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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6 :: 신명기 7장 12-26절 말씀 묵상
  2. 2018.05.15 :: 신명기 7장 1-11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16. 21:49

신명기 7장 12-26절 말씀 묵상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하나님의 행하심은 언약을 근거로 하신다.

은혜의 근거는 조건적 행위 언약이다.

사랑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행하시지만, 백성들에게는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실 것을 요구하신다.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더라도 조건에 의한 것이기에 은혜 언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행위를 근거로한다고 공로 개념을 적용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근원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근거로한다.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가나안에서 베푸실 축복은 에덴에서 베푸셨던 축복이 재연되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에서 누릴 수 있었던 풍요는, 아담이 힘써서 일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주된 것이었다.

아담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소산을 먹을 수가 있었다.

아담의 타락은 수고의 주체가 하나님에서 아담에게로 넘어간 것이었으며, 아담이 직접 수고를 하여도 이전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성함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덴과 가나안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에 있었음을 근거로 은혜 언약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순종이라는 조건적 언약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행위 언약에 속하였다고 보아야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현재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순종이라는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율법 아래나시어,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행위로서 충족시키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볼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개념이 상실되며, 전가 받을 그리스도의가  상실되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행위 언약 개념을 거부하는 새관점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의롭게 되기에, 그리스도가 없이도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새관점으로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속주가 아니며, 우리의 주가 되실 수도 없기에, 전통적 기독론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지만,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것이라고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그들의 자녀들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경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기에,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이 허락될 수가 없다.

신약의 시대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일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점점 더 심화된다면, 이러한 일반 은총 마져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오늘날 결혼을 기피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환경적 요인 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만큼 이 세대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왔음을 알 수 있다.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질병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질병은 고통이며, 고통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와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질병의 보편성은 죄악의 보편성과 관계있다.

질병과 죄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흡연이 죄악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은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보다도 질병에 취약하므로, 하나님의 몸된 성전을 파괴시킬 수가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담배피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나쁜 공기를 마심으로서 그만큼 몸과 마음이 상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은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이것들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보편적으로 손상되었다.

질병의 원인을 특정인의 죄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편적 은혜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가 보편적이듯, 질병 또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이 발달되어있어도,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있는 상황이다.

인간을 문제 해결 방식은 대부분 근원적이 아니라 현상적이다.

현대 의학의 치료 방법도 마찬가지로 표면적이고 현상적이다.

과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근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과학에 의존하는 한에는 근원적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로 개선될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치료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으며,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 항복할 수 밖에 없다.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구약의 시대는 신약의 시대와는 입장이 다르다.

보편적인 일반 은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반 은혜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이다.

신약의 시대에 구약의 시대적 상황을 적용시키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은혜가 임하지 않은 시대에 행하는 것은 정죄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끊임없이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은혜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 사상이 담겨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민족을 죽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반 은혜의 개념이 없는 구약에서는, 인본주의적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민족을 진멸하실 권한을 가지고계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으로 거룩이 요구되기에 악을 진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들에게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결과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게된 것은 우상의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단의 종이 되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 것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믿음은 자연의 논리를 벗어날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을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은 자기 확신을 기초로해서는 안된다.

믿음의 근거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죄라고 할 수 있다.

죄악은, 하나님의 논리가 아닌 자기 논리를 근거로 하는 일이며, 자연법적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나가야한다고 생각에는 가인과 마찬가지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죄성이 드러난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능력을 의지한다.

인간이 명예와 부를 쌓음으로서 안정을 찾고 외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근거로한 힘을 가지고있기에, 삶의 원동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하여야한다.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모든 도우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신자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많은 경험들을 하게한다.

눈 앞에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악한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부정적 상황도 그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발견하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신자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우리에게 좋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간섭하심도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자하는 우리의 내면적 성숙을 위한 것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안정을 찾는 것은, 외적인 성취에 의한 것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기인되어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사람의 행함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기반을 둘 때는 인간이 수고하는 것보다도 더 일들이 순리대로 풀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악과의 싸움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발견해갈 뿐이다.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하겠지만, 그보다도 정작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은 인생이 짊어진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자아에 집중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려는 자보다도, 영혼을 죽이려는 자를 경계하여야한다.

담대함을 위해서는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의 육신보다도 영혼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모든 인생은 한번은 죽게 되어있기에, 육신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중요하다.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급격한 변화는 혼란과 공백을 초래할 수가 있다.

이방인을 조금씩 쫓아내는 것은 점진적 환경의 변화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도 삶의 여정동안 평생에 걸쳐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인격적 성숙이 없이 단번에 거듭났다고 급속한 변화를 갖게된다면, 온갖 부작용 가운데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성도 안에 거하는 악도 삶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씩 드러내심으로서 성도가 이를 극복하도록 하신다.

많은 경우 실제 악은 외부보다도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대적들을 진멸했을 지라도,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 남겨진 악들에 오염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악은 내부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넘기신 이방인들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악의 모습들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자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극복하여야할 과제이다.



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행하였더라면, 가나안에서의 타락은 좀 더 더뎠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승리자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결국 이방인에게 패배자로 남게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 말씀보다는 이방인들의 우상을 더욱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체적으로 가나안에서 살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이러한 일들과 동일한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일들에 합류하게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리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로부터도 이익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하기에, 일상에서는 항상 이러한 유혹이 노출되어있다.

성도는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가증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을 더욱 좋아한다.

이스라엘 성전에 가증한 것들이 들어왔던 것과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경받던 목회자도 간음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부패를 보았던 루터나 부쳐, 칼빈등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의지에 대한 강조를 하였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를 하는 경향이 있다.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 그리고 새관점등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5. 23:18

신명기 7장 1-11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가나안은 에덴을 유형적으로 재연시키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있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생물(창 1:28)이 있었으며, 이러한 생물 가운데에는 들짐승(창 3:1)이 있었다.

생물과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로 사용하고있기에, 동일한 존재이다.

뱀도 들짐승 가운데 한가지이기에, 에덴에는 뱀이 공존하고있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뱀을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뿐만이 아니라, 뱀까지 포함하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할 통치 명령(창 1:28)도 주셨다.

에덴에서 아담이 악한 짐승까지도 다스려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뱀과 같은 부류의 존재들을 쫒아내고 다스려야만 했다.

에덴에서는 뱀에 대하여 아담에게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셨듯이, 가나안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을 쫓아내고 다스려야하는 통치 명령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관계를 유형적으로 연결해주고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타락한 이들이기에, 가나안의 족속들을 쫓아내는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신다.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시는 작업은, 혼돈 가운데 창조하시고 에덴을 세우셔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의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참 하나님 나라 백성인 참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세우시는 사도행전의 사역으로 이어진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하나님의 배타성은 거룩하심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악과 공존 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려면 악과 공존해서는 안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지만, 삶에 있어서 죄에 대하여  극도로 예민하여야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노아 언약에 의해서 보존되는 하나님의 일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행동 방식은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서 비롯된 구속의 나라로서의 삶이 요구된다.

신앙 생활에는 포용성이 요구되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여야하지만, 성도에게 요구되는 구속의 나라에서의 거룩함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정통 칼빈주의와 문화 칼빈주의의 주된 차이 가운데 한 가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정통 칼빈주의에서는 세상을 구속의 나라가 아닌 노아 언약에서 비롯된 일반 나라로 보고있다.

신칼빈주의라고도 불리우는 문화 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영역에 이 세상 모든 피조세계 포함시키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데 주된 관심이 있다면, 문화칼빈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세상을 변화시켜 기독교화하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거룩성은 이방인에 대한 배타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과연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불신자를 포용하면서 이 세상을 구속의 나라로 변화시키고자하는 방향성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죄에 오염되어 멸망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이면서 거류민이다.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평안과 안정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기도하지는 않았다.

성도의 궁극적 본향은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본향에 대한 갈망은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시에 이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혼인은 서로 하나가 되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최초의 부부인 아담과 하와는 긴밀한 관계였기에, 이미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를 같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하와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은 먹지를 않았다면, 처음 부부는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인 관계에 의한 연합은 사람이 이혼을 생각하는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혼인은 교회를 예표하는 기능을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가리키고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혼인에 비유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과의 혼인에서 시작되었다.

혼인은 같이 산다는 의미를 넘어서,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거문화는 반기독교적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교회의 개념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이방 문화이다.  

혼인을 통한 하나됨은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성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존재이다.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사단은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다.

사단이 바로 아담을 유혹하였다면 아마 사단은 실패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하와를 유혹하면, 부부 관계의 긴밀성으로 인하여 아담은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혼인은 하나가되는 긴밀한 관계이기에, 둘 다 견고하지 않고는, 유혹에 노출되는 취약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만이 있었다면 에덴은 아무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아담이 에덴에서 문화를 발전시켜서 고도로 문명화된 발달된 기술을 갖고있는 에덴을 만들었어야했으며, 성도들은 이를 다시 수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형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을 에덴에서 수행하였기에, 에덴은 문화 발전을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어야했다.

가나안은 에덴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재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되어야만 했다.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아담이 에덴을 통치하였던 것과 같이,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러한 행동은 성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가나안이라는 특수적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현재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가나안은 에덴의 재연이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 모형인 것과는 달리, 이 땅은 이미 아담이 에덴에서 쫒겨나 살아가는 영역이며, 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는 구별되는 곳이다.

가끔 땅 밟기를 한다거나, 절에가서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세상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곳에까지 가서 그들의 신상을 파괴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잘못된 행동이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택함받은 구별된 성민, 즉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구별된 정체성을 가지고있어야한다.

구별된 정체성은 단지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부패해있었기에, 하나님의 구별된 성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후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택함받은 성도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내적으로, 즉 근본적으로 변화를 입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인간의 내면의 변화는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구별된 하나님의 성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나 도덕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성추문을 일으켰던 J목사의 주장은, 오늘의 말씀과는 대조를 이룬다.

자기가 속해있는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교만은 잘남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며, 이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념의 상실과 그로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근거가 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받는 성도의 택함의 근거가 되기도한다.

S교회의 O목사도, 거대한 중국을 선교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며,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떠들었지만, 결과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였다.

외적인 규모의 자랑은, 그 규모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잘못된 생각에서온 지극히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사고일 뿐이다.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근원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즉 구원 협약이 있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으로 이어지며, 이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구체화된다.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아담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새언약으로 마무리된다.

출애굽은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근거로 시행하신 것이지만, 이는 아담의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속사로 전개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구속사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제거하는 대신에 톰 라이트는 의의 근거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킨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유대인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해서 찾은 근거일 뿐이다.

선택하시고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고해서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에덴에 아담이 있다고 해서 아담이 구원받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 안식을 위한 행위 언약의 실행이라는 과제가 주어진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타락과 그리스도로 완성된 구속으로 마침이 되어야한다.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행동에 제한된 순종보다는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에 의한 접근 방식을 원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야하기에, 행동이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만 한다.

모세 율법과 산상수훈의 차이는 외적인 행함과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의 차이이다.

유대인들과 같이 외적으로만 행하는 것은, 종과 상전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언약 관계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완성된다.

유대 중심적 사고를 가지고있는 새관점이 자녀의 개념 대신에 백성의 개념만을 사용하는 것도, 구약의 율법으로는 자녀의 개념까지 도달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외식적 행동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중립이라는 것은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외면과 무관심으로 이어지기에, 이는 미움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윤리적인 접근 방식은 인간의 실체의 심각성을 간과한 것이다.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시도일 뿐이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를 입지 않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과의 공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 모두의 현실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으로, 모든 인류에게는 자연법으로, 인간의 현실이 드러남으로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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