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2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5.25 :: 신명기 12장 20-32절 말씀 묵상
  2. 2018.05.24 :: 신명기 12장 1-10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25. 23:22

신명기 12장 20-32절 말씀 묵상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21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22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25  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
26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
27  네가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드릴 것이요 네 제물의 피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위에 붓고 그 고기는 먹을지니라

28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


피는 육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에, 피는 생명과 동일시 될 만큼 중요하다.

피는 손상된 조직을 회복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피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은 썩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피는 육적인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있다.

모세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영적인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신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광야에서와 달리 직접 살육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행함의 지침이 필요하였다.

가나안이 비록 안식의 땅이었지만, 가나안에는 살육에 의한 죽음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속죄제로 인하여 동물의 희생이 필요하였기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는 달리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죄와의 관계 가운데 정립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고기를 먹는 것 자체에 대하여는 비교적 엄격한 규율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피에 대하여는 분명한 지침이 주어진다.

피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은, 에덴에서 있었던 생명 나무와 연계시켜 볼 수 있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되었다.

그렇다고 동물의 피를 먹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기에, 동물의 피는 생명을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고하더라도, 단지 표상일 뿐이다.

약에서는 피를 먹는 행위에 대하여 엄격하게 금하고있는 반면에,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외에는 피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것을 본다.

신약에서는 피를 죄사함과 연계시키고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있는 피는 정결케하는 피이면서, 피흘림을 죄사함과 연계시킨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죄를 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피흘림보다는, 희생을 강조하지만, 그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하지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은 분명 속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에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한다면, 구약에서의 속죄제를 비롯한 피흘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를 먹지 말아야하는가?

성경에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있다.

노아에게도 고기가 허락되었지만, 고기를 생명되는 피째 먹지말도록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피를 먹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피는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잔에 담긴 포도주를 자신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성도가 성례에서 마시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성도에게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마시는 잔으로서의 피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지 말라고 금한 것을, 참된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기에, 성도는 성찬식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기념하며, 생명에 초대받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피는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하면서, 또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속죄제에 드리는 동물의 피로서는 사람이 깨끗하여질 수 없다.

속죄제로 드려지는 짐승은, 이미 타락한 피조세계의 한 존재로서, 사람의 죄가 안수를 통하여 전가되었기에,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피가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된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여 잔을 마시는 행위는 주의 몸을 먹고 마시는 행위이기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야한다.

고린도 전서 11장 27-30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잔을 마시는 행위는, 다시 생명에 이름으로서, 영적 자녀를 낳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피를 금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영구한 복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되는 축복과,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게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더불어,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자녀를 낳았어도, 이들 가운데 참된 생명이 있는 자녀를 낳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란 말씀은 획기적인 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인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후손에게 주어진 복은 피로 인한 생명과 연관되어있다고 생각된다.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가나안에서 피를 먹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안식교에서 피를 먹지 말라고하는 이유를, 피에 독성이 많다는 성분 분석에 의존하여 해석하고있다.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몸 속의 독성들이 피로 스며들어서 독성이 많다고 말한다.

이는 피를 먹지 말라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해석 방법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게 하실 때에
30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 가운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있다.

자녀를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욕심을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속성들을 지닐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24. 21:25

신명기 12장 1-10절 말씀 묵상

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성이 요구되기에, 인간적인 방식이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준수되어야한다.

이 땅에서의 삶의 영역은 가나안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자연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통치 영역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통치 영역이라는 두 나라two-kingdom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 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이 아닌 통치 영역에, 하나님의 구속 영역에서 요구되는 사항들을 적용시키는 오류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속 영역의 속성을 추구하는 가나안 땅에서 요구되는 방식을, 일반 은혜의 통치 영역인 삶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더 이상 인간적인 방식이 허락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요구되는 배타적인 곳이다.

인간적인 방식은 이미 타락한 자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배제와 포용은 인간 사회에서 항상 논의가 되어왔던 주제이다.

일반 사회에서 개인의 주관적 기준은 배타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배타성을,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인, 삶에 적용시킬 때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을 자신의 삶에 얼마나 적용하여야하는가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배타성은, 가나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되듯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나라가 아닌,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시켜야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타적으로 적용시켜야한다.

성도가 자신이 속해있는 일반 은혜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배타적인 행동을 하게될 경우, 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모형은, 오직 교회 공동체라는 범위 안으로 제한되어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범위를 확장할 경우, 또 다른 유형의 혼란이 생기게된다.

사회의 문화변혁과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Christianizing world 주제를 가지고있는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는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두 나라two-kingdom이 아닌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one- kingdom를 주장한다.

이들에게 배타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배타성은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배타성이다.

성도의 배타성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심의 산물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파멸시킬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들이다.

이는 옛사람에 익숙해있던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성도들이 제거해야할 방식들은 주로 인간적인 방식들이다.

이 가운데에는 인본주의나 자유주의 방식의 사고도 포함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역에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방식이 요구되기에,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해야한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 이외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들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근거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을 근거로하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해석에는 몇가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근거로 전통적 성경해석을 부정하고서, 유대주의적 성경 해석을 시도한다.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는, 주로 에센파를 중심으로한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였으며, 또한 해석에 있어서도 부분적이어서, 객관성을 상실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산물로서, 성경에서의 해석조차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전의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뒤집었다고는 하지만,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몰두했던 슈바이처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주제로 만든 기독교는 윤리 도덕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있다.

거룩함을 위해서는 윤리 도덕을 넘어서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필요하다.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인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에덴에서는 완전한 통치가 요구되었지만, 가나안에서는 이미 오염된 부분을 제거해야했다.

에덴과 달리 가나안은 과거의 우상 숭배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면에서는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청결작업은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청결작업의 실패는 성도가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령이 자신을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이렇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거룩한 모습은 성도가 참된 교회의 모형이 되며, 영원한 교회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살아가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청결 작업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이는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서, 성도는 더욱 겸손해져야한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적인 청결 방법으로서 참되고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원론만 제시할 뿐, 각론적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능이다.

우상과 우상의 제단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는 수단이었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면서 남녀가 성적인 문란을 합법화시킬 수 있었던 음란한 장소였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는 빌미로 온갖 악을 합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의 악행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우상을 따르게 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며,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간은 기독교 마저도 우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우상화된 기독교를 허물어버린 이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개신교는 개혁주의라는 기본 구조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부패될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우상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숙이 들어와있다,

현대인들의 섬기는 우상은 경제 활동 가운데 깊숙히 자리잡고있다.

국가의 행위의 정당성의 기준은 이익에 있으며, 현대인들은 경제가 모든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경제 원리는 합법적인 것이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합법화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경제 원리와 이익의 추구는, 하나님께 향하여야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사로 잡아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간다.

주식에 몰입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하고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동산으로 투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일상에서의 삶의  즐거움과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이익을 추구하는데 내어던짐으로서, 자신을 우상에게 얽어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주식과 부동산은 합법적인 자본주의 경제 원리이지만, 신앙 생활에는 치명적인 것이다.

투기와 도박은 제거해야 할 가장 심각한 우상 가운데 한 가지이다.



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려져야한다.

실제 사람들은 우상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뒤바꾸어 행하기도한다.

입시철에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교회가 우상에게 하는 것과 같이 행하고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이 모두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준비되어질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손 가운데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으신다.

타락한 이들 가운데 철저하게 구별되고 성별된 가운데 모든 조건이 충족된 곳에서만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은 성결함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곳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12지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로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다고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삶의 모든 영역과 내용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는 모두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드려짐으로 마침이 되었다.

비록 성도에게는 더 이상 이와같은 드려짐이 요구되지 않지만,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모든 삶이 드려지는 형태를 취하여야한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가나안에서의 드려지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들은, 대표성을 가지고있는 것으로서, 신약에 와서는 모든 삶의 영역이 드려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자기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의 것을 지혜롭게 관리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 앞에서 임시적으로 실현되었다.

모세를 비롯하여 장로들과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였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11)”

가나안에서도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이는 에덴에서 상실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가나안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원의 장소는 아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구원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순종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다.



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에서는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론과 우주적 교회론등은 WCC가 세상에 관여하기 위한 교회론으로서 지극히 세상적인 교회론이다.

교회는 세상적인 방식과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이들의 모임이 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는 구별됨을 철폐하고, 세상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세상과 하나로 모임을 가지며,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간다.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missional church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며, 실존주의 철학의 산물이기에, 인간의 소견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라는 용어가 들어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모이는 교회로서의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와는 구분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을 철폐하여야했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는 교회는 인간적인 방식이 제거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모세는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가나안을 안식과 기업이라고 봄으로서, 가나안을 최종적 안식의 땅으로 보고있다.

출애굽 여정 가운데 순종하는 자에게 입성이 허락되었던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의 땅을 예표하는 모형으로서의 안식의 땅이었다.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과는 구별되며,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가나안에서 허락된 안식은, 하나님의 조건적 은혜 가운데 주어진 한시적인 것이었다.

영원한 안식과 대비되는 조건에 의한 한시적 안식은, 안식의 모형일뿐 영원한 안식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업과 안식은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체로서의 영원한 유업에서의 안식을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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