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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7. 23:03

사도행전 11장 1-18절 말씀 묵상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부분적인 사실의 위험성)

부분적인 사실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베드로가 경험한 고넬료 집에서의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였으면 예루살렘에서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바로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베드로도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야고보에서 온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할례자들이 왔을 때 두려워서 떠나 물러간 사건은 바울의 책망 거리였고, 베드로의 결정적 흠이 되었으며, 남은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되는 일이있었지만, 이는 아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기에 할례자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객관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항상 모든 면이 다 전달되어야 하지만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단편적이기에 서로간에 오해가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사랑이 식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만 말하고 듣고 싶어하는 부분만 듣는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면에서 총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톰 라이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 이야기 방식이고 메가스토리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야기 외에도 하나님의 명령과 지혜가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많은 명제적 진리들을 제공하며, 천상의 메타스토리도 포함되어있다.

항상 비유를 곁들여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톰 라이트의 뛰어난 언변은 단편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부분만으로 전체를 뒤집어 버린다.

톰 라이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마치 췌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지만 과연 그는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고있는지 의심해 보아야한다.

모든 이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분만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 시킨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 편협되고 부분만을 주장하는 습성은 종종 인간 사회의 분열과 싸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곤한다.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그래도 성령 안에 있던 초대 교회의 할례자들이었지만, 문제가 있을 땐 먼저 당사자에게 들어보아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난을 먼저하였다.

한 템포 늦추어서 듣는 것을 먼저하였다면 서로 간에 상처를 주지 않고 문제가 잘 해결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함으로서 서로간에 상처를 주게 된다.

문제가 있을 때는 먼저 듣는 자세가 필요하며, 대부분의 문제는 먼저 들음으로서 해결될 수 있기에 불필요하게 얼굴을 붉히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유대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초대 기독교)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아직 정경이 기록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정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의 할례에 대한 집착은 이들이 아직 유대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물러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바울이 서신서를 통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제대로 정립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율법에서 자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수용하기는 쉽지가 않았지만, 베드로의 증거와 이를 직접 보았던 여섯 형제들이 증인이었기에 베드로의 말을 거부하거나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톰 라이트가 보는 것과 같이 유대적인 기독교가 되었을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의 근거가되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문헌들은 다분히 지금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취하였던 유대주의적 요소들이 섞여있을 수 밖에 없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할례파 유대인들의 상황을 근거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근본 개념들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어거스틴 이전의 초대 교회는 교리에 대하여 제대로 정립이 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오늘날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새관점을 주장하는 톰 라이트는 어거스틴부터 기독교가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어거스틴을 비난하며 초대 교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있다.


4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의 간증)

같이 있던 할례받은 형제들이 있었기에 베드로의 증언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하였을 것이다.


사도들은 항상 같이 다니는 이들이 있었기에 공동체적 구원을 확장 시킬 수가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증언이 있었기에 계속된 이방인의 구원 소식에 대하여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이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의 증언은 앞으로 예루살렘이 복음의 중심에있지 못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없이 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전체 계획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복음은 지역적으로 제한되거나 집단적 이기주의의 수단이 될 수가 없다.

자기 교회만을 주장하거나 자기 교단만을 주장하는 폐쇄성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회심과 그의 열심은 좋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이 된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주하려는 죄성은 항상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기에 성도는 항상 떠남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독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길 원한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이들의 하나님이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할례받은 유대성도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감한 입장이었던 것 같다.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동안 자신들만이 가지고있었던 특권의식과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납득할 수 없는 신앙의 유형을 가진 이들 가운데서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교단만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집단이나 교단이 타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나만의 하나님, 혹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라는 이기적 생각을 내려놓을 필요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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