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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1. 22:26

신명기 10장 1-22절 말씀 묵상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처음 산에 올라간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원론적 죄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번째 산에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집행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한 계명보다는 오히려 죄를 정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와 새로운 중보자를 세우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을 들고 나무궤를 만들고서 중보자로서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장작을 준비해서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모습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를 메고 손수 피흘리시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신 모습이었다.

두 번째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비통하였으며, 그들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성도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한 존재이기에, 중보자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처음 돌판과 달리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정죄와 은혜를 내포한다고 생각된다.

처음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하여 이미 깨어졌지만,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 주신 명령은 궁극적으로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 돌판이 아담 언약을 상기시키는 행위 언약에 강조점이 있다면, 두 번째 돌판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은혜 언약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에 이르기까지는 정죄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정죄와 심판은 행위 언약에 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에 의해 규정된 죄값를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거두어지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언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기에, 모세 언약 자체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불순종에 대한 진노로 부수어뜨릴 것이 아니기에, 언약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담겨있는 언약궤에 보관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을 목도하시면서, 이를 직면하시면서 풀어나가시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길이 없었고,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심정을 알 수도 없었다.

성도의 세상을 향한 관점은 모세가 다시 두 돌판을 다듬어서 시내산에 올라간 것과 같이, 첫번째 돌판보다는 두번째 돌판의 심정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중보자 모세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음을 깊이 깨달을 때, 결코 사회에서 욕을 먹는 그리스도인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두 번째 돌판은 수정되거나 처음 돌판에 쓰여진 것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되거나 수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처음 아담과 맺었던 행위 언약이 수정되었거나 취소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종결과 더불어 새로 시작된 것이기에, 아담 언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문제 삼질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며, 아담의 범죄에 대한 문제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더불어 종료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톰 라이트는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과 대비시키는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해석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것인지 본을 보여주신 혁명적 메시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처음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은 것과 같이 아담의 범죄는 결코 묵과될 수 없는 것이다.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두 번째 돌판은 언약궤 안에 있었으며, 이는 속죄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속죄소는 백성들이 죄를 사함받기 위한 곳인데, 십계명의 돌판으로 죄가 규명된 가운데 사함을 받는 것이다.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알고서 용서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를 받은 것은, 십계명과 더불어 율법으로 규정된 죄에 대한 용서라는 것을 인식하여야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의 처음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다른 신은 욕심을 위해서 자기가 만든 신이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회 생활은 교회가 다른 신을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는 이렇게 변질되는 교회를 정결케할 의무가 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더불어 종료되었다.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각종 제도도 종료되었으며, 십일조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십일조는 첫번째로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지파는 오늘날의 목회자와는 관계가 없다.

십계명과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침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레위지파와는 관계없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름으로서 더 이상 죽음에 종속되는 제사를 행하지 않도록 하였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지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한시적인 것이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에서 십일조를 교인의 자격과 연계시키는 것은 욕심에 의한 것이며, 더 이상 개혁주의 교단이라고 표방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인격적 관계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한다.

인격적 관계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모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과 비인격적 관계에 놓여있는 이들로서, 우리의 이전 상황이 이러했었다.

일찌감치 멸망되었을 우리도, 중보자로 인하여 화를 면한 이스라엘과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하여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는 이만이 가능하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면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기에, 중보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성도의 중보기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중보는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는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중보 기도의 삶은 성도의 삶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존귀한 특권인 것이다.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중보자는 동시에 인도자의 역할을 한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하나님께 중보하지 않고는, 백성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한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모세가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 먼저 앞서서 가나안을 향하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먼저 앞서서 성도가 거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는 참된 인도자가 되신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확장되어간다.

중보자와 인도자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시켜나아갈 수 있어야한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은 자로서, 서로 중보하는 가운데 서로를 인도하면서,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모세의 말은 율법이 단순히 형식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보여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들은 반복적으로 일정한 형식과 틀을 가지고있지만, 모든 것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형식과 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새길 삶의 규범이 되었지만, 모세가 마음의 중심에서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고해서,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쉽게 무너진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형식들은 궁극적으로 그 안에 담겨질 내용을 위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모두 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었으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현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이러한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형식마져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하기에 형식만으로 내용을 대체하고 싶어한다.

로마 카톨릭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어느덧 로마 카톨릭과 같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면서, 모세가 말한 것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다.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지만, 단순한 이치도 깨닫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보편적 인간의 현실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훈계하고 야단치는 근본에는 자녀의 행복을 위하는 깊은 뜻이 있지만, 아이는 철이 없기에 부모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고,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고 조금만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여호와를 마음 깊이 경외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하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인 죄인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는 철든 자식과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모든 하늘의 하늘은 더 높은 하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상위 구조upper register로서의 하늘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의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 즉 하늘upper-register과 땅lower-register의 구조 안에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위 구조와의 단절을 맛보아야했다.

사람이 살아나아가는 것은 눈에보이는 하위 구조lower-register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신앙 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인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권과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 앞에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구원은 받았다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은 것은, 일종의 쓰임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되는 선택을 받았지만,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될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역할을 한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영광의 자리에 초대받았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교인이라할지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이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택함받을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택하시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왜 나를 택하시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다.

택함받은 백성이라도 택함받은 것의 근거를 자신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택함받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이다.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행위로는 이미 처음 돌판이 깨어짐으로 인해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더 이상 행위로서의 선을 기대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 마음 중심에서 이루어질 마음의 할례, 즉 거듭날 것을 요구하시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 두번째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는 것이다.

교회 생활도 교회에 대한 외적인 충성 봉사를 강조할 때, 같은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표면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려고했던 바리세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으며, 독사의 새끼들일 수 밖에 없었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외적인 화려함과 선함을 추구하는 신앙 양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왜곡은, 외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회자들도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편승하여 자신의 성공의 수단으로 예배당 건축에 몰입하였다.

수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미화시키는 왜곡된 거짓말을 하고있다.

그리스도만이 성전되시기에,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을 속이는 계략일 뿐이다.

화려한 예배당은, 강단에 조형물을 없애려는 노력을 비웃듯이, 하나님 앞에서 외모를 꾸미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행위였다.

화려한 예배당에서 가난한 자들은 소외될 수 밖에 없었고, 능력없는 자는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다.

하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 외모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일 수 밖에 없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아담은 후손은 누구나 다 고아이며, 과부이며, 나그네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 버렸으며,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하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고아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되시며, 잠시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의 구원자되신다.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과 같이,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노릇하는 나그네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나그네는 나그네 삶의 청산을 위해 출애굽의 과정이 필요했듯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구원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힘든 광야 생활로 인하여 애굽을 그리워하던 것이 하나님에 대한 죄악이었듯이,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직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한 광야와 같은 여정의 삶을 살아가야한다.

표면적인 나그네를 사랑함으로서 실질적인 나그네였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표상적 삶의 형태들은 성도의 실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표상들이기에, 표면적으로 만나게되는 이 땅에서의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존중하여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성도는 사는 날동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며, 의지하여야 하기에, 인생의 기쁨을 오직 말씀 가운데서만 찾아야할 것이다.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출애굽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할 인생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시진 않으신다.

구원받을 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증거를 경험한 성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아담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가인과 같은 육적인 자손을 나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하는데 실패하였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손을 증대시키는 일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화 변혁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영적인 자손을 확장시켜 하늘의 별과 같이 가득하게 하는 일이 참다운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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