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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2. 22. 20:46

사도행전 21장 1-16절 말씀 묵상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대성공이었고 이쯤되면 에베소에 선교 본부를 세울 법도한데,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더 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순교자의 길을 나선다.

이는 바울이 소망하였던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구체화하는 행동이었다.

바울이 보여주는 순교자의 여정은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가져야할 소망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행동으로서의 서신이다.

흔히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사명을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을 이야기하지만, 바울이 보여준 성도로서의 행동 방식은 자신을 지배하고있던 세상적인 세계관을 변화시켜, 온전히 천상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도록 자신을 천상의 하나님 나라로 귀속시키는 행동이었다.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권고하였던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리라는 것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내었던 것(마 16:22)과는 성격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 거짓된 영에 의한 것이기에,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자칫 성경의 기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 있다.

이들의 권고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면서 영적 분별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기에 관한 문제나 혹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연약함에서 비롯된 권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 제자들이 거짓 영을 받은 이였다면 바울과 여러 날을 교제하면서 그토록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듯이, 바울도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좀 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다가 적절한 시기에 올라가게되었다는 해석을 함으로서 성령의 간섭하심에 대한 충돌의 문제를 이해 할 수도 있다.

제자들의 권고는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가지는 불확실성을 없애고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강인한 마음을 준비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성문 밖까지 전송하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두로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이들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아니고는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들이 거짓 영에 의해서 바울의 여정을 막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상은 주로 이해 관계로 만나게 되지만 성도의 만남은 이해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하는 만남이 된다.

며칠 동안의 친밀한 성도의 교제는 같은 영 안에 있는 이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 구현되는 것이다.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예언하는 처녀가 주는 의미는 사뭇 신선하기도하지만 한편으론 당혹스럽기도하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사도 시대 선지자들의 역할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할 것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입장 표명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신약에서 성령의 간섭하심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 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바울의 띠를 가지고 예언을 한 것은 상황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을 위한 것이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실 수도 있으신데도 아가보 선지자를 통하여 부여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적 상황 인식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은 상황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상황에 대한 부담감을 가져야만 한다.

신앙 생활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경험 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이미 생명이 상실된 사망 상태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듯이 두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의 권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성도들의 권고는 바울의 생각과도 다르며, 하나님의 뜻도 아닌 인간적인 권고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끊임없이 육신의 평안과 영적인 부르심 사이에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권고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회 안에서 영적인 긴장이 없다면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울기 십상이다.

교회 안에서 말씀의 기준이 없어진 세상적 대화는 자칫 교회를 세속화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의 성도의 대화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예수를 위하여 죽고 자하는 바울이나 주의 뜻에 순응하는 제자들이나 한 성령 안에 있었기에 한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바울이 세상적인, 혹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다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였던 것은 성령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복음의 전파는 인간적이거나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길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본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세우는 교회의 외적인 확장이 인간적인 방식이 될 때에는 교회의 외적 형태가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바울은 여러날을 지체하면서 여러가지 만류를 통해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종종 상황의 더딤이나 반대 상황들은 외부의 문제이기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일 경우가 있다.

바울이 제자들과 지냈던 여러 날은 바울의 가장 담대하고 확신에 가득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바울이나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환란을 대비하는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이는 유대 땅에서 복음이 확실하게 전파될 수 있는 굳건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준비가 덜 된 바울에게, 두로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한 구절이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종종 성도들이 경험하는 어려운 환경이나 반대 세력들은 성도를 견고하게하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서의 경험하는 방해들을 사단의 계략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앞으로 감당할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강인함을 길러준다.

가끔 반대 세력들에 대하여 너무 전투적으로 대적하는 경우가 있다.

땅 밟기나 축귀 사역등은 자칫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에게 향하여있다.

너무 반대 세력에 집중하여 그들과 싸우는데 집중을 하다보면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다보면 자신은 선하고 외부는 악하다고보거나 아니면 관상 기도등을 통해서 이분법적 선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성도를 세우기 위한 일을 하시기에 성도는 외부의 환경보다는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동안 만났던 제자들의 모습은 이제껏 바울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결산의 시간이었다.

성도는 비록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지만 성도들 간에는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성도들 간의 만남의 기쁨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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