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2017. 12. 29. 14:15

에스더 5장 1-14절 말씀 묵상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금식을 마치고 왕앞에 나아감)


금식을 하면 오히려 힘도 없고 혈색도 안좋고 기운도 없어서 왕 앞에서 제대로 행동을 할 수가 없었을 텐데 에스더는, 자신 뿐만이 아니라 수산 성의 모든 유다인들에게 삼일간의 금식과 기도를 부탁한 것은,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방식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겪게되는 어려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이기에, 인간적으로 힘써서 해결 될 수가 없다.


신자가 취하는 삶의 방식은, 자신의 힘보다는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왕후의 예복)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은 것은 왕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성도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분만이 가능하다.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으신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지 않다면, 속죄 사역은 불가능 할 것이다.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에스더는 뜰에 선 후에 금 규 끝을 만짐으로서 죽음을 면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도 거룩함이 없이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죄인은 죽을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셔서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보좌에 앉히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셨다는 표시이다.


에스더에게 내민 금규는 왕의 용납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한을 나눌만큼의 지위와 권력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이제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와 능력으로 성도를 위해서 새 창조를 이끌어 내시는 것과 같다.


왕과 왕후와 모르드개의 위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에 비유 할 수는 없지만, 이와같은 상황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 땅에서의 역할극으로서 연출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왕과 동시에 하만을 초청한다.


그의 위치는 왕과 하만을 초청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간 것은 하만의 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듯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구속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죽이고자하는, 사단의 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만은 왕과 함께 초청됨으로서 모르드개와, 더 나아가 에스더를 함께 멸할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회에 참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제껏 마음대로 세상을 휘둘렀던 사단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일 생각을 하였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패배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단은 자기가 죽인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10  참고 집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어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
11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12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13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하니
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모르드개의 착각은 사단의 착각과 유사하다.


유다인들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해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함으로 자신이 승리하리란 착각을 하게된 것이다.


왕과 왕후와 모르드개, 유다인, 그리고 하만의 역할은 성부, 성자, 성령, 성도, 그리고 사단의 배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개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많은 부분 유사성을 띄운다.


왕의 절대 권력과, 사랑받는 자로서의 에스더의 깊고 지혜로운 처리방식,고통 가운데 슬피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모르드개, 막연하게나마 고통 가운데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유다인들,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진 하만의 역할이 극이 아닌 실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이러한 일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심은, 유다인들에게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알리고자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위로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나가는 말- 서있는 자의 교만)


하만은 즉석에서 결과를 보고자하지만, 에스더는 하나님의 간섭하시고 역사하심을 참고 기다린다.


하만은 표면적으로 일을 진행하지만, 에스더는 깊고 본질적인 면으로 접근한다.


하만은 보이는 상황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지만, 에스더는 보이지 않게 겸손함으로 내실을 기한다.


사단은 단수가 낮지만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단은 하나님 보다 한참이나 하수이지만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모른다.


지혜로운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며 겸손하지만,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자랑한다.


더더욱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다.


기도는 자랑할 수 없는 것이며, 더군다나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페북이나 SNS로 장사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장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사람에게서 인정받으려고 온갖 좋은 것은 다 동원한다.


페북으로 장사하는 사람은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장사하는 사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다.


하만이 자신의 정당성과 마음에 불편한 것을 공개적으로 떠벌인 것에 비해,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잠잠하였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께도 인정받는 사람일까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페북으로 장사하는 사람 가운데는, 하만과 같이,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테러를 가하기도 한다.


자신은 정당한데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정당화하면서까지, 비판하는 사람을 공개 처형하는 사람은 겸손하다고 할 수 없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공개 처형하지는 않는다.


페북에서 특정인을 공개 처형하는 사람은, 마치 하만과 같이 자신의 자존심에 손상을 가한 모르드개를 공개 처형하려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이는 하만이 자신의 높아짐을 자랑하면서 정작 마음에 안드는 모르드개를 해할 궁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거나 공격을 당할때 상대방을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지는 않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복수하는 것도 모자라 장대 높이를 20m보다도 높게 달아서 수치를 주려고하는 것과 같이, 공개적으로 얼굴에 먹칠을 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사명인양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른 이들의 부족한 점들을 애통해하면서 그들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한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상황을 들추어내면서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은,부정적인 상황이 없다하더라도 찾아가면서 부정적 상황을 들추어낸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 상황을 먹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하는 일의 성격이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도, 상대방의 부정을 통한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정죄하는 일이 없으면 자신의 소재가 없어진다.


이들은 가끔 자신에게 비판의 목소리가 가해지면 이를 참지 못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상대방을 공개사냥 해버린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끊임없이 정죄를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구약의 한계점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방식이다.


신약에 속한 사람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금식하여야한다.


금식은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방법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만에 대하여 시위를 하거나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다.


왕을 초대한 에스더는 그 다음날 어떠한 상황이 전개될지 알지를 못했다.


왕이 예전의 기록을 듣게될지도 알지 못했고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을 줄도 알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을 금식하며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란 확신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국교회가 변하려면 더 이상 정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욱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끊임없이 죄가 고발되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차이가 있다면, 죄에 대하여 처리하는 방식이다.


구약은 율법의 정죄에 놓여있지만, 신약은 용서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에,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해서 정죄 할 자격이 없다.


할 수 있다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뿐이다.


상황이 심각하면, 에스더가 수산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식하면서 기도에 동참하길 원했듯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이를 지속적으로 시행해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인간이 힘을써서 상황이 개선된다면, 이는 인간의 공로가 되며,  인간이 힘쓰는 방식이 점점 더 심해지며,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모든 부정적 상황에 앞서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모르드개와 에스더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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