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4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5.28 :: 신명기 14장 22-29절 말씀 묵상
  2. 2018.05.27 :: 신명기 14장 1-21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28. 22:14

신명기 14장 22-29절 말씀 묵상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가나안이 하나의 자립적 공동체의 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만을 먹었기에, 땅에서 수고하고 소산을 먹는 것은, 직접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인간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은, 과연 인간을 대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지 점검이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를 제대로 완성시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과제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에 적합한가에 대한 검증의 매개체가 되기도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는 신정체제라는 제도적 이스라엘의 기반을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제도적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향하는 그림자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 안에서 구현되어야만 했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손상됨과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궁극적 목적지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의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기 위한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어야하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십일조이다.

십일조는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의 복합성의 유지를 위한 것이다.

십일조는 나눔의 원리가 적용되며, 십일조는 자신의 소산에 문제가 안될 정도의 나눔의 몫이 정해진 공동체의 운영원리이다.

십일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적 원리의 표현 방식이다.

구약에서 십일조가 성전을 중심으로한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면, 신약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한 교회공동체의 틀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가나안에서의 십일조가 외형과 형식을 갖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제라는데 수직적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듯이, 신약의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중심으로한 각종 헌금이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만큼이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여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이 없는 십일조의 강조는,  교회가 세상의 경영원리를 따르는 세상적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국가에 바쳐지는 조세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용되어지지만, 신정체제를 이룬 가나안에서 바쳐지는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십일조를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만 먹어야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 모여서 여호와의 강림하심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며,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가리키고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바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는 곳이었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교회 공동체에서의 식탁 교제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유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한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한 유형의 교회는, 교회의 틀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문제를 안고있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있는 유형의 교회는, 십일조가 주로 외적인 교회의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지고있다.

도시 교회는 공동체 내에서의 수평적 교제가 약화되면서 십일조는 강화되는 왜곡을 수정할 과제를 안고있다.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십일조를 먹고 즐거워하는 곳은 반드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되어야한다.

아무 곳에서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만의 즐거움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 거리가 멀어 소산의 십일조를 옮길 수 없을 경우는, 돈으로 가지고 가서 필요한 것을 구입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려를 악용하여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 중심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기보다는, 외적인 형태만 남기고 자신들의 목적으로 악용한다.

가나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담아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만한 능력이 있는지 검증하는 곳이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멀면, 이를 핑계로 십일조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는, 인간의 입장을 배려하심이면서 동시에 핑계거리를 차단하기 위하심임을 알 수 있다.

돈으로 성물을 사는 것이 허용된 근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불필요한 고생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하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인간은 이마져도 악용하며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이 중심에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은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따르지 않는 형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외식과 허영, 욕심등으로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어 성전을 청결케하신 것은, 인간은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그릇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도적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만인제사장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면서, 제사의 개념 대신에 예배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비록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지만, 목회자는 전임 사역자로서 성도들이 필요를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의 일원이 책임을 져야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구성되어있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성된 것이다.

최초의 나눔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시작된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일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생은 이 세상을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고아이며, 신랑되신 예수님이 필요한 과부의 인생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고아이면서, 나그네요, 과부인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감당하신 것이다.  

공동체적 책임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도우심을 베푸시는 것이다.

성도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교회공동체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적 희생을 돌아보는 행동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27. 22:22

신명기 14장 1-21절 말씀 묵상

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3  너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4  너희가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름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가 흰 노루와 뿔이 긴 사슴과 산양들이라
6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0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함이니라
11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으려니와
12  이런 것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  까마귀 종류와
15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6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9  또 날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20  정한 새는 모두 너희가 먹을지니라
2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부정한 동물을 먹지 말라는 이유)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패시키는 것이 외부에서 침입한 것인지, 아니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원인을 찾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부패가 아담의 죄가 전가됨으로 인한 인간의 본질적 내면의 부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과 집단성으로 말미암아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이에 반대하여, 아담의 죄의 전가로 인한 인간의 본질적 부패를 주장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신학의 차이는, 인간이 본질은 깨끗한데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부패했느냐, 아니면 인간이 내면의 본질로부터 죄성을 가지고있느냐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성결은, 나중에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부패할 때 외부의 환경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내적으로 이미 부패해 있었느냐를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같다.

이스라엘의 부패의 원인이 외부의 원인에 의한 것이라면, 외부의 환경을 바꾸어주면 해결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부패의 원인이 내부에 있는 것이라면, 외부의 환경을 바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내부의 환경, 즉 거듭남이 요구되는 것이다.

전자가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온 처방전으로는 대표적으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을 들을 수 있다.

새관점은 인간이 부단한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출발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정통 개혁주의의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부정한 동물에 대한 금지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부패가 음식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부패했기에, 더 이상 이러한 구분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에서, 큰 보자기에 싸인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않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를 통하여 가이사랴 지방의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게하는 역사를 통하여, 철폐하신 것이다.

여기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의 철폐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음을 보여준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음식법은, 이방인과 구별되기 위한 거룩함의 일부분였지만, 이스라엘을 더럽게할 수 있는 요소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식교에서는 정한 음식의 생물학적 특성, 그리고 부정한 짐승들의 먹이사슬과 영양 성분, 그리고 정결함의 문제등을 언급한다.

물론 안식교인들의 주장도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거룩함을 위한 분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타락한 후에 저주를 받은 생태계는 타락 이전의 생태계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뱀도 저주를 받아서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타락 이전에 생물의 죽음이 있었느냐의 논란도 끝나지 않은 논쟁 가운데 속한다.

타락 이전에는 초식 동물만 있었느냐?

아니면 육식동물이 타락 이전에는 초식을 했었느냐?

유신론적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타락 후에 짐승들의 식습관에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표상으로서, 타락 이전의 모습에서 순종의 요구가 충족된, 에덴에서의 목표가 성취된 곳이어야만 한다.

타락 후에 저주를 받은 생태계의 변화 가운데에, 짐승의 생태계가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추측해본다.

앞장에서는 가나안에서의 거룩함을 유지 하기 위해서, 이방 족속들의 우상 숭배의 문화가 유입되지 않도록 철저한 정결함이 요구되었듯이, 음식을 섭취함에 있어서 죄와 관련된 좋지 않은 모습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구별된 식생활에도 불구하고 타락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자신들의 부패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었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부적 상황을 아무리 깨끗하게 해도 그 안에 내면 깊숙히 부패되어있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들은 깨끗해 질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 11)”고 말씀하신다.

가나안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필요한 모든 조치들은, 그들의 부패가 외부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상황의 문제임을 드러내는, 실험실적인 증명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적 증명을 통한 결론은,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타락한 정도는 외부적 환경을 통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즉 거듭남이 없이는 근본적으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의 외부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사역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의 철폐는, 더 이상 외부적 상황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며,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의 철폐도 마찬가지로 외부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니 더는 음식을 통한 구분으로 거룩해지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부패함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내면의 더러움을 지적하신다.

겉으로 깨끗한 척하는 외식하는 바리세인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비난하시면서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선택받은 백성과 이방인의 차이는 선택받았다는 것 밖에는 차이가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은, 과연 인간이 깨끗함을 유지 할 수 있는지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다해봄으로서, 더 이상 외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들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꾀맺추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단지 실험적 선택일뿐, 죄인으로 증명된 사람들일뿐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잘못이, 음식법, 할례법, 제사법을 이방인과 구분하기 위해서 교만하게 사용하였다는데 있다고 하지만, 이는 전혀 본질이 아니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는 음식법은 궁극적으로 더러운 것이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유대인들 내면에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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