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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8 :: 사도행전 11장 19-30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11장 19-30절 말씀 묵상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은 사마리아뿐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지역까지 흩어지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핍박한 주체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대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이들에게 다가 갈 수 있었고 이방인들도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력은 환란과 핍박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어딘 가의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의 성장의 배경에는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내려왔던 이북 5도 출신들의 실향민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핍박과 분열을 통한 성장)
사울의 경우와 달리 흩어진 자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가 없이도 가능했는데, 이는 이들이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서 왔기에 더 이상 유대주의에 대한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었다.
사울은 핍박하는 자의 중심에 있던 자였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하심이 있었지만, 핍박을 받는 자들이나 아웃사이더들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틀을 벗어나면서 준비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집단들은 이기적이기에 이권 문제와 관련되어 집단에서의 핍박이나 따돌림을 받는 이들은 이기적 집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들이다.
외적으로 규모가 커진 교회들은 반드시 내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분열을 겪을 수 밖에 없으며, 기존 세력에서 밀려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외부에 새롭게 조직을 만들게되며,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시작하면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외적인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이 변화될 수 없었듯이 어느 정도의 외적인 규모를 갖춘 교회가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패한 예루살렘이 멸망되었듯이 부패한 교회는 망할 수 밖에 없다.
부패한 교회를 개혁시키려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되어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적 교회 성장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인간적 노력과 성령의 역사는 차원이 다르다.
성령은 주로 핍박 가운데 축복으로 역사하신다.
핍박과 환난은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노력은 외적으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며 선행으로 모양을 만들려고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주로 환란과 어려운 환경에서 일어난다.
한때 교회 성장을 위해서 교회에 오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비지니스처치가 흥행하였지만, 대표적인 비지니스처치인 윌로우 크릭 교회는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성장하려는 교회는 인간들의 작품일 뿐이다.
교회의 성장은 주로 핍박과 더불어 오며 교회는 풍요와 더불어 부패한다.
한국교회의 부패의 주요원인은 일차적으로 외적인 풍요라고 할 수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이방 문화가 꽃피운 곳이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일은 문화적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 분리를 뜻하였다.
안디옥 교회의 성장은 이방 문화로부터의 따돌림과 더불어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였기에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환란과 핍박은 지역 텃세를 순화시킴으로서 지역의 배타성을 상실시키는 기능이 있다.
한국전쟁은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남쪽의 각 지역이 지역 텃세를 넘어서 복음화될 수 있었다.
그나마 지역 텃세가 남아있던 강릉이나 경주, 제주가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것을 보면 환난의 순기능을 알수 있다.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할례받은 유대 성도들은 이미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의 소식을 들었지만, 안디옥에서의 이방인들의 복음화는 예루살렘과 공식적인 관계가 없이 발생한 일이었기에, 이방인이 구원받은 사실을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더욱이 사도가 아닌 바나바가 안디옥에 보내졌었기에, 이미 예루살렘에서 사울에 대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바나바가 다소로 사울을 찾으러가서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체계적이지 못한 복음 전파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체계적으로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보게된다.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는 안디옥의 성도들을 더욱 굳건하게 해준다.
이방인들이 모여있던 안디옥에서의 부흥은 예루살렘의 할례파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으며, 유대 전통에 익숙했던 이들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자칫 예루살렘과 서로 주도권을 가지고 분파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된 사람이었기에 안디옥에서의 부흥을 기뻐 하고 그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성도는 교회 조직의 일원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백성이다.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조직의 확장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1950년대 빌리그레함이 자신의 조직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부흥 집회 후에 결신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서 이들을 주변의 교회에 연결 시켜주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좋은 일이었지만 빌리그레함의 조직을 후원하는 교회에만 연결시켜 줌으로서, 지역에서 빌리그레함 부흥 집회가 있게되면 교단에 관계없이 주변 교회들이 빌리 그리함 조직에 가입하게되었으며, 빌리그레함의 부흥집회는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빌리그레함은 노년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발언을 함으로서 그의 조직의 안좋은 결과를 보게된다.
(이안 머리의 “분열된 복음주의”에 자세히 나와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부흥은 조직 확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는 비록 나중에 바울과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집중된 열심으로 사역을 같이 담당 할 수가 있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다.
사람은 스스로 나서는 것보다 누군가의 추천과 소개로 나서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하여 충실할 필요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진실된 친구가 된다는 것도 중요한 사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사회의 구조상 서로에 대한 이권이 개입되지 않고 친구가 되기가 쉽지 않은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야만 한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그만큼 안디옥이라는 사회에서 연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력의 한 가운데에는 사울과 바나바가 있었다.
사울은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함으로서 사울의 전도 여행의 근거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긴밀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서로 인정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울과 바나바는 모두 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같이 사역 할 때가 있었고 또 서로 갈라서야만 할 때도 있었다.
이는 서로의 특성을 살리는 다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면이 있기에 성도는 서로 다른 가운데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만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죽이는 분열로 나타날 때는 선 대신에 악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요즘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대신에 다양한 좋지 못한 이름들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호칭은 현재의 교인들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며, 그 한 가운데에는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이 불행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반드시 결산할 문제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선지자는 구약에서 뿐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을 하였다.
정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신약 시대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서든지 항상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지금 시대에는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성도는 성경 말씀을 선지자들의 선포 못지 않게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한다.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가 빠르게 독자적으로 자립하면서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는 것을 본다.
그들이 사울과 바나바를 보냄으로서 예루살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본다.
친밀한 관계에서는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들이 보낸 부조는 절대로 뇌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간의 관계는 서로를 돌아보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말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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