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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29 :: 에베소서 6장 10-24절 말씀 묵상
  2. 2017.12.29 :: 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2017. 12. 29. 16:43

에베소서 6장 10-24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비된 삶의 모습과 더불어 이제는 전투 태세에 들어간 군인과 같이 어떻게 전투를 해야하는지, 전투 요령을 가르쳐주고있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시켜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관계성을 정립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타락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하였어도, 세상과는 회복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서, 세상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세상 권세자와 싸울 것을 명하고있다.

이는 자칫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전개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성도가 싸워야할 대상은 비록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지만, 인간은 육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병행하여야 한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치 닭에 품겨진 달걀과 같이 성도는 주 안에서, 주의 강한 힘으로 강성하여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도는 교회 생활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성숙되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성도의 안식처가 되어야하며, 영적인 공급처가 되어야한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성도는 주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가 쉽지가 않다.

성도가 주 안에서 강해져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취약점은, 교회가 이미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을 닮아 가고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타락하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교회의 타락은,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하는 군인들을 지원해주어야할 후방 기지들이 이미 적군에게 공략당하여 파괴되어있는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이는 사단의 세력이 교회 바깥보다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가운데 더 역사함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공략 당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아무 무장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단으로부터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이다.

자체 무장이 안되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사단과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없는 싸움은 혼자만의 싸움이기에 여지없이 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가 없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말고는 없다.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고나면,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자신을 과신함으로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명성교회의 사건은,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물질이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사단의 좀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둠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단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대신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욕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

씨름이라는 용어와 싸움이라는 용어에는 차이가 있다.

싸움은 상대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반면에, 씨름은 자신의 내부에, 혹은 자신에게 밀착되어있는 경우다.

씨름은 어찌보면 자신의 내면에서의 갈등이나, 같은 공동체의 일원과의 갈등일 수가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외부의 적이라면,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죄성의 이중 구조를 인정하고서 자신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씨름은 주로 욕심과 관계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이는 사단이 휘두르는 손잡이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욕심과 교만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단에게 패배하였듯이, 명성교회 세습 사건도 자신의 욕심과의 씨름에서 패배한 것으로서, 자신의 욕심을 사단에게 종속시켜버린 것이다.

명성 교회 사건은, 이들이 혈과 육이라는 욕심에서는 승리하였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는 패배한 것이다.


(직접 싸워야 할 당사자로서의 성도)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사단의 다양한 특성들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는 서로 구분하기보다는 한 존재의 다양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 존재 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공동체에 속하여 있으며, 공동체를 주관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식을 누리지만, 아직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 세상 주관자들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사단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단에게서 완전히 보호해주시기보다는,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하에 직접 사단을 대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는 전적인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장성한 어른과 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역경을 파헤쳐나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할 때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인격체로서의 아담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듯이, 성도의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보호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의 인격 안에서, 성도의 능동적 대처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한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악의 날은 인간이 사는 모든 날이 악한 날일 수도 있겠지만,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질수록 사단은 더욱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라는 무장을 해제시킨 후에, 그 자리에 사단의 방식을 주입시키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자 통신의 발달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려하기에, 인간의 내면의 악이 최대로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에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습들이, 지금 이시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현 시대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핵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는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할 것이다.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

성도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악한 날에 성도는 기도와 간구없이 상황들을 해체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상황의 악함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나가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있다.

상황을 해쳐나가기 위해서, 세상은 지식과 돈, 그리고 권력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세상은 자신들이 힘이있고 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부하고 힘있는 이들은 성도들이다.

성도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갖가지 방법과 다 갖추어져있는 셈이다.

성도에게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으며,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도의 싸움의 모습 가운데에는 삼위 하나님의 총체적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제공되고 있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이 악한 시대에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쇠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대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고통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교회를 기업으로 운영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사도들의 특징은 대부분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고난 가운데 수행하고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역경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바울이 이 시대에 생활을 하였더라면, 초대 교회시대보다도 이 시대가 더욱 힘든 시대임을 토로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유명한 목회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귀영화로 몰락하는 것을 보면, 바울도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일 것이다.

이 시대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만만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은 갇힌 자로서, 갇혀있지 않은 자를 위로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외적인 곤란에 처하여 있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어려워도 내면의 풍성함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힘든 이 시대를 풍요롭게 사는 방법은 물질이나 명예나 외적인 풍요를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말씀을 소유한 자로서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이다.


(나가는 말- 새관점)

이 시대에 싸워야할 대적 가운데 한 가지는 변질된 신학이다.

허리에 띠어야 할 진리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면 더 이상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단들도 문제이지만, 신학적 왜곡은 성도를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잡아주는 뼈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생물도 뼈대가 틀어지면 원래의 특성을 가질 수가 없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는데 가장 취약한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붕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마다 심각한 신학의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둘째치고, 알미니안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등을 거쳐 최근에는 새관점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있다.

새관점은 이머징미셔널처치(선교적 교회)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과 연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를 역사적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어야하지만,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를 거부한다.

새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속죄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함으로서 칭의 개념까지 바꾸어 버렸다.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변질 축소시켰으며,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바꿔 버렸다.

바울이 말하는 마귀의 궤계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마치 자신의 폭넓음과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세대적 사고릉 과시하려는 의도인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학문과 목회에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마치 개혁주의를 새관점으로 치장하는 것과 같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면서 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가는 말- 축귀 사역)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외치거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귀신이 들린 경우가 아니고는 자신의 내면의 욕심으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우에 축귀 사역으로 대응하게되면, 자신은 의로운데 자신은 단지 외부의 마귀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성도는 이전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하는데, 옛 사람과 마귀를 혼동하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며,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이들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작업은 축귀 사역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마귀에게 뒤집어 씌움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된다.

영적인 접근법은 종종 이원론적 사고를 가져오기에 매우 조심하여야하고, 분별력을 요구하게된다.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제로운 자신의 생활의 문제점으로 정신질환을 앓고있는데, 이를 축귀 사역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들 가운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6:42

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 묵상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사회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본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 땅에서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투영되기에, 가정과 교회에서의 성도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투영시키는 모습이 되어야한다.

이 땅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회복시킨,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성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주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순종하라는 뜻으로 볼 경우가 있다.

이는 권위자들, 즉 정치인과 상급자들의 비도덕적인 행태와 같이, 부모의 부적절한 행동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제한이 아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세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구속적 회복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순종을 부모와의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녀들의 순종은, 인간적인 방식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순종의 맥락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순종은 부모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순종은 창조 질서의 가장 기본되는 원리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질서를 회복시키셨다.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 에베소 성도들은 불순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순종의 새 사람을 입어야했으며, 부모로서, 자녀로서, 상전으로서, 종으로서의 각각의 위치에서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여야만 했다.

새로운 순종의 질서는, 하나로 통일되게 하시는,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는 십계명의 제5계명인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와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에덴에서는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에덴에서의 축복이 보장되었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조건으로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에서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에 대한 약속으로 제한적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조건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않다.

자녀에게 보장된 장수는 자연법의 맥락에서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법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은혜 아래에 있다고 자연법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으며, 율법이나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이끌어 가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시내산에서 주어진 제 5계명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구원과는 상관없을지라도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일반적인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세포조직도 지속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시키면, 변성이 일어나서 파괴가 되거나 암조직으로 변이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으며, 상황을 수용하는데에는 한계점들이 있다.

부모는 특히 자녀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문제를 유발하는 이들의 많은 경우가 부모와의 비정상적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옳바르지 못한 자녀 교육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가 된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지금은 종이나 노예 제도가 없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사회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에 종의 위치는 가정에 귀속되어있었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자식과 부모에 대한 권면에 이어서, 종에 대하여 권면을 하는 것은 상전과 종의 관계가 가정의 연장 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직장이 따로 있었다기보다는 가정과 직업이 혼합되어있었던 구조였다.

이 시대에 가정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직장이기에, 종에 대한 말씀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제한적 의미에서 직장인들의 직장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어느 정도는 종속되어 맡겨진 직책을 감당하여야한다.

바울에 종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직무 수행과 관계된 것이며, 또한 상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로 직무와 관계되어 직원을 대하는 방식에 관련되어있다.

바울이 앞에서 권면한 내용들이 가정의 영역이었다면, 이제 권면하는 내용은 직장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에서 적용되어야한다.

종은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인에게 귀속시킨 것이며, 직장은 자신의 극히 일부만 제한적으로 내어주는 것이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신분이 바뀌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여야 할 것이다.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음이라고 번역된 프쉬케(psuche,ψυχῆς)는 숨 쉬는 것으로 유지되는  영혼, 목숨, 생명을 뜻한다.

바울이 종들에게 권면하는 자세는, 외식하는 바리세인들과 같이 형식적으로 하지말고, 숨쉬는 것을 다하기까지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했다.

이들의 행함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이 행하였던 외식은 결코 목숨을 바치기까지는 아니었으며, 최소한도의 형식적인 것이었다.

행함에 있어서의 기준은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 사역이었으며, 이는 가장 완벽한 행하심이었으며, 하나님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지금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더 이상의 완전함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 할 수도 없고 알수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원리가 하나님의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의 심오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의 사랑의 연합을 담아두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에는, 남자가 아내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희생적 사랑이 요구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다는 뜻에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성육신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택한 자들과 연합하심으로서, 태초에 이미 성도에 대한 완전한 창조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 예표되어있었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인 사도들도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과 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순종으로서의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최선은 단지 생각으로서의 최선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같이 목숨을 바치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의 행위여야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들로,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부정직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구조로 되어있기에, 현실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죄악에서 자유할 수 없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 가운데 살고있는 것이다.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모든 결산은 주께서 하신다.

사람에게 하듯 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이기적 목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께 하듯이 하면 어떠한 위선과 가식,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다.

주께는 오직 진실된 행동만을 할 수 밖에 없기에,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을 진실되게 할 것을 권면한다.

종종 선한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을 듣게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값을 요구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값은 어떻게 지불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값을 치를 것인가?

주께서 주시는 것은 공로에 대한 값이 아니라 선물이다.

선물은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선물을 주시는 원리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에 대한 축복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은 순종에 대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가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려지는 것이어야한다,

주께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이란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던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던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종을 대하는 상전도, 자신의 주인의 행동 방식을 자신의 종에게 투영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인 상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에게 속한 종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며, 사단의 종인 상전은 사단의 속성을 투영시키듯이 자신의 종에게 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육신에 종속되어있는 이들에게 나타내어야만 한다.


(나가는 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등의 관계는 하나님의 권위 구조를 이 땅에서 투영시키고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의 문화는 권위 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였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 탈권위 구조에 안착되어있다,

반 세기 전에 한때 유행하였던 히피문화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권위와 권력과 전통을 거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있다.

이는 좁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넓게는 사회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에 혼란이 있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겪어온 부모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게되면서,  순종의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의 구조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면서, 또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부작용들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하고있다.

이는 국가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있다.

민주주의는 왕권에 대한 거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시작은 국민들의 불순종이 아니라 왕족들의 부패였다.

왕족들의 부패는 국민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에게 부여하셨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보다는 사단의 권세를 더 경험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변화되어야할 우선 순위는 권세자들이며, 부모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미 국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더 이상 국가의 개념에는 왕국kingdom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왕국kingdom이었으며,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왕국의 개념이다.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는 상전들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주인이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투영시킬 수가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왕국의 개념이 현실성이 없는 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체제에 있던지간에 이 땅에서는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한시적인 체체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으며, 누구나 다 하나님의 나라를 투영시키지 못하는 구조 가운데 살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삶 가운데 말씀을 온전하게 적용시키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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