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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1 :: 로마서 1장 4절 묵상
로마서 1장 4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은 성결의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망의 권세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심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속하신다.
성령은 처음 창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여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처음 창조의 주체이시며, 창조된 세계가 완성되기까지 주체가 되신다.
창조 세계의 완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임하게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심으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죽음의 땅 위를 운행하시면서 처음 창조 사역을 진행하셨다.
홍수의 물을 마르게하셨고, 홍해의 물을 가르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품으셨으며, 참 이스라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다.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있던 세상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일으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신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극치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성령은 신자를 거듭나게하신다.
신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
거듭난 신자는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않은 새로운 창조물이다.
신자의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원적인 변화다.
존 머레이는 이를 결정적 성화라고 표현한다.
결정적 성화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지속적인 간섭하심을 통하여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된다.
변화시키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삶을 멀리하여야한다.
교회 안에서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거역하는 것이다.
기복신앙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모양만의 신자들의 모습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은 대부분 거듭나지 않은 모양만의 신자들이 육신의 소욕을 쫓아감으로 인한 것이다.
성도는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부활될 것을 소망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이 죽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인간의 죽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에게 임하는 마땅한 결과이지만,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가 아닌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에게 육신의 죽음은 마땅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시지 않으셨다면 이 땅에서 영생하실 자격이 있으신 존재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다음은 심판이 있게된다.
이미 육신이 죽은 인간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택함받은 자에게 가해질 정죄를 짊어지시며 최후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은 육신이 살아있는 성도뿐만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에게까지도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해주시는 능력이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성도에게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힘이었다.
아담은 범죄한 날에 죽었다.
바빙크는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수백년을 더 살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육신만 살은 것이었을 뿐이며, 실상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로 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육신이 살아있다고하더라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택하신 자를 대신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될 성도들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성도는 비록 육신은 죽을 것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의 공로를 전가받음으로서, 완전하게 순종한 자로 여김을 받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을 약속받았다.
(부활하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혼돈에서 질서로, 무에서 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능력이시다.
성령의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순종을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성취하셨다.
완전한 순종을 이룬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상급을 누리게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케하신다.
성도의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 뿐이다.
성도의 이 땅에서의 육신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의 세계에서는 성도의 처음 부활이다.
성도의 두번째 부활은 하늘과 땅이 연합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에게 육신의 죽음은 이 땅의 관점에서는 슬픔과 이별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처음 부활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담 안에서의 정죄에 대한 죽으심이기에 성도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나무가 되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신자에게 부활을 허락하신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으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차단되었던 길을 다시 열어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나무의 첫 열매로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더 이상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될 것이다.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에는 성령의 함께하심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심으소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을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성령의 함께 하심의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은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행위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미 범죄한 아담은 더 이상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시기에,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를 이룰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 오셨기에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는 처음 아담보다도 더 많은 요구가 있었다.
처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까지도 담당하셨던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은 처음 아담에서와 달리 두 가지로 성격이 구분지어져야했다.
하나는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 즉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 즉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이루신 수동적 순종으로 나뉘어야한다.
죽은 자는 스스로 부활할 수 없다.
스스로 부활할 능력이 있다면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완전한 순종에는 처음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공로에 대한 상급을 누리게하는 성령의 역사였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게 행위 언약이었다.
영생은 행위 언약에 대한 상급이었기에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도 장차 누리게될 하나님의 축복이다.
처음 아담의 대표성 만큼이나 둘째 아담은 성도를 대표한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모든 인류가 죽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취득하심으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영생의 복을 누릴 것이다.
영생을 얻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물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화의 삶을 사는 성도는 주변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은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신 다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들이 되기 위한 조건은 순종이었으며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마치 아들이 아빠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는 조건적인 것이었다.
순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순종이 없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유지될 수가 없기에, 아들로서의 아담에게는 당연히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에 담겨있었다.
행위 언약의 조건을 수행하지 못한 아담은 아들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아들의 자격은 순종을 전제로한 한시적인 것이었으며,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러야만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셨지만(출 4:22),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에 아들이 될 수 없었다.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 부르심을 받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아들로 선포 되셨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선포되신 것은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달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신자의 거듭남은 성령의 창조 능력의 결과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맏형이 되시기에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참여하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능동적 순종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가 다 충족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포된 아들은 아니었다.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들로 선포되지는 못하였다.
아들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순종이라는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둘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요구는 다 같지가 않았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되었던 순종은 이스라엘과 달리 죄가 없으셨기에 불가능한 순종은 아니었지만, 처음 아담과 달리 죽음을 요구하는 최악의 순종이었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아담에게 선택의 능력이 있었던 자유 의지가 있었던 상태였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자유 의지와 순종의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누군가 자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구원자의 필요성을 깨닫게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깨닫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아담과 달리 대적자들을 상대하시면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초래된 죽음의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담당하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택하신 자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수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한 율법의 요구를 모두 다 충족시킨 능동적 순종도 담겨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수동적 순종만을 전가받는다면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도 없다.
어떤 이들(대표적으로 페더럴 비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동적 순종의 개념에서만 이해하고 능동적 순종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부정한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들은 성경의 어느 곳에도 예수가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기록이 없다며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한다.
십자가에는 죄의 형벌인 수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죄인을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능동적 순종이 담겨있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음을 전제로 한다.
능동적 순종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임을 전제로한다.
물론 율법에는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이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신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택하신 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율법은 사랑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앞에서 더 이상의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율법의 기능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기에 율법을 다 지키면서 율법의 기능을 계속하게하는 것보다도 더 차원이 높은 것이다.
울법이 살아있어 기능을 계속하는 한에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이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그 역할을 다 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정하는 것이며,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형벌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새관점은 아들의 신앙이 아니다
새관점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택한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인정하지 않기에 신자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는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윤리적 규범으로 적용함으로서 신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하게한다.
새관점에서는 아들의 신앙을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요구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또 하나의 행함의 과제를 주는 분이며,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톰 라이트는 분명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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