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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6 :: 사도행전 18장 24절- 19장 7절 말씀 묵상 1
사도행전 18장 24절- 19장 7절 말씀 묵상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학문이 발달된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무리 예수에 대하여 많이 배웠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에 대하여는 시간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요한의 세례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다고하더리도 이 지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완성된 새언약에 까지 이르지 못한 것이다.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요한의 세례를 근거로한 예수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하여 알게된 주의 도와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요한의 세례만 알고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도 가능한 일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신약은, 바울을 예수와 대립적인 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공관복음만을 강조하고서 서신서를 최소화시킨다.
바울의 서신서를 공관복음과 대립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최소화시켰을 때, 공관복음은 유대교의 연장 선상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유대 이스라엘의 완성이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공관복음과 바울의 서신을 대립관계로 보는 불트만 학파의 영향을 받은 톰 라이트는 공관복음을 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 완성을 위한 메시아 예수로 그려낸다.
성령 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배제된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윤리나 도덕책 정도로 변질시킬 뿐이다.
요한의 세례만을 전하는 복음은 부족한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이 될 수 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열심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기본 동력이 된다.
열심으로 나온 결과물은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동력이 되며, 성숙을 위한 원동력이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베드로나 바울도 나름대로의 열심이 원동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열매를 볼 수 있었다.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열매들을 맺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이 될 수도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열심 가운데 바을과 같이 사역하는 시간이 많았기에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시기 적절하게 아볼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열심 가운데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비록 더디지만 성경를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진보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과 씨름하다보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섭리에 의해서 만남을 통한 또 다른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사람을 직접 만날 수도 있겠지만 책을 통해서나 정보 매체를 통한 만남을 통해서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진 축복이 있다.
현대의 성도들은 페북이나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서도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영적인 진보의 결실을 볼 수 있기에 사도 시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예수는 메시아이시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되어야한다.
메시아는 유대 이스라엘의 메시아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이시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으로 바뀌는 현대 신학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고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아볼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의 제자들도 바울의 복음 전파가 없었으면 지식으로만의 그리스도를 알았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지식의 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의 전단계로서 필요하지만 성령 세례로 이어지지 못하는 요한의 세례는 복음이 아니라 울법보다도 더욱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도시대에는 시간적으로 성령 세례의 필요가 대두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위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은 주로 회개를 하게하시는 분으로 제한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나 혹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이머징미셔널 처치에 많은 영향을 미친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신학의 특징은 위로부터의 계시 신학과 대립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철학과 자연과학과 소통이 가능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신학을 강조한다.
이성과 논리를 기초로한 신학은 계몽주의에서 태동된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마치 세례 요한이 외쳤던 회개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기독교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근거로 한 신학이라고하더라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단지 인간의 교훈에 그칠 뿐이다.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오실 이, 즉 예수께 인도되어야지만 결실을 보게되듯이, 율법 아래있는 이스라엘도 그리스도께 인도되어야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예수는 복음의 본체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의 문제는, 유대적 이스라엘 자체를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본체로 보면서,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 나라로서의 유대적 이스라엘을 완성시키신 수단에 불과한 부차적인 존재로 낮추어버린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기에,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의를 이루신 분도 아니시며, 삼위 하나님의 신성이 없이도 가능한 선지자 차원의 역할을 하신 분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어떠한 신앙의 유형도 그리스도께 귀결되지 않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는,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된 인간이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 받아 깨끗함을 입게된 것이다.
복음은 처음 아담의 타락을 만회시킬 수 있으신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생각되어져야한다.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과 연합되어야한다.
성령 세례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이들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증거이다.
연습을 통한 방언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다는 장식과 같이 나무의 열매는 아니다.
성령 세례의 증거는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도덕 윤리를 통한 선행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일 따름이며, 오히려 타종교인들이 더 잘 할 수도있고, 공로주의 신학을 가지고있는 천주교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성령 세례받은 신자는 도덕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향기를 발할 뿐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많은 욕을 먹을 때 성도들은 진정 성령 세례를 받았는지 점검해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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