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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12. 21:34

사도행전 6장 1-15절 말씀 묵상


크리스텐덤 이전의 초대 교회는 건물 위주의 외적인 형태보다는 사람 중심의 생활 공동체로 이루어졌다는데서 현대 교회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6장 전반부는 크리스텐덤의 산물인 현재의 교회 형태를 넘어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하는 선교적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을 적용해보고자한다.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어느 조직이나 규모가 커지게되면 여러가지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 현실이다.

조직은 교회를 위한 말씀과 기도 중심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차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다.

조직은 전적으로 성도를 위해 구성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조직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불행한 현상이 생길 수도 있다.

도시교회들의 조직은 성도를 위하기보다는 교회의 건물이나 예산 문제, 혹은 외형적 규모를 유지하기 위한 부차적인 분야가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이 있다.

건물 위주의 교회는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구성원의 헌신이 필요하다.

팀 켈러의 대안적 교회 형태로서의 미셔널 처치는 도시에서의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를 극복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팀 켈러의 교회를 미셔널 처치, 혹은 선교적 교회라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외형적인 판단이며,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선교적 교회론과는 달리 전통적 교회론을 근거로한 형태로서만의 미셔널 처치일 뿐이다.

도시 문화의 한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은 초대 교회와 달리 도시화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교회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하지만 교회론 자체를 바꾸어서는 않된다.

요즘 대안으로 제시되고있는 선교적 교회는 교회론에 있어서 정통 개혁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있다.

단순하게 선교적이라는 용어로 인하여 호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수용하지만 전통적 교회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한다.

예전에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정통개혁주의 교회들이  반대하였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WCC의 교회론이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기초로하는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라는 것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누구나 다 현재의 교회 구조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어떠한 형태로 교회 안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야할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초대교회는 삶과 말씀이 혼재되어있는 생활 공동체의 형태를 띄고 있다.

오늘날의 건물 중심의 교회와는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있다.

초대교회는 아직 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았기에 건물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체계화된 교회 조직은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기독교가 국교화Christendom되면서 건물 중심의 교회로 고착화되었다.

현재의 교회를 건물 중심의 교회와 생활 중심의 공동체 가운데 어떠한 형태를 지향하여야 할지는 한 번쯤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된 삶 중심의 교회공동체가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이다.

그러면 선교적 교회가 과연 열 두 사도가 고민하였던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집사의 조건으로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뽑는 이들은 사도 시대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다같이 성령 충만하여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뽑히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교회에 열심이 있는 이들이다.

안수집사의 기준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보다는 교회에 대한 열심이 있는 이들이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기도와 말씀 사역은 교회를 교회답게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되면서 중심이 되어야할 사항이다.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일단 말씀 사역에서 열매를 맺어야한다.

불행하게도 종종 기독교 방송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수준이 그냥 감동을 유발시키는 웅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한국 교회 설교의 문제 한 가지를 단적으로 지적하자면 설교에 신학이 없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신정통주의나 새관점, 메노나이트, 세대주의, 신비주의등 종합 선물셋트와 같이 주소가 없다.

신학이 없는 설교는 기술에 불과하며 자기 도취일 뿐이다.

목회자가 테크니션일 경우에는 더 이상 강대상에 올라가면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울 뿐이다.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말씀 사역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설교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이다.

스데반이 이 정도이면 말씀 사역에 전념하였던 사도들의 수준은 어떠할 지를 짐작 할 수 있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목회자들은 초대 교회의 사역자들과 같이 설교에 뛰어날 준비가 되어있는지 점검해보아야한다.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교회 공동체와 선교적 교회)

선교적 교회와 마찬가지로 톰 라이트도 사도들의 이러한 조직화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형성시켜나아가는 새운동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교회는 삶의 형태로서의 새운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혹은 선교적 교회 운동은 삶의 조직으로서의 공동체 운동이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와 구별되어야한다.

사도들이 구제의 문제로 집사를 세우는 과정은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 내부의 문제였다.

하지만 선교적 공동체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은 성도들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전통적 교회가 모이는 교회라면, 선교적 교회로서의 미셔널 처치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일종의 생활 공동체이다.

선교적 교회는 삶의 현장에 흩어지는 생활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와는 구별되어야한다.

미셔널 처치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초대교회의 구성원들과 달리 불신자를 공동체 내부에 포함시킨다.

공동체 구성 멤버로 볼 때 교회의 범주를 벗어나는 선교를 위한 공동체이다.

이들이 전하는 선교의 내용은 개혁주의에서 전하는 복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선교적 교회는 불신자들과 삶과 예배를 공유한다.

문제는 교회 구성원을 삶의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을 포함시키며 이들을 예배에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구별된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이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세례받은 교인들로 구성되어야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지체의 개념은 세례받은 이들로 한정되어야하며, 불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업서버일 뿐이다.

삶의 현장에서의 생활 공동체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생활 공동체로서의 선교적 교회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을 근거로하며, WCC의 교회론을 근거로하고 있으며,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개념이 접목되어 발전되고있다.

삶을 변화시키는 운동과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복음은 구별되어야한다.

사도들의 교회가 구제 사역과 말씀 사역으로 직분을 나누었던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하는 것이었다.

새관점에서는 사도행전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사도들의 초창기 새운동으로 보고있다.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비유와 적용)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에서나 핍박이 있게 마련이다.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를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여가듯이 사단이 자신이 차지했던 영역을 순수하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사단의 기만술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들이 스데반과 같이 순교자들이라는 것이다.

핍박받는 스데반은 핍박받는 이들이 자신에게 잘 사용하는 적용이다.

톰 라이트도 자신을 핍박받는 스데반에 비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의적 적용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적용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적용은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면 안되고 오직 객관적인 신자들의 평가로 이루어져야한다.

스스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이 세상의 이단들은 모두 다 스데반 집사와 같이 핍박받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한다.

스데반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나게 되어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함으로 인하여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듯이 천사의 얼굴과 같은 스데반의 얼굴은 스데반이 핍박 가운데에서도 얼마나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하기에 해와 달이 필요없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공급과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스데반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는 핍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사용하였다.

사용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스데반은 사울을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스데반을 사용하셔서 사울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하셨다.

악한 이들은 악한데로 사용되어질 뿐이다.

신자는 악과 투쟁하기보다는 모든 기회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사용하여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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