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21. 05:00

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악인이라는 사실과 악행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최선을 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지 불과 사십일이  되지도 않고, 시내산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있는 상황이었다.

불의를 아시는 것과 보시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지를 아셨지만, 이를 직접 목도하심으로서 진노를 그치지 못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정하셨다고하더라도,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도하며,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선행에 대하여 기뻐하시기도 하고, 신자의 악행에 대하여 분노하시기도 하신다.

심지어 악한 왕 아합이 돌이킬 때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도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정죄를 피하였을 뿐, 목이 곧은 것은 매 한 가지이다.

거듭남과 성화의 과정에 참여된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자신 안에서 의를 찾아볼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지, 악을 행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방종과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삶 가운데서의 행함이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행할 필요가 있다.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역사는 외적인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수 많은 인류를 만드셨고, 노아 홍수를 통하여 노아 가족만으로도 새 인류를 만드셨다.

애굽에 내려가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신 것도 소수인 야곱의 가족을 택하신 결과이다.

모세만을 택하셔서 충분히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외적인 규모를 키운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S교회의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O목사는 중국선교를 위해서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선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들의 교만이 보편회되었다면, 한국의 수많은 거대한 교회들이 초토화되는 것도 순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규모를 보지 않으신다.

아무리 많은 수의 무리가 모였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는 이들은 순종하는 한 사람보다도 못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큰 교회라고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쉽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큰 규모의 교회는 어김없이 장사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명예와 성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교만한 이들이 넘쳐나게마련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추구할 교회는, 모세와 같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겸손히 엎드릴 수 있는 소수가 모인 소규모의 교회를 지향해야한다.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두 돌판은 받은 모세의 마음은 감격 자체였을 것이다.

사십일의 금식을 통하여 얻어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모세가 직면한 상황은 정반대의 절망의 상황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행위 언약이 며칠만에 저주로 결정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두 돌판을 주신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해서 불 가운데 뜨거운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이끄시고자 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을 비웃기라도하듯, 백성들은 사단의 좀비가 되어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신이거든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열심과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인간의 본능은 마치 당긴 고무줄을 놓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교훈이나 명령이나 강요에 의한 윤리 도덕은 다 순간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에,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겨진 고무줄이 오무라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산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도,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할지를 예측하게해준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속도는 하나님께서 쫓아오시는 속도보다도 빠르다.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다.

기독교가 윤리로 제대로 세워질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 윤리를 다루는 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고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그들의 신학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 출발되었으며, 인간의 의지를 자율성이 상실된 노예 의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죄성이나,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인간의 노예의지라는 주제를 애써서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카이퍼나 바르트, 톰 라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윤리적인 기독교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신칼빈주의의 문화명령을 근거로한 문화변혁운동이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이나,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같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모세가 두 돌판을 던진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로 인한 언약의 파기를 뜻하였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모세의 진노나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세가 중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으신 언약, 즉 행위 언약의 깨어짐을 경험하셔야했고, 두 번째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도 깨어짐을 경험하실 수 밖에 없으셨지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심으로, 택한 이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모세가 깨뜨린 두 돌판은 인간 모두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신 분이시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이 멸절을 면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19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사십 일을 금식과 달리, 모세가 사십 주야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지낸 두 번째의 금식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한 시간이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공생애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앞서서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굶주리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구속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금식은 모세의 두 번째 금식과 마찬가지로 중보를 위한 금식이었다.

중보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이 속하여야할 공동체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 안에 담겨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에 왜곡을 초래했고, 이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의 공동체의 표현이기에, 모세의 사랑에 기초한 중보의 모습과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현재의 교회가 비난받는 것에 대하여 항변하기 전에, 교회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고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세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론은 소극적 범죄를 하였던 것이다.

아론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상황이나 현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끊임없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구미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시도들을 한다.

강단에서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대하여 선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다.

바르트는 실존주의라는 인간 중심의 철학 위에 신학을 정립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판넨베르크의 경우는, 신학교가 대학의 학부와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자연과학과 철학과 소통이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형태의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시켰다.

스탠리 그렌츠는 펜넨베르크의 신학을 이어받아, 이머징처치의 대표적 리더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영향을 줌으로서, 이머징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스캇 맥나이트는 새관점주의자인 제임스 던의 신학을 이어받아, 신칼빈주의와 새관점과 신정통주의를 혼합시킨, 이머징미셔널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발전시켰다.

현대신학자들의 금송아지 만들기 작업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왜곡을 통해서 빚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신학의 산물 앞에서 환호하는 이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진노하셨듯이,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노하실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중보를 배운 성도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할 것이다.


21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죄를 짓게 하는 우상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렸다.

아마 어느 정도 형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을 가져다가 또 다시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작업은 욕심을 위한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형태들

을 조심해야한다.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는 금송아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성도가 주식 투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주식은 속히 부하고자하는 마음을 활성화시키는 속성이 있기에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잠언 28장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있다.

일단 성도가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시간과 마음이 주식에 빠져들어가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가 없다.

주식을 한다는 것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투기나 도박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을 했다고 모두 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가속시키는 외형을 가능한 버릴 수 있어야한다.


2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은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격노시킬 것을 아셨으면서도 이일을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교훈과 훈계, 명령등으로 고쳐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를 잉태시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단 번에 주신 선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고통을 수반한 기나긴 과정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한 것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격노케할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러한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보고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로마라는 세상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이스라엘을 확장시키신 분이시고, 그에게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사단의 궤계일 뿐이다.


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이 어떠한 이들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본질적이고 체질적으로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품으신 것이다.

이러한 목이 곧은 백성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담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에게서는 구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기에,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아무런 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2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모세의 중보 사역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있는 것이다.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사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성의 숫자이다.

죄와 관련되어서는 죽음밖에 없기에, 사십 주야의 금식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세의 사십 주야의 금식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임하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십 주야를 죽음을 담보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동일하게 죽음을 담보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중보 사역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립에는 모세의 중보가 있었듯이, 현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중보자가 없었더라면, 멸절될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어디있겠는가?

부정적 상황을 대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기에 바쁘다.

금식하면서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이기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면서, 결코 정죄하기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과정이다.

구속사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있다.

언약 신학은 성경 전체를 보는 틀을 제공해준다.

언약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시작으로, 아담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 그리고 새언약으로 결론이 난다.

이러한 언약들을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달리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여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며, 나머지는 부차적인 주제일 뿐이다.

개혁주의에서의 중심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모든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며, 행위 언약의 개념을 배제한다.

존 머레이도 이에 동참하면서, 개혁주의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단성을 가진 페더럴 비전이 탄생하기도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아담 언약이 재연되었다는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를 심각하게 반대한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새언약을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논리는 합당하다.

인간적인 논리이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리이다.

인간에게는 쉽게 저주하는 속성이 있는데, 중보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온유함을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의 생각과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먹히는 신자들의 행태를 깊이 생각해보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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