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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12.29 :: 에스더 6장 1-13절 말씀 묵상
에스더 2017. 12. 29. 14:17

에스더 6장 14절- 7장 10절 말씀 묵상


14  아직 말이 그치지 아니하여서 왕의 내시들이 이르러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빨리 나아가니라
하만의 몰락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죽음의 문제)


유대인들은 부림절이 되면,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하만과 모르드개의 상황의 역전에 축배를 들면서, 취하도록 마시며 축제를 즐긴다.


상황역전은 인생 모두에게 승리감을 전해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부림절을 금했으며, 오히려 부림절과 관계하여 더 많은 핍박을 가하기도하였다.


만약에 페르시아에서 모르드개와 하만의 상황의 역전이 없었다면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왜 하나님께서는 히틀러에게서 유대인들을 구해주시지 않으셨을까?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하나님과 부림절에서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 아니신가?


왜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해놓고서, 왜 구해주시는가?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읽고 즐거워하는 유대인들이 그냥 단순하게 즐거워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부림절은 하나님의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한낱 인간적인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부림절과 같은 역전을 희망해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마땅한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역전은 누가 더 정의롭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에서 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다 죽음이라는 운명에 직면한다.


죽음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고 누구는 수명을 다하고 죽고, 누구는 편히 죽고 누구는 비참하게 죽고, 누구는 정의롭게 죽고 누구는 억울하게 죽고…..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지만, 어떠한 죽음이던 간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하다.


다양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죽음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죽음이다.


죽음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문제는, 사는 동안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느냐, 아니면 영원한 분리로 확정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사단의 패배)


하만이 몰락하는 상황은 사단의 패배와 유형적으로 유사하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유다인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시던 장면이 연상된다.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간청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함인 것이었다(요6:39).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에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다.


마치 왕후 에스더가 왕의 지위와 권력으로 하만을 직접 징계 할 수도 있었지만, 에스더는 왕에게 간청함으로서 왕이 직접 하만을 처단 할 수 있도록하였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와 유혹을 물리치심은 사단에 대한 승리로서 사단의 추락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예수 그리스도께서 70인을 세우시고 각 지역과 동네로 둘씩 앞서 보내신 후에, 70인이 귀신들도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광야에서의 시험과 유혹에 대한 승리로 귀신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상황의 역전으로 나무에 달린 하만은, 마치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사탄과 같았을 것이다.


사탄은 에덴에서 아담을 시험하여 선악과를 먹게함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사탄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로 유혹을 하였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예수님께 패배를 당하였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에서의 아담과는 달리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을 하신 후에 자신의 힘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첫 번째 아담에게는  통치명령이(창 1:28) 주어졌으며, 통치 명령의 대상에, 간교한 뱀을 포함하는, 모든 생물(창 3:1의 들짐승의 짐승과 창 1:28의 생물은 같은 용어)을 다스리라고하였지만, 아담은 오히려 생물인 간교한 들짐승의 다스림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사탄은 더 이상 예수님을 유혹할 수도 없었고, 지배할 수도 없었기에, 이 세상 권세자로서의 위치에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만이 왕을 속였듯이 사단은 속이는 자로서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거짓말을 하였지만 그의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여전히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고있다.


현대인들은 환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진리인 것은 말씀만이 참된 구원을 전하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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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에스더 2017. 12. 29. 14:16

에스더 6장 1-13절 말씀 묵상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눈을 가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눈을 밝히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시면 아무리 간단하고 쉬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신다.


왕의 행동은 자신의 자아가 신적 섭리에 종속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섭리를 통하여 주관하신다.



3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4  왕이 이르되 누가 뜰에 있느냐 하매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우연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우연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섭리를 대체하는 개념이다.


이와같은 우연이라는 상황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에 빠진 요나를 위하여 물고기를 준비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동물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주관하신다.


세상에는 우연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이다.



5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들어오게 하라 하니
6  하만이 들어오거늘 왕이 묻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만이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하고


(착각)


하만은 분명히 착각을 하고있지만, 착각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희망이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은 허황된 것이지만, 이러한 허황된 희망이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가 없다.


어찌보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나 아무 희망을 못느끼는 사람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씀 안에서의 소망이 제거된다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아무런 의욕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착각이 일반 은총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일반 은총은 구원이라는 특별 은총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오직 허무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7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8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9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자)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하는 사람과 높임을 받는 사람이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람은 높임의 근거가 자신의 욕심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다.


높임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으로서, 이러한 사람의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존중을 받아야한다.


권력의 탈취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가 아니라, 단지 도적질이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악일 뿐이다.


세상 권력에는 이 두 가지 유형이 있지만, 목회자에게도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이 적용된다.


인간적인 세습이나, 정복자마냥 자기 파워로 교회를 장악하는 사람이나, 사람을 속이면서 자신을 우상화시켜 목사교를 만드는 사람이나, 복음을 윤리나 도덕으로 변질시켜서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케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교인들을 희생시키기에, 교회에는 커다란 재앙이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하만같은 사람이 권력을 잡게되면, 재앙이 올 수 밖에 없다.  


10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11  하만이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되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니라


(역전당한 하만)


하만의 추락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메단 사단의 추락을 연상시킨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가룟인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를 팔게하고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인 것이며, 모르드개를 높인 하만과 같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스스로가 행한 것이다.

사단은 귀신같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주권적 지혜에는 따라올 수 없다.


성도는 감정적이고 육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12  모르드개는 다시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13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말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의 아내 세레스가 이르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아무리 악인이라하더라도, 상식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원리는 자연법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은총과 자연법은 어떠한 암흑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드러낸다.


사람이 마지막 심판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마음에 있기에, 한 가닥의 희망을 갖고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하심과 섭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획을 하셨을지 알 수가 없기에, 미리 단정을 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장 하찮은 미세한 먼지가지도, 심지어는 불규칙한 무수한 움직임까지도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완전하게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연은 오직 사람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우연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편의상 갖다 붙이는 말이다.


섭리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영원한 작정과는 구별된다.


섭리는 작정하신 일을 피조물의 시간과 공간에서 실행하시는 외적 행위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돌아가는 현상을 마치, 시계공이 만든 시계가 만들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더 이상 조물주의 간섭이 없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물 가운데 계속적으로 관여하심으로인해서,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고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경 시대에 한정되지 않고 지금 이 시대에도 지속되며, 성도들의 삶 가운데 깊이 관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특별한 성도에게 이차적으로 위임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다스리시며,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실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목적을 섭리를 통하여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감독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속적인 통치자이시고 보존자로서,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는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말아야하며, 하나님의 크신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한다.


섭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만물 속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신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좌우되기에, 우리의 존재와 행동은 하나님께 의존될 수 밖에 없다.


이는 성도가 기도하여야하는 이유이다.


당장은 현재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너무 많은 것을 알게되면 이를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오히려 부족함에 감사하여야한다.


섭리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한탄과 후회는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섭리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선택은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알미니안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의지와 동기가 하나님의 섭리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섭리의 은혜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사람의 행할 의지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신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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