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18. 22:14

신명기 8장 11-20절 말씀 묵상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면 당연한 것이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분명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인간은 스스로 잘못된 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인데, 인간은 자신이 왜 죄인인 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나쁜 짓을 하여야만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시면서, 인간에게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그 문제의 원인을 찾게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문제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하게될 때 자신들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하는 말씀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러한 문제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한다는 끊임없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지 않는 한에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통로가 된다.

인간은 궁핍할 때는 아쉬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일단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 가운데 거하게되면 더 이상 공급하시는 이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왜 어려운 일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불편하며,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고있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인간이 가장 위험할 때가 풍요로운 때이다.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는 풍요에 있다.

한국 교회는 수십년 전에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 교회의 타락이 일차적으로 풍요로 인한 것임에도,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동일시하게되었다.

어려움과 환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의 저주와 동일시하면서, 성도를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가기도한다.

어느덧 교회는 욕심을 채우는 통로가 되면서, 세속적 욕심에 물든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다.

목회는 세속적 성공의 통로가 되면서, 신학교와 교회가 변질되어버렸다.

로마 카톨릭이 이를 증명해 주었는데도, 한국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개혁주의를 외치면서 실질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욕심의 굴레로 빨려들어가고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이라고하더라도 전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인식하면서,  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되어야한다.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특히 성공한 이들은 자신이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성공한 대형 교회 목회자 가운데 교만하지 않은 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의 사시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알아서 행하였다.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죄책감과 의무감을 감당하며 살아 갈 수가 없다.

인간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리적 현상이지만, 이러한 본능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광야를 지나는 동안의 수 많은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면서, 직접 훈련을 시키시는데도, 인간 속에 자리잡은 고집과 저항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상적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을 지나게하심으로서 오직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 많은 훈련이 과연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는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가 불가능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훈련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다.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낮아져야한다.

높아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기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께 의존할 수가 없다.

교만한 자에게 믿음의 대상은 자신인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외적인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강화시킨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인간이 추구하는 외적인 확장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붕괴 속도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동안 교회가 외적인 확장에 있어서 세계 최고임을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교회가 성장한 곳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높아져서 변질된 곳이 되었기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곳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곳이 되어버렸다.

교회는 많은데 정녕 다닐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교만을 질타하였다.

교만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외적인 풍요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과시한다.

외적으로 확장된 교회의 목회자는 어김없이 자신이 숭배를 받으려한다.

유명해지면 어김없이 타락하는 목회자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된다.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잘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이 있었으며,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약속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공동체의 속성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에 속하여있으면서, 공동체적 책임을 감당하여야한다.

인간은 조상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후손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상과 후손의 모든 운명은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도에게 주시는 능력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주신 선물이다.

성도는 언약 안에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예민하여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을 드려야한다.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은혜 언약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축복만이 약속되어야한다.

모세가 말하는 우상 숭배에 따른 멸망은, 행위 언약의 속성 가운데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지만, 모세 언약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행위 언약을 배제하고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나, 율법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만 보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울법주의는 모두 개혁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 개념이 배제된다면,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개념도 배제되며,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이 배제된 페더럴 비전과 같은 복음의 왜곡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에 대하여 멸망이 약속되어있는 행위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며, 아담과 달리 이미 타락한 백성이기에 은혜를 예비하는 백성일 뿐이다.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실행할 마음과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질 때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낮아져야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된다.

인식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은 어떠한 행위로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이어야한다.

오직 충성만으로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된다는 메튜 베이츠의 주장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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