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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8 :: 신명기 8장 11-20절 말씀 묵상
  2. 2018.05.17 :: 신명기 8장 1-10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18. 22:14

신명기 8장 11-20절 말씀 묵상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면 당연한 것이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분명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인간은 스스로 잘못된 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인데, 인간은 자신이 왜 죄인인 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나쁜 짓을 하여야만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시면서, 인간에게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그 문제의 원인을 찾게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문제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하게될 때 자신들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하는 말씀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러한 문제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한다는 끊임없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지 않는 한에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통로가 된다.

인간은 궁핍할 때는 아쉬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일단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 가운데 거하게되면 더 이상 공급하시는 이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왜 어려운 일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불편하며,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고있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인간이 가장 위험할 때가 풍요로운 때이다.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는 풍요에 있다.

한국 교회는 수십년 전에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 교회의 타락이 일차적으로 풍요로 인한 것임에도,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동일시하게되었다.

어려움과 환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의 저주와 동일시하면서, 성도를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가기도한다.

어느덧 교회는 욕심을 채우는 통로가 되면서, 세속적 욕심에 물든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다.

목회는 세속적 성공의 통로가 되면서, 신학교와 교회가 변질되어버렸다.

로마 카톨릭이 이를 증명해 주었는데도, 한국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개혁주의를 외치면서 실질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욕심의 굴레로 빨려들어가고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이라고하더라도 전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인식하면서,  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되어야한다.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특히 성공한 이들은 자신이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성공한 대형 교회 목회자 가운데 교만하지 않은 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의 사시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알아서 행하였다.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죄책감과 의무감을 감당하며 살아 갈 수가 없다.

인간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리적 현상이지만, 이러한 본능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광야를 지나는 동안의 수 많은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면서, 직접 훈련을 시키시는데도, 인간 속에 자리잡은 고집과 저항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상적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을 지나게하심으로서 오직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 많은 훈련이 과연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는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가 불가능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훈련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다.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낮아져야한다.

높아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기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께 의존할 수가 없다.

교만한 자에게 믿음의 대상은 자신인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외적인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강화시킨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인간이 추구하는 외적인 확장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붕괴 속도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동안 교회가 외적인 확장에 있어서 세계 최고임을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교회가 성장한 곳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높아져서 변질된 곳이 되었기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곳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곳이 되어버렸다.

교회는 많은데 정녕 다닐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교만을 질타하였다.

교만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외적인 풍요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과시한다.

외적으로 확장된 교회의 목회자는 어김없이 자신이 숭배를 받으려한다.

유명해지면 어김없이 타락하는 목회자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된다.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잘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이 있었으며,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약속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공동체의 속성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에 속하여있으면서, 공동체적 책임을 감당하여야한다.

인간은 조상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후손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상과 후손의 모든 운명은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도에게 주시는 능력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주신 선물이다.

성도는 언약 안에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예민하여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을 드려야한다.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은혜 언약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축복만이 약속되어야한다.

모세가 말하는 우상 숭배에 따른 멸망은, 행위 언약의 속성 가운데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지만, 모세 언약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행위 언약을 배제하고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나, 율법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만 보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울법주의는 모두 개혁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 개념이 배제된다면,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개념도 배제되며,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이 배제된 페더럴 비전과 같은 복음의 왜곡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에 대하여 멸망이 약속되어있는 행위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며, 아담과 달리 이미 타락한 백성이기에 은혜를 예비하는 백성일 뿐이다.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실행할 마음과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질 때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낮아져야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된다.

인식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은 어떠한 행위로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이어야한다.

오직 충성만으로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된다는 메튜 베이츠의 주장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7. 21:38

신명기 8장 1-10절 말씀 묵상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같은 유형의 명령이 반복된다.


이러한 유형의 명령은 아들됨의 조건이었으며,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순종의 문제는 가나안에서 정착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요구되었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겟ㅓ 마찬가지로 재연되고있다.


이러한 재연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순종의 문제로 무너졌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선지서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가나안에서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의 문제는,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순종의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에게는 신론보다도 기독론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기독론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 주제를 기독론에서 신론으로 옮기면서, 전가 교리를 소외시키고있다.


신론 중심적 신앙에는 또 다른 순종을 통한 자기 의의 성취가 자리잡고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새관점은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주장한 의를 넣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말기에 순종의 문제가 무시되었듯이, 현대인에게 믿음에 대한 주제와 기독론은 구시대적 산물로 취급되면서,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나, 문화변혁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운동이나, 혹은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 선교적 교회론이 주요 주제가 되고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거듭 순종에 대한 주제가 언급되고있는 것은, 가나안을 에덴과 대비시킴으로서, 에덴에서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명령을 지켜행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과 선악과 금령을 내리신 것과 유사하다.


가나안은 에덴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성도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처의 모형이며,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안식처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는 순종은 불완전하기에,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해주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성경에서는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한 충만한 준비 기간으로 40이라는 숫자를 종종 볼 수 있다.

40년 간의 광야에서의 기간은 가나안을 준비하는 충만된 기간이었다.

에덴에서의 검증기간도 무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로는 아무리 충만한 기간이 준비되어도 불완전하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 증명해주고있다.

이는 에덴에서 검증기간 동안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안식처에서 완전한 순종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설령 검증되었다고하더라도, 검증된 인간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교만으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또한 만나를 자기 방식대로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 의존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개벽을 뜻하는 에녹이란 명칭으로 자신의 아들과 성에다 이름을 붙였다.

도시의 기원은 그 속성상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내포하고있다.

도시 문화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인간 스스로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문명의 속성은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발전되는 것이다.

첨단 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낮아진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으로 인한 것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문명의 힘에 의존하면서 극도로 교만해졌다.

예레미야는 교만해진 유다의 패망을 예언하였듯이, 극도로 교만해진 현대인에게는 최후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헤어지지 않은 의복과 부르트지 않은 발은 인간의 기본적인  염려를 없애주는 사건이다.

인간은 언제나 삶의 여정 가운데 소모되는 생활용품과 건강의 쇠약해짐에 대한 염려로 항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수고의 대부분은 영원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 가운데 생기는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인생은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생기는 더 많은 필요를 감당하여야하기에, 삶의 굴레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인생은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결책보다는 현상만을 쫓아가다가 멸망하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기에, 결국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생을 위해서는,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삶의 굴레를 넘어서, 하나님의 초월적 공급하심을 의지하며,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을 하여야한다.

영생을 준비하는 참된 삶이, 한 주의 시작을 주일로 시작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음을 다시 한 번 상기 시켜 주고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서 부름 받았음을 말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신분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부름받은 신분은 처음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처음 아담도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신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있다.


특히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개념이 결핍되어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지만, 자녀로서의 신분과 이에 상응되는 순종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백성을 대표하는,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으신 왕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단지 본을 보이는 모델로서의 예수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분명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다.


아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조건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순종이었다.


아들됨과 순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있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인간으로부터는 아들됨의 자격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아들로서 요구되었던 순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역할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관의 상징으로서의 가시 면류관, 왕의 홀로서의 갈대 지팡이, 왕복으로서의 자색 옷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징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조건인 순종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가 받는 징계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징계인 것이다.


성도에게는 삶 가운데 직면하게되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삶의 온갖 어려움은 자녀를 자녀답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삷의 환경 가운데서의 역경과 어려움은 더욱 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동력이 되어야할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곳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한다.

가나안 땅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보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곳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되어야하며, 더 이상의 검증이 요구되지 않는 안식의 장소이어야한다.

하지만 가나안이 예표하는 영원한 안식처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을 누릴 자격이 없음으로 인해서, 땅은 황폐해졌다.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어도 이를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땅은 황폐해 질 수 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동물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오직 인간의 손이 미치는 곳은 어김없이 황폐해진다.

신킬빈주의는  문명의 발전을, 에덴에서 주어진 명령으로 보고있지만,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려는 본성이 깔려있다.

하나님으로 독립하려는 인간은, 광산에서 광물을 캐듯이 땅을 황폐화시키고있다.

몇십년 전만해도 이 땅에서 황사나 미세먼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중국의 발전은 곧바로 환경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가나안과 같이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면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만든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는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 주어진다고하더라도, 결국에는 욕심으로 황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는 저주를 받았다.

에덴에서의 소산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운 소산이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에덴의 풍요를 상기시키고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인간에게 있음을 드러내고있다.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잠시일 뿐,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이 독사의 자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 인하여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이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스라엘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의 부작용은 교리의 잘못이 아니라, 모양만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거짓된 이들에 의한 부작용인데도, 이를 교리의 문제로 간주하고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넣거나, 혹은 오직 믿음을 오직 충성으로 바꾸려는 매튜 베이츠Matthew Bates의 시도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이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인데도 신학자들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행위를 끝까지 집어넣으려고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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