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2017. 12. 29. 14:17

에스더 6장 14절- 7장 10절 말씀 묵상


14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
하만의 몰락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죽음의 문제)


유대인들은 부림절이 되면,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하만과 모르드개의 상황의 역전에 축배를 들면서, 취하도록 마시며 축제를 즐긴다.


상황역전은 인생 모두에게 승리감을 전해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부림절을 금했으며, 오히려 부림절과 관계하여 더 많은 핍박을 가하기도하였다.


만약에 페르시아에서 모르드개와 하만의 상황의 역전이 없었다면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왜 하나님께서는 히틀러에게서 유대인들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을까?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하나님과 부림절에서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 아니신가?


왜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해놓고서, 왜 구해주시는가?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읽고 즐거워하는 유대인들이 그냥 단순하게 즐거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부림절은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한낱 인간적인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부림절과 같은 역전을 희망해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마땅한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역전은 누가 더 정의롭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다 죽음이라는 운명에 직면한다.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고 누구는 수명을 다하고 죽고, 누구는 편히 죽고 누구는 비참하게 죽고, 누구는 정의롭게 죽고 누구는 억울하게 죽고…..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지만, 어떠한 죽음이던 간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하다.


다양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죽음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죽음이다.


죽음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문제는, 사는 동안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느냐, 아니면 영원한 분리로 확정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사단의 패배)


하만이 몰락하는 상황은 사단의 패배와 유형적으로 유사하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시던 장면이 연상된다.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간청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함인 것이었다(요6:39).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에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다.


마치 왕후 에스더가 왕의 지위와 권력으로 하만을 직접 징계 할 수도 있었지만, 에스더는 왕에게 간청함으로서 왕이 직접 하만을 처단 할 수 있도록하였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와 유혹을 물리치심은 사단에 대한 승리로서 사단의 추락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예수 그리스도께서 70인을 세우시고 각 지역과 동네로 둘씩 앞서 보내신 후에, 70인이 귀신들도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광야에서의 시험과 유혹에 대한 승리로 귀신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상황의 역전으로 나무에 달린 하만은, 마치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사탄과 같았을 것이다.


사탄은 에덴에서 아담을 시험하여 선악과를 먹게함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사탄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로 유혹을 하였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예수님께 패배를 당하였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에서의 아담과는 달리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을 하신 후에 자신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첫 번째 아담에게는  통치명령이(창 1:28) 주어졌으며, 통치 명령의 대상에, 간교한 뱀을 포함하는, 모든 생물(창 3:1의 들짐승의 짐승과 창 1:28의 생물은 같은 용어)을 다스리라고하였지만, 아담은 오히려 생물인 간교한 들짐승의 다스림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사탄은 더 이상 예수님을 유혹할 수도 없었고, 지배할 수도 없었기에, 이 세상 권세자로서의 위치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이 왕을 속였듯이 사단은 속이는 자로서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거짓말을 하였지만 그의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고있다.


현대인들은 환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진리인 것은 말씀만이 참된 구원을 전하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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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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