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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9. 23:25

신명기 15장 1-23절 말씀 묵상

1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

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매 칠 년 끝에 면제해 줄 대상은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려면, 서로에 대하여 빚진 관계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나안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다.

안식은, 모든 과제가 완성된 곳에서 이루어진다.

안식은 창조주로부터 시작된 창조 사역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께 두 가지의 빚을 졌다.

하나는 에덴에서 주어진 통치명령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 선고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있으며, 주권자는 피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피조물은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창조주의 요구 조건은 순종이다.

순종은 일종의 종속을 의미하기에 주권자에게 귀속되는 피조물의 표현 방식이다.

하나님께는 창조주로서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에 안식을 하셨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불순종한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대신 속죄 사역과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심으로서, 믿는 자에게 안식을 허락하심으로서 안식의 주인이 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충족시키신 하나님의 요구조건은 통치명령과 선악과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은 존재 자체에 주어진 통치명령의 과제로서의 빚을 감당하심 것이고,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여 마땅히 죽어야할 빚을 감당하신 것이다.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서 출발된 생활을 시작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선취하신 안식일은 주일로서, 한주의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일주일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일인 주일로부터 한 주가 시작된다.

토요일은 제 칠 년을 뜻하는 종되었던 수고의 끝으로서, 참된 안식일인 주일의 시작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빚을 청산하기 위한 종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안식을 누리는 삶이다.

제 칠년의 끝은 수고의 끝이며, 종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기초 위에서 출발되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 칠년의 끝에 빚진 자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가 주실 구속 사역을 통한 안식의 그림자이다.



3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되지 않은 이들로서, 그들에 대한 구속과 안식이 준비되어있지 않기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그리스도르르통해 성취될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기에, 이방인에게 이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제 칠년에 빚을 면제해주는 것은 단순한 사회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종종 사회운동을 하는 기독교 종사자들이 제 칠년, 혹은 희년에 가난한 자의 빚을 면제해주는 것을 사회에 적용하려고하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안식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말씀하심으로서 거룩한 진리가 남용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명령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한 한시적인 것이었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이 재연된 것이었지만, 에덴에서의 축복이 한시적 명령에 대한 영원한 축복이라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은 이 땅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나라를 예표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미성취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될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할 뿐이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명령이 에덴에서의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타락으로 인한 새언약을 예비하여야하는 명령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으로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이다.

조건적 축복의 성격을 갖는 행위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복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하는 조건이 달려있는 것이다.

인간은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 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신학 출발의 핵심으로 두었던 것은 올바른 관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패의 진행형의 상태였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끝내 거절하고 오히려 약속되지도 않은 이방신들의 복을 바랐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섬겼던 우상들은 풍요를 위한 신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된 통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음란한 신의 통치를 받기를 바랬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하여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을 연합을 뜻하는 남녀의 결합, 즉 음란을 일삼았던 것이다.

음란은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우상들의 신전을 중심으로 횡행하였으며, 우상의 신전의 여사제들은 바로 창기들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이미 간음한 자이었기에 간음과 음란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 되어버렸다.

여러 나라에 대한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 (창 1:28)을 통하여 제대로 실행되었어야했는데, 통치를 하여야 할 대상으로서의 생물의 일종인 뱀으로부터 속임을 당하여 통치를 받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사단의 통치를 받는 존재였음을 확인해주고있는 것이다.

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공동체의 일원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가난을 방치하게되면 가난한 자는 가진 자에 대한 원망이 쌓이게되며, 빈부 격차의 증가는 공동체성의 파괴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연합이라는 원리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의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가난한 자인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의 풍요를 인간들과 나누심으로서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셨다.

리스도의 나눔이 교회공동체를 이루셨듯이, 가난한 자에 대한 공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 연합을 위한 공평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풍요를 나누시는 대상은 모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한정된 것은,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나눔은 보편적인 자연법을 근거로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복음 전파의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세상에서 나눔의 원리를 실행하여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가나안에서의 나눔과 구제의 원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듯, 교회에서는 사회에 대하여 나눔과 구제를 행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사회에 전하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교회 건물의 확장 만큼이나 나눔과 구제를 실행하였다면,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일꾼들을 모으실 때 아침 9시에 온 자와 오후 5시에 온 자에게 동일한 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대상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심지어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경우도 있다.

나눔과 구제는 경제 원리로 적용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할 만큼, 나눔과 구제는 가진 자의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나눔은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 못지 않게 나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게된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은 자칫 상대의 인격을 손상시키며, 결국 불편한 관계로 서로를 멀리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된다.

도와주는 관계와 도움을 받는 관계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관계이다.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좀 더 지혜롭게 앞장선다면, 개인간의 나눔보다는 교회 차원에서의 나눔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인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자본주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개인보다는 교회가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공동체적 나눔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가 않다.

자식은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하기에 아끼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나눔을 통한 공동체적 사랑의 표현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할 자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던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나누는 자의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희생이 없는 나눔은 자칫 자신의 과시일 수 있기에, 사랑하는 자를 위한 희생은 가장 고귀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과 다시오심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과 육신이 거하는 땅의 연합으로 완성된다.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는, 이 땅에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이 땅이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참여되어있지 않았음을 표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 땅에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손을 펼치는 것은, 천상의 풍요를 이 땅의 가난에 대하여 손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2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일곱째 해에 종을 놓아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이 이 땅에서 종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것이었음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13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14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나왔다.

종에서 해방될 때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단에 빠져들었던 어떤 교수는 자신이 공부하던 책들을 전부 불태우고 이단교회의 목사가 된 이도 있었다.

이는 잘못된 극단적인 이원론 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닦아 놓았던 것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어도, 성도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맺던 세상의 산물을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사용하여야한다.



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핵심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과 하나님의 명령의 수행이었다.

성경의 주요 주제는 종에서의 해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종에서의 해방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한 개념이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노예 의지 개념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새관점주의자들이 무척이나 싫어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 할 수가 없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증명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시고 증거를 보여주시고 간섭을 하셔도, 인간이 행함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하는 것이 노예 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노예 의지를 가진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고 성령의 내주하심만이 노예 의지에서 벗어나 거듭난 자로서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16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17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자유를 얻은 성도는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기를 즐겨하여야하며, 공적으로 이를 증거하여야한다.


18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섯 해 동안의 섬김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충만한 기간의 순종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받은 성도가 자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19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처음 난 것은 그 다음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

처음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모두는 타락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20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 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성막은 시내산의 모형이었으며, 성막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성되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성도들이 같이 먹으면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시내산 앞에 모인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궁극적으로 성도의 교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면서 완성될 것이다.


21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으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흠없는 성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같다.

그리스도가 흠이 있으신 분이시면 우리를 대신할 구속주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흠이없게 창조하셨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었지만, 모든 문제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서 시작된 것이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흠이 있는 존재들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불결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성물로 드려질 수가 없다.

대속을 위한 속죄물은 그 자체로 흠이 없어야 대속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22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 같이 할 것이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질에 있어서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부정한 자이기에, 표면적인 부정함은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23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피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기에, 거룩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정한 자이기에 거룩함이 없이 생명에 참여될 수 없는 존재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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