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9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5.21 :: 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2. 2018.05.19 :: 신명기 9장 1-12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21. 05:00

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악인이라는 사실과 악행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최선을 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지 불과 사십일이  되지도 않고, 시내산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있는 상황이었다.

불의를 아시는 것과 보시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지를 아셨지만, 이를 직접 목도하심으로서 진노를 그치지 못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정하셨다고하더라도,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도하며,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선행에 대하여 기뻐하시기도 하고, 신자의 악행에 대하여 분노하시기도 하신다.

심지어 악한 왕 아합이 돌이킬 때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도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정죄를 피하였을 뿐, 목이 곧은 것은 매 한 가지이다.

거듭남과 성화의 과정에 참여된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자신 안에서 의를 찾아볼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지, 악을 행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방종과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삶 가운데서의 행함이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행할 필요가 있다.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역사는 외적인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수 많은 인류를 만드셨고, 노아 홍수를 통하여 노아 가족만으로도 새 인류를 만드셨다.

애굽에 내려가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신 것도 소수인 야곱의 가족을 택하신 결과이다.

모세만을 택하셔서 충분히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외적인 규모를 키운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S교회의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O목사는 중국선교를 위해서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선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들의 교만이 보편회되었다면, 한국의 수많은 거대한 교회들이 초토화되는 것도 순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규모를 보지 않으신다.

아무리 많은 수의 무리가 모였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는 이들은 순종하는 한 사람보다도 못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큰 교회라고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쉽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큰 규모의 교회는 어김없이 장사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명예와 성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교만한 이들이 넘쳐나게마련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추구할 교회는, 모세와 같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겸손히 엎드릴 수 있는 소수가 모인 소규모의 교회를 지향해야한다.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두 돌판은 받은 모세의 마음은 감격 자체였을 것이다.

사십일의 금식을 통하여 얻어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모세가 직면한 상황은 정반대의 절망의 상황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행위 언약이 며칠만에 저주로 결정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두 돌판을 주신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해서 불 가운데 뜨거운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이끄시고자 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을 비웃기라도하듯, 백성들은 사단의 좀비가 되어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신이거든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열심과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인간의 본능은 마치 당긴 고무줄을 놓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교훈이나 명령이나 강요에 의한 윤리 도덕은 다 순간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에,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겨진 고무줄이 오무라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산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도,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할지를 예측하게해준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속도는 하나님께서 쫓아오시는 속도보다도 빠르다.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다.

기독교가 윤리로 제대로 세워질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 윤리를 다루는 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고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그들의 신학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 출발되었으며, 인간의 의지를 자율성이 상실된 노예 의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죄성이나,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인간의 노예의지라는 주제를 애써서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카이퍼나 바르트, 톰 라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윤리적인 기독교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신칼빈주의의 문화명령을 근거로한 문화변혁운동이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이나,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같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모세가 두 돌판을 던진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로 인한 언약의 파기를 뜻하였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모세의 진노나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세가 중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으신 언약, 즉 행위 언약의 깨어짐을 경험하셔야했고, 두 번째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도 깨어짐을 경험하실 수 밖에 없으셨지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심으로, 택한 이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모세가 깨뜨린 두 돌판은 인간 모두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신 분이시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이 멸절을 면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19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사십 일을 금식과 달리, 모세가 사십 주야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지낸 두 번째의 금식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한 시간이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공생애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앞서서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굶주리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구속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금식은 모세의 두 번째 금식과 마찬가지로 중보를 위한 금식이었다.

중보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이 속하여야할 공동체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 안에 담겨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에 왜곡을 초래했고, 이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의 공동체의 표현이기에, 모세의 사랑에 기초한 중보의 모습과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현재의 교회가 비난받는 것에 대하여 항변하기 전에, 교회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고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세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론은 소극적 범죄를 하였던 것이다.

아론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상황이나 현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끊임없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구미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시도들을 한다.

강단에서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대하여 선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다.

바르트는 실존주의라는 인간 중심의 철학 위에 신학을 정립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판넨베르크의 경우는, 신학교가 대학의 학부와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자연과학과 철학과 소통이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형태의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시켰다.

스탠리 그렌츠는 펜넨베르크의 신학을 이어받아, 이머징처치의 대표적 리더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영향을 줌으로서, 이머징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스캇 맥나이트는 새관점주의자인 제임스 던의 신학을 이어받아, 신칼빈주의와 새관점과 신정통주의를 혼합시킨, 이머징미셔널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발전시켰다.

현대신학자들의 금송아지 만들기 작업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왜곡을 통해서 빚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신학의 산물 앞에서 환호하는 이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진노하셨듯이,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노하실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중보를 배운 성도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할 것이다.


21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죄를 짓게 하는 우상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렸다.

아마 어느 정도 형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을 가져다가 또 다시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작업은 욕심을 위한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형태들

을 조심해야한다.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는 금송아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성도가 주식 투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주식은 속히 부하고자하는 마음을 활성화시키는 속성이 있기에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잠언 28장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있다.

일단 성도가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시간과 마음이 주식에 빠져들어가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가 없다.

주식을 한다는 것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투기나 도박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을 했다고 모두 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가속시키는 외형을 가능한 버릴 수 있어야한다.


2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은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격노시킬 것을 아셨으면서도 이일을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교훈과 훈계, 명령등으로 고쳐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를 잉태시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단 번에 주신 선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고통을 수반한 기나긴 과정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한 것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격노케할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러한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보고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로마라는 세상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이스라엘을 확장시키신 분이시고, 그에게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사단의 궤계일 뿐이다.


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이 어떠한 이들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본질적이고 체질적으로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품으신 것이다.

이러한 목이 곧은 백성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담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에게서는 구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기에,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아무런 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2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모세의 중보 사역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있는 것이다.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사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성의 숫자이다.

죄와 관련되어서는 죽음밖에 없기에, 사십 주야의 금식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세의 사십 주야의 금식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임하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십 주야를 죽음을 담보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동일하게 죽음을 담보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중보 사역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립에는 모세의 중보가 있었듯이, 현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중보자가 없었더라면, 멸절될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어디있겠는가?

부정적 상황을 대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기에 바쁘다.

금식하면서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이기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면서, 결코 정죄하기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과정이다.

구속사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있다.

언약 신학은 성경 전체를 보는 틀을 제공해준다.

언약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시작으로, 아담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 그리고 새언약으로 결론이 난다.

이러한 언약들을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달리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여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며, 나머지는 부차적인 주제일 뿐이다.

개혁주의에서의 중심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모든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며, 행위 언약의 개념을 배제한다.

존 머레이도 이에 동참하면서, 개혁주의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단성을 가진 페더럴 비전이 탄생하기도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아담 언약이 재연되었다는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를 심각하게 반대한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새언약을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논리는 합당하다.

인간적인 논리이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리이다.

인간에게는 쉽게 저주하는 속성이 있는데, 중보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온유함을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의 생각과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먹히는 신자들의 행태를 깊이 생각해보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9. 22:49

신명기 9장 1-12절 말씀 묵상



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세상이 전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인간에게 세상을 정복하는 과제를 주신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복해야할 세상은 인간적 논리로는 정복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정복이 가능하다.

정복해야할 대상은 가나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살던 에덴에도 있었다.

아담도 하나님께로부터 통치 명령(창 1:28)을 받고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다스려야할 대상으로서의 들짐승 가운데 간교한 뱀에게 유혹을 받아 도리어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나게 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결코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담대하게 정복하라고 말씀 하시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정복했다고 착각하며 교만해진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의 후손이기에 불순종의 자식들이며, 이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과 합류할 수 밖에 없는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대표하는 백성들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타락한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참여할 자격과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거듭난 이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언약 백성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 하셨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거듭난 신약의 성도들이 참된 가나안 정복 전쟁인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이 아니기에, 성경은 유대 이스라엘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2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세상에서 잘난 백성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잘나고 성공한 이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못나고 부족한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신다.

성추행으로 유명했던 J 목사는 항상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잘난 이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유명한 강사를 소개할 때 종종 그가 어떠한 경력을 가졌던 사람인지 그의 화려한 과거를 소개하곤 하지만, 그들이 종국에는 교만하여 실족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아낙 자손들을 물리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잘난 민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듯이 교만해진 것과 같이, 잘난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도, 자기가 잘나서 쓰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쓰임을 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한번 쓰임받은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자신이 잘나서 구별된 민족이 되었다는 교만에 사로 잡혔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택하셔서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쓰임받은 자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발전과 더불어 체구가 커진 현대인들은 마치 아낙 자손과 같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사용하시지는 않을 뿐더라, 오히려 하나님보시기에 멸망받을 이들일 뿐이다.

북쪽이 개방되면 너도나도 선교에 앞장서려고하며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낙 자손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아낙 자손을 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사용되어질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려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이지만,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고다닌다.

인간에게는 능력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사용되어질 뿐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설령 이스라엘 족속이 아낙 자손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랑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설령 자신에게 세례를 준 목회자가 타락을 했다고하더라도,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목회자는 사용되어지는 수단일 뿐이지, 목회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유명한 목회자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못된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사용되어질 뿐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잘 나가거나 쓰임받을 때 교만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절벽 위에 땅떠러지와 같은, 실족의 지름길이다.

인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질인 것이다.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정죄를 위한 공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가나안에 대한 정복을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낙 자손들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의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악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정의를 외쳐서는 안된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의가 상실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행사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셨지만, 이는 아담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담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를 수행하는 이스라엘은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게된다.

인간이 종종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시키거나 포장하기 위해서,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권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영역을 확장하려했던 것이다.

이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의 확장이지, 결코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성장과 확장도 실상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 교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교주는 자신이 신이 되어서 자신의 공의를 선포하려고하지만, 이는 실상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한 가지일 뿐이다.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아낙 자손을 쫓아내는 작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에서 아낙 자손은 이미 죄악이 심판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가득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세상은 이미 아낙 자손과 한 가지로 죄악이 가득차고있다.

가나안에서의 아낙 자손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할 때에 임할 심판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대한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똑같은 죄인이지만, 단지  죄용서를 받았다는 차이일 뿐이다.

세상에서 성도의 성공은 성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힘을 실어주심으로 성도를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은 성도의 잘남이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가 받는 축복을 세상에서의 성도가 하여야 할 역할과 연계시키기보다는,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헌신할 것을 말하며, 또한 헌신한 이들이 받은 복을 간증하면서 교회에서의 헌신과 축복을 연계시키려고한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성도의 성공은 성도의 공로와는 상관없는데도, 이를 왜곡시켜서 세상에 대한 성도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에 대한 충성과 축복을 연계시키는 분위기는 목회자가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목사도 끊임없이 이러한 강조를 하였던 것을 보았다.

아낙 자손을 진멸해야할 이스라엘에게서 공로를 찾아 볼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겸손히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준비를 하여야한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공의를 말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 부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부자나 가진 자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면서, 정의를 외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내세우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른 의로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다.

아낙 자손을 진멸시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이들이다.

자신이 의롭기에 사회의 악에 대하여 정의의 칼을 휘두를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난 것이 없다고 성경은 증언하고있다.

미국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력은 인구 비율에 비하여 엄청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택함받은 민족이라고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이 욕심이 많은 까닭이다.

인간은 남과 다른 상황에 놓이면 스스로 착각하게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의로움이란 없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특히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쓰임받는 백성들일 뿐이다.

요단 강가에 이른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다.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모세의 중보 기도가 없었다면 이미 다 멸절되었을 목이 곧은 백성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문전에 있게된 것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성도가 불신자들에게도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하는 이유가 된다.


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잠시 지도자가 안보이는 사이를 못참아서 불이 붙고있는 하나님의 산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방식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우상 숭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이방 신상을 들여놓고,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다 같은 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호렙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당도 마찬가지이다.

수능 때만 되면, 절간이나 예배당이나 똑같은 모습이 재연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당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의 목회자들은 교회당의 화려함과 자기를 섬기는 이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를 예배와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격노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사십 주야의 금식은 모세가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서 호렙산에 머무른 완전한 시간이었다.

이 완전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모세가 40주야를 호렙산에 머무르면서 떡과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를 완전히 비우는 시간이었고 그 비움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사십 주 사십 야를 금식하신 후에 떡으로 유혹하는 사단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의 모습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실현됨으로서 십계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필요를 내려놓은 금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과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견고한 글로 쓰여졌다.

고대 근동에서는 종종 사람이 돌에다 법을 새겨넣음으로서 사람들이 수정을 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는데,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문화하심으로 사람이 수정 할 수 없게 하였다.

두 돌판은 언약궤 안에 보관됨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한 매개체이기에, 성도는 구약의 대사장이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말씀이 매개체가 되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1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노아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듯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주신 것은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진노가 더 이상 비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행위 언약으로서,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지만,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였기에, 사십 주 사십 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노아의 홍수에서의 진노의 비를 재연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대신 아들이 진노를 받도록 준비하셨기에, 사십 일간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 진노와 고통의 시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듬으로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금송아지를 만듬으로서, 어느 누구의 유혹이 없어도 스스로 부패한 백성임을 드러내었다.

인간의 공백으로 인한 불안은, 스스로를 부패하게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기에, 모세가 올라간 공백의 기간에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는 모세의 인도가 표면적인 안정이 되었지만, 모세가 안보이는 기간에 평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도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목회자에게 의존하면서, 목회자가 안보이면 불안하여 세상 것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

유명한 목사를 따라가 집단을 이루면서 눈에 보이는 큰 교회 건물을 짓고서 안정을 찾으려는 성향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의 성향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성도는 목회자의 유무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평안 가운데 거 할 수 있어야한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사람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도, 하나님만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