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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9 :: 요한복음 1장 6절 말씀묵상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신구약 중간기의 종료
하나님께서 요한을 보내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오랜 침묵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400여년의 계시의 공백은 더 큰 일을 위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길 원했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상태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어 버리신 백성과 같았다.
스룹바벨 성전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초라하기만 하였다.
그나마 초라한 성전은 온갖 모욕을 겪어야만 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성전에서 돼지고기로 제물로 바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기도하였다.
이는 결국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된 동기가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수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지속되었다.
격동의 시기에 침묵하신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을 버리신 모습같이 보였지만 이는 어둠의 땅에 이르시는 빛을 위한 시간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준비하시는 시간이었다.
보냄받은 요한과 하나님의 주권
요한의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은 요한의 역할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사신을 보낼 때 사신의 권위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낸 왕에게서 나온다.
사신에 대한 도전이나 사신을 해하는 것은 그 보낸 왕과 그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요한을 죽인 헤롯왕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께 찾을 수 있다
처음 왕으로서의 아담의 역할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으로서의 권위가 주어진 것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보냄받은 사신이 자신을 보낸 왕을 배신하는 행위와 같았다.
불순종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다시 보내신 것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되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배경에서의 요한의 역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의 오심은 처음 창조 때와는 달리 잃어버린 왕국의 회복에 있었다.
요한은 모세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였지만 요한은 이제 현실적인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구분된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이라는 잃어버린 이들을 찾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원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상대하지 않으셨으며, 여인이 더욱 소리를 지를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4, 26)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거절한 사건은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꺽이는 사건이었다.
이방인인 우리 신자들은 꺽이운 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로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성도의 자세
가끔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을 하다보면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된다.
들을 준비되어있지 않은 이들과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도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고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종종 깊은 죄절에 빠지게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내어버리시지는 않으신다.
침묵의 시간은 자신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시간이다.
우리가 느끼고 알지 못할 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내어버려 두시지는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가 약속의 이삭을 경험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약속하신 이삭에 대한 희망을 기다리지 못하고 86세에 이스마엘이라는 불신의 결과를 낳기도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어지는 오랜 침묵의 시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의 400년의 침묵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말씀 가운데 침묵하시는 2000여년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하는 이 시간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온 시간임을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침묵과 간섭하심
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한다.
관상기도나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려하지만 이는 인간적인 생각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간섭하심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 대한 구속과 완성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400여년의 침묵하심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성도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에 대한 침묵하심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신구약 중간기의 이스라엘은 어둠의 시기였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말씀이 주어진 빛의 시기를 살아가고있다.
말씀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을 원하는 성도의 간절함은 종종 여러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없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말하지만, 이는 대부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다.
인간은 어둠 가운데 죄성에 길들여져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추구는 종종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된다.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예민한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섭리에 대해서 민감할 필요가 있지만,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종종 오류를 범하기도한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인간은 삶 가운데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에 대한 인식도 없는 경우가 많이있다.
하나님께 민감하는 것 이상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볼 때 더욱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게된다.
컴퓨터가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에 의해서 작동되듯이 인간은 어둠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동되는 본성을 가지고있다.
아직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하며, 이를 보편화시켜서는 안된다.
죄인은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포장할 때 자신이 멋있어 보인다.
요한의 증거는 하나님의 보내심이라는 근거가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침을 포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도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많은 이들이 성경으로 자기의 정의감을 포장하기도하지만, 그 자신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근거로 정의를 외치고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상황에 대하여 간섭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원하고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사역에 간섭하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들은 치유사역을 자랑하기도하고, 여러가지 간증을 하기도하지만, 정작 이들이 증거하는 말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지 의문이 가기도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근거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지만, 자신을 증거하려하지 않았다.
오직 빛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성도는 위로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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