를 소개하곤 하지만, 그들이 종국에는 교만하여 실족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아낙 자손들을 물리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잘난 민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듯이 교만해진 것과 같이, 잘난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도, 자기가 잘나서 쓰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쓰임을 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한번 쓰임받은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자신이 잘나서 구별된 민족이 되었다는 교만에 사로 잡혔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택하셔서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쓰임받은 자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발전과 더불어 체구가 커진 현대인들은 마치 아낙 자손과 같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사용하시지는 않을 뿐더라, 오히려 하나님보시기에 멸망받을 이들일 뿐이다.
북쪽이 개방되면 너도나도 선교에 앞장서려고하며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낙 자손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아낙 자손을 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사용되어질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려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이지만,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고다닌다.
인간에게는 능력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사용되어질 뿐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설령 이스라엘 족속이 아낙 자손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랑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설령 자신에게 세례를 준 목회자가 타락을 했다고하더라도,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목회자는 사용되어지는 수단일 뿐이지, 목회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유명한 목회자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못된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사용되어질 뿐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잘 나가거나 쓰임받을 때 교만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절벽 위에 땅떠러지와 같은, 실족의 지름길이다.
인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질인 것이다.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정죄를 위한 공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가나안에 대한 정복을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낙 자손들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의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악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정의를 외쳐서는 안된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의가 상실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행사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셨지만, 이는 아담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담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를 수행하는 이스라엘은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게된다.
인간이 종종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시키거나 포장하기 위해서,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권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영역을 확장하려했던 것이다.
이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의 확장이지, 결코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성장과 확장도 실상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 교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교주는 자신이 신이 되어서 자신의 공의를 선포하려고하지만, 이는 실상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한 가지일 뿐이다.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아낙 자손을 쫓아내는 작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에서 아낙 자손은 이미 죄악이 심판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가득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세상은 이미 아낙 자손과 한 가지로 죄악이 가득차고있다.
가나안에서의 아낙 자손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할 때에 임할 심판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대한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똑같은 죄인이지만, 단지 죄용서를 받았다는 차이일 뿐이다.
세상에서 성도의 성공은 성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힘을 실어주심으로 성도를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은 성도의 잘남이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가 받는 축복을 세상에서의 성도가 하여야 할 역할과 연계시키기보다는,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헌신할 것을 말하며, 또한 헌신한 이들이 받은 복을 간증하면서 교회에서의 헌신과 축복을 연계시키려고한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성도의 성공은 성도의 공로와는 상관없는데도, 이를 왜곡시켜서 세상에 대한 성도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에 대한 충성과 축복을 연계시키는 분위기는 목회자가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목사도 끊임없이 이러한 강조를 하였던 것을 보았다.
아낙 자손을 진멸해야할 이스라엘에게서 공로를 찾아 볼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겸손히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준비를 하여야한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공의를 말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 부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부자나 가진 자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면서, 정의를 외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내세우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른 의로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다.
아낙 자손을 진멸시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이들이다.
자신이 의롭기에 사회의 악에 대하여 정의의 칼을 휘두를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난 것이 없다고 성경은 증언하고있다.
미국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력은 인구 비율에 비하여 엄청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택함받은 민족이라고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이 욕심이 많은 까닭이다.
인간은 남과 다른 상황에 놓이면 스스로 착각하게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의로움이란 없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특히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쓰임받는 백성들일 뿐이다.
요단 강가에 이른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다.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모세의 중보 기도가 없었다면 이미 다 멸절되었을 목이 곧은 백성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문전에 있게된 것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성도가 불신자들에게도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하는 이유가 된다.
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잠시 지도자가 안보이는 사이를 못참아서 불이 붙고있는 하나님의 산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방식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우상 숭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이방 신상을 들여놓고,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다 같은 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호렙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당도 마찬가지이다.
수능 때만 되면, 절간이나 예배당이나 똑같은 모습이 재연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당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의 목회자들은 교회당의 화려함과 자기를 섬기는 이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를 예배와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격노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사십 주야의 금식은 모세가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서 호렙산에 머무른 완전한 시간이었다.
이 완전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모세가 40주야를 호렙산에 머무르면서 떡과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를 완전히 비우는 시간이었고 그 비움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사십 주 사십 야를 금식하신 후에 떡으로 유혹하는 사단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의 모습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실현됨으로서 십계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필요를 내려놓은 금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과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견고한 글로 쓰여졌다.
고대 근동에서는 종종 사람이 돌에다 법을 새겨넣음으로서 사람들이 수정을 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는데,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문화하심으로 사람이 수정 할 수 없게 하였다.
두 돌판은 언약궤 안에 보관됨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한 매개체이기에, 성도는 구약의 대사장이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말씀이 매개체가 되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1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노아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듯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주신 것은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진노가 더 이상 비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행위 언약으로서,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지만,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였기에, 사십 주 사십 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노아의 홍수에서의 진노의 비를 재연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대신 아들이 진노를 받도록 준비하셨기에, 사십 일간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 진노와 고통의 시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듬으로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금송아지를 만듬으로서, 어느 누구의 유혹이 없어도 스스로 부패한 백성임을 드러내었다.
인간의 공백으로 인한 불안은, 스스로를 부패하게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기에, 모세가 올라간 공백의 기간에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는 모세의 인도가 표면적인 안정이 되었지만, 모세가 안보이는 기간에 평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도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목회자에게 의존하면서, 목회자가 안보이면 불안하여 세상 것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
유명한 목사를 따라가 집단을 이루면서 눈에 보이는 큰 교회 건물을 짓고서 안정을 찾으려는 성향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의 성향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성도는 목회자의 유무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평안 가운데 거 할 수 있어야한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사람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도, 하나님만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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