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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장 18-32절 말씀 묵상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으면서 내면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면서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외적인 변화를 추구할 뿐,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불행만 낳을 뿐이다.
쉐마 방식의 규제는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죄 가운데 절망에 빠지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율법과 달리 복음은 인간의 근본을 바꾸어 거듭나게하는 것이다.
윤리 실천적 접근 방식은 근본이 거듭난 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무력한 대안일 뿐이다.
윤리 이상의 율법으로도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이 윤리로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더 이상의 윤리나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다.
교회의 영역에서 생기는 도덕적 문제는 주로 거듭나지 않는 이들의 문제일 뿐이다.
거듭난 이들은 설령 범죄하였다고하더라도,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잘 지키고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킨만큼 형통한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 이전에 보편적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가지고있다.
성공한 유대인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말씀이 가지고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혜의 원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유대인의 전통은,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성공한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그들의 삶을 고착화시키고있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교만한 삶은,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씀의 의도하는 바와 말씀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때문이다.
신명기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한다는 것보다는, 다윗과 같이,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은혜 이전의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창조 원리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법적인 원리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죄를 드러내는 자리에 임하게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도를 윤리 규범 안에서 바른 생활을 하게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으로 고발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장수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연법의 원리에 속해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아직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지는 않는다.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주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운영하시는 원리이다.
십계명이 자연법의 모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십계명에 창조주의 가장 근본적인 창조 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원리로 적용이 된다.
복음은 자연법을 거스리지도 않으며, 이를 대적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받았다고 자연법이나, 일반 상식을 무시하거나 경히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한다.
자연법과 상식이 무시되는 교회 생활은 사회의 지탄이 되면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하는 조건적 축복이다.
축복과 저주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저주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 안에 담겨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삶의 원리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상적 접근은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올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행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기보다는 이를 애써서 외면하면서 주변국의 도움을 청하곤하였다.
현대인들도, 상황과 환경의 어려움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한 가지이다.
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말씀이 어느 정도 지켜졌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한시적인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이스라엘 분열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의 분열의 원인이 르호보암에 있기 이전에 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다.
나타나는 현상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현대인들은 그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한다.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모세는 신명기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본론을 언급하고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에 따른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음을 말함으로서, 모세 언약이 전형적인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음을 보여준다.
모세 언약의 가장 기본되는 골격은 아담 언약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이기에, 은혜의 요소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전적인 행위 언약이며, 모세 언약은 타락한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기에, 은혜 언약의 요소가 담겨있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아담 언약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기도하지만, 이는 아담 언약이, 창세 전 구속 언약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 은혜 언약에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언약을 자체의 속성만으로 볼 때는 아담 언약이나 모세 언약이나 동일한 행위 언약이기에,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재연 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이 오직 은혜 언약이라고 주장하지만,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본질substance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지만, 표변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고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검증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시험에 응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들을 은혜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덴이 안식이 성취되지 않은 장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은 안식이 성취된 장소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으로서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가나안이 은혜의 장소이며,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주장인데, 이는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요구되는 장소에는 적합하지 않은 주장이다.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사역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보는 복음은 윤리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새관점을 좋아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설교는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이들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삶의 형태를 바꾸는 윤리에 불과할 뿐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결코 안식이나 은혜의 개념 가운데서는 설명될 수 없다.
비록 안식이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였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조건이 주어지기에 참된 은혜와 안식은 아닌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이나 은혜를 예표할 뿐이지, 그 자체로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왜 기필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야만 했는가?
가나안 땅은 에덴의 유형적 재연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불순종을 재연시킴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불순종을 재연시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에덴에서의 아담과 차이가 있다면,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인류를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가나안이라는 무대에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연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불리워졌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으며, 양심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명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야할 영원한 나라를 예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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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1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십계명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마땅한 자세를 설명한다.
모세의 강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이 아닌 의무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자상하게 설명하면서도, 권위를 가지고 강변하는 것이다.
국민이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규정하는 이스라엘에 부합된 의무를 마땅히 수행하여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을 받았지만, 축복과 저주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속적인 교훈을 받아야만 했다.
마치 자녀가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 것과 같다.
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출애굽의 과정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기사는 택함받은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 장면이었다.
교훈과 위엄과 강한 손과 펴신 팔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가르치는 모습이며, 가르침을 받는 이는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고, 그의 펴신 팔에 안기어서, 강한 손에서 꼼짝못하고 교훈을 들어야하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음을 본다.
성도의 걸어가는 길도 하나님께 붙들린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험난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출애굽의 전 과정은 택함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가는 전과정과 유사하다.
성도 한 사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강림하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내포되어있다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는 성도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보여준다.
성도를 위한 세상과의 싸움은, 택함받은 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아야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승리를 이 땅에서 경험하여야한다.
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출애굽 과정에서 행하신 이적들은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영적 전쟁에서의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분리를 통한 영적 전쟁은 고통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평생 신앙생활의 동력이 되며, 현재의 삶의 위로가 된다.
5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적들은, 미숙하고 아직 불신자였을 때의 모습이 남아있는 가운데,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보여준다.
광야에서의 여정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과정이다.
장성한 분량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보살핌과 돌봄 가운데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까지, 그리스도와 삶을 공유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다.
자신이든, 혹은 주변 상황이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시험하고, 반항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단의 통로가 되는 이들은 나름대로 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성도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7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이를 담을수 있는 마음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애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명해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문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으로는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험하게하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눈으로 보게 하시지만, 택한 자에게는 경험하고 본 것을 담을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존적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적 사고는 하나님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실존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고의 출발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보편적 사고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에 대한 요구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축복이 가능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적인 실존주의 방식으로서, 자신들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음으로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 즉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축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은, 모든 인간은 축복의 길을 선택할 수 없으며, 설령 축복의 길을 선택하였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우리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 힘입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된다.
하지만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한 순종을 하였던 것은 아니다.
에덴에서부터의 삶을 시작한 아담과 달리,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에게는,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즉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였으며, 광야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순종과, 가나안 땅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는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종은 가나안,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약속의 땅은 타락으로 인하여 쫓겨난 에덴의 바깥에서 다시 구원에 참여되는 땅으로서, 에덴과 에덴의 바깥의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타락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 소산을 먹는 땅과 대조를 이루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에덴을 상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을 예표하고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다.
아들은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들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서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 보여주고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순종의 능력이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의지하여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다.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 땅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동해야지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기보다는,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리는 안식의 땅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주권적 공급 하심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였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사는 동안 안식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탐욕의 방식을 취하였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의 안식을 넘은 영원한 가나안을 이 땅에 구현하면서 사는 삶이다.
성도는 주일,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의 날을 일주일의 첫 번째 날로 삼으면서, 한 주를 그리스도의 안식 위에,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생활하는 안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누릴 안식은 조건적인 안식이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안식은 순종을 전제로한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순종을 통한 안식이 요구되었던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에덴을 돌이키면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하면서,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에덴과 가나안을 넘어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땅의 종말은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가 성취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안식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누리는 안식의 삶이 되어야한다.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불순종은 다른 신을 섬기고 그것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불순종과 악행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불순종과 악행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거부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족하려는 것이 불순종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신은 자기를 위해 만든 신으로서, 자기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있다.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가나안에서의 공급이 끊기듯이, 현대인들의 자족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체워주지 못하는 죽음의 굴레인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불순종은 인간 모두의 불순종을 대변해주고있으며,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들은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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