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1장 18-32절 말씀 묵상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으면서 내면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면서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외적인 변화를 추구할 뿐,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불행만 낳을 뿐이다.
쉐마 방식의 규제는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죄 가운데 절망에 빠지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율법과 달리 복음은 인간의 근본을 바꾸어 거듭나게하는 것이다.
윤리 실천적 접근 방식은 근본이 거듭난 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무력한 대안일 뿐이다.
윤리 이상의 율법으로도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이 윤리로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더 이상의 윤리나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다.
교회의 영역에서 생기는 도덕적 문제는 주로 거듭나지 않는 이들의 문제일 뿐이다.
거듭난 이들은 설령 범죄하였다고하더라도,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잘 지키고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킨만큼 형통한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 이전에 보편적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가지고있다.
성공한 유대인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말씀이 가지고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혜의 원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유대인의 전통은,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성공한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그들의 삶을 고착화시키고있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교만한 삶은,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씀의 의도하는 바와 말씀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때문이다.
신명기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한다는 것보다는, 다윗과 같이,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은혜 이전의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창조 원리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법적인 원리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죄를 드러내는 자리에 임하게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도를 윤리 규범 안에서 바른 생활을 하게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으로 고발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장수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연법의 원리에 속해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아직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지는 않는다.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주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운영하시는 원리이다.
십계명이 자연법의 모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십계명에 창조주의 가장 근본적인 창조 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원리로 적용이 된다.
복음은 자연법을 거스리지도 않으며, 이를 대적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받았다고 자연법이나, 일반 상식을 무시하거나 경히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한다.
자연법과 상식이 무시되는 교회 생활은 사회의 지탄이 되면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하는 조건적 축복이다.
축복과 저주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저주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 안에 담겨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삶의 원리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상적 접근은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올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행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기보다는 이를 애써서 외면하면서 주변국의 도움을 청하곤하였다.
현대인들도, 상황과 환경의 어려움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한 가지이다.
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말씀이 어느 정도 지켜졌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한시적인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이스라엘 분열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의 분열의 원인이 르호보암에 있기 이전에 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다.
나타나는 현상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현대인들은 그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한다.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모세는 신명기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본론을 언급하고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에 따른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음을 말함으로서, 모세 언약이 전형적인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음을 보여준다.
모세 언약의 가장 기본되는 골격은 아담 언약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이기에, 은혜의 요소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전적인 행위 언약이며, 모세 언약은 타락한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기에, 은혜 언약의 요소가 담겨있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아담 언약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기도하지만, 이는 아담 언약이, 창세 전 구속 언약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 은혜 언약에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언약을 자체의 속성만으로 볼 때는 아담 언약이나 모세 언약이나 동일한 행위 언약이기에,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재연 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이 오직 은혜 언약이라고 주장하지만,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본질substance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지만, 표변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고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검증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시험에 응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들을 은혜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덴이 안식이 성취되지 않은 장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은 안식이 성취된 장소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으로서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가나안이 은혜의 장소이며,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주장인데, 이는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요구되는 장소에는 적합하지 않은 주장이다.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사역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보는 복음은 윤리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새관점을 좋아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설교는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이들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삶의 형태를 바꾸는 윤리에 불과할 뿐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결코 안식이나 은혜의 개념 가운데서는 설명될 수 없다.
비록 안식이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였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조건이 주어지기에 참된 은혜와 안식은 아닌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이나 은혜를 예표할 뿐이지, 그 자체로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왜 기필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야만 했는가?
가나안 땅은 에덴의 유형적 재연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불순종을 재연시킴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불순종을 재연시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에덴에서의 아담과 차이가 있다면,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인류를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가나안이라는 무대에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연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불리워졌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으며, 양심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명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야할 영원한 나라를 예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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