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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29 :: 예레미야 17장 19-27절 말씀 묵상
  2. 2017.12.29 :: 예레미야 17장 1-11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 2017. 12. 29. 13:01

예레미야 17장 19-27절 말씀 묵상


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23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26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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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안식일을 거부하는 백성들)


이미 보편적으로 율법을 거부한 백성들이기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의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과는 대조적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에 유다 백성들이 율법을 얼마나 등한시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예레미야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느닷없이 기록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유다 백성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준비시키는 가장 적절한 시기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그래도 끝까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에서,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마저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참된 안식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24-27, 안식일 준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궁극적으로 새예루살렘에서의 안식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짐을 지고 들어와서 장사를 하려고 한다거나, 어떤 자의적 수고로 자신을 완성하려는 시도는 배제되어야만 한다.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예루살렘은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왕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만 했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만 보여주었던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에 의하여 안식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던 예루살렘은, 이어지는 왕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에 불순종한 이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했듯이,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했던 다윗의 왕위는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로 귀결되어야만 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이 실현될 새예루살렘의 모형이며 그림자였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안식의 장소인 예루살렘, 즉 교회는, 예루살렘 바깥의 모든 이들인 이방인에게 열려있는 곳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무거운 자신의 짐, 즉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룩함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 요구된다.



(묵상)


예레미야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다의 피난처요, 안식이신 성소임을 찬양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저주의 재앙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깨닫고나서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레미야의 찬양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얼핏보면 재앙의 저주 후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연결이 안되는 것 같아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안식일에 재한 준수는,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보다는, 율법의 종료로서의 안식을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에 대한 준수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여있으면서도, 이미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를 통해서 언약의 종료를 선언하신 후의 말씀이기에, 율법의 종료와 더불어 제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는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제 7일에 취하신 안식의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을 요구하셨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안식은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기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나안에서는 에덴에서의 상황이 유형학적으로 재연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1:28의 창조 명령은 율법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순종의 요구였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능동적 순종이 요구되었던 창 1:28의 창조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능동적 순종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에 실패하였다.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이, 이미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날 것이 결정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한 순종의 요구는 아니며,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제시되었던 원시 복음(창 3:15)과 같이, 저주 받은 유다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이 나타내는 하나의 의미는,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안식일에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나신 두 번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창 1:28의 창조 명령과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그리고 율법의 저주인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안식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유다 백성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죄성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안식에 대한 불순종이다.


하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지만, 하지말라는 것을 하는 것도 죄악이다.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 못지 않게 안식에 대한 요구도 거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 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요구가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율법에 집착하면서, 유다 마카비우스를 비롯한, 열성당원들의 성전 탈환을 위한 끈질긴 활동들을 볼 수 있다.


안식이 요구되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은 또 하나의 율법이었기에, 유대의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파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안식에 대한 거부였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최근에 다시 시도되는 제3 성전 건축에 대한 집착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안식에 대한 집요한 거부라는 의미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제 3성전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또 한 가지의 방법이 아니다.


유대 성전은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유대 성전에 대한 집착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성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반하는 개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의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이 땅의 어느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2000년 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안식에 대한 거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기에, 2000년 전의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한 심판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에 대한 도전 이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참 된 성전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의 장소인 것이다.


오직 교회만이 안식을 경험하는 장소이기에, 교회는 장사를 하려거나, 아니면 자아를  실현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 2017. 12. 29. 12:56

예레미야 17장 1-11절 말씀 묵상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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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우상 숭배의 죄)


오늘은 역사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된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는 주된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유다 백성 못지 않게 우상 숭배를 하는 이들이 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이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발달 만큼이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있다.


유다 백성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 만큼이나, 산업 혁명 이후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다가 양대 세계 대전을 일으키는가하면, 모든 선악의 기준을 이익에 두고서 판단하는 시장 경제의 원리는 모든 이들로하여금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도시 구조의 특성상 유형적 교회 조차도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보다는 교인들을 믿고 의지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인들의 죄는 도시 문명 가운데 우뚝 세워진 건물들 만큼이나 확고하게 새겨져있다.




(2, 우상 숭배의 결과들)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은 가나안에서 풍요를 위한 음란한 제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이곳에서 드리는 제사로서의 남녀의 성적인 결합은, 마치 하늘과 땅의 만남을 통해 비가내리고 풍요를 맛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단순한 우상 숭배를 넘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의 자녀들은 부정한 우상숭배의 결실들이었으며, 혈연에 의한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3-4, 긴밀한 관계성의 파괴)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은 마치 자녀나 아내로 부터 당하신 배신과 같을 것이다.


아내를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입히고,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하였지만, 이들은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이들을 열심히 쫓아간 간음한 자이며, 집을 떠난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진노이었으며, 진노의 불길은 가히 상상하기가 힘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외적인 징계로는, 돌과 같이 단단한 이들의 마음을 돌이키기가 어려우셨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직접 잘못된 결과들을 경험 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 이들을 내어버림으로서 마음 중심에서 다시 돌이키기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마련해주신다.



(5-6, 스스로 자초한 저주)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환경으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결과들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궁핍한 모습을 드러내는 떨기나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풍요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의 풍요의 종결을 의미한다.


에덴과 가나안은 순종을 전제로 주어진 복된 환경이었기에, 스스로 불순종을 택한 이들에게는 허락될 수가 없는 땅이었다.


현재의 복된 환경은 에덴이나 가나안과는 비교될 수는 없지만, 에덴과 가나안이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환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건이 주어진 환경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일은 척박한 땅이 아닌, 일반 은총이라는 좋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현재의 좋은 환경은  택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일반 은총을 근거로 유지되는 환경이다.


일반 은총의 목적은 특별 은총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은총 하에 있는 현재의 환경에서도,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환경은 율법 대신에 자연법의 지배하에 있기에,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들의 종국은 버림받은 유다 백성들과 한 가지일 것이다.



(7-8, 복있는 사람)


전자기기도 전원의 공급을 받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인간의 머릿 속에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소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가장 근본된 도리인데도, 이를 실행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정작 자기 욕심, 즉 사단의 알을 품는 것을 즐거워하는 이들이다.


유다 백성들이 보여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삶은, 아담의 타락의 실상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9-10, 부패한 인간의 마음)


부패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옳고 그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깊은 것도 다 아신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항복하고서, 자신을 더 이상 믿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11, 남의 알을 품은 인간들)


자고새의 경우는 아니지만, 뻐꾸기는 자기의 알을 직접 품지 않고 오목눈이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서, 오목눈이새로 하여금 대신에 알을 품게한다.


오목눈이새의 알보다 알찍 부화된 뻐꾸기의 알은 오목눈이새의 알을 밀쳐내고 둥지를 독차지 한다.


오목눈이새의 둥지에서 어느 정도 자란 뻐꾸기는 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오목눈이새의 둥지를 떠난다.


오래 전에 EBS에서 방영되었던 잊을 수 없는 영상이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직접 키우지 않는다.


유다 백성들이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곁에서 행하였던 가나안의 풍습은 뻐꾸기 알을 품은 오목눈이새와 다를 바가 없다.


타락한 죄인들이 희망했던 풍요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고 말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서만이 참 자유가 주어질 뿐이다.


유다 백성들의 역사는 대표적으로 노예 의지를 가진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우상들로 뒤 덮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이 비록 노예 의지를 가지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좀비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사단은 인간을 이용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사단의 종 노릇하는 인생에 대한 강한 집착력을 가지고 있다.


좀비 인생은 사단이 심겨놓은 알을 자신의 알인양 열심히 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품에서 떠난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이 부패한 인간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다.


일반 은총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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