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15. 23:10

신명기 28장 1-14절 말씀 묵상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세계 모든 민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로서 결코 다스릴 자격이 없는 민족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명령을 지킨다면, 더 이상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원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삼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되었기이에 다스림의 권세를 가짐으로서 더 이상 세상이 이기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하듯,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되면, 창조 세계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순종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은 이미 아담에게도 약속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응할 때만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삶의 원리는 창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읍에서든지, 보호되지 않는 들에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보호자가되시며, 공급자가 되시기에,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가 있다.

인간의 자기 방어에 관계없이, 거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순리적으로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이다.

복에다가 인간적인 욕심의 관점을 접목시키는 것은 세상적인 생각이다.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이었으며, 하나님의 통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타락 후에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했지만, 타락의 극대화만 초래하였을 뿐이고, 급기야는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생물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순종을 전제로한 가나안에서의 생육은 원래 에덴에서 주어졌던 명령의 결과들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또 다시 에덴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서, 가나안에서 주어졌던 순종의 결과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된 것이다.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아담은 범죄한 후에 소산을 먹기 위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여야했으며, 밭의 채소를 먹어야했지만,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기에, 수고를 하여도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땅의 저주에서 해방된 안식의 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영적인 갈증과 더불어 육적인 궁핍을 해결해주심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셨다.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수고하러나가는 시간이나 쉬러 들어오는 시간이나 모두 안식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일주일의 시작은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주일로 부터 시작된다.

성도의 한주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 위에서, 안식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안식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7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대적하는 자와의 싸움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는 승리 밖에 없다.

인간이 사는 환경은 어디에나 대적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모든 역경을 스스로 헤쳐나아가야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고생하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는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오직 순종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대적자를 물리치시면서, 안식의 풍요를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단을 물리치심으로, 사단은 이미 패배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단과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성도는 비록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새로운 승리한 존재로 세워질 것이다.


8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사람이 하는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풍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받는다면, 부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된 복은 수고의 결실을 온전히 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사회의 특징은 수고하는 이상의 문제로 인하여 수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9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한다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적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백성이 될 것이다.

만약에 가나안에서 온전하게 순종하였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성민이 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성민이 된 것이다.

 

10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아담의 순종으로 에덴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완성되었다면, 온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기에, 사단의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다.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의 근거는 약속이었다.

구속의 역사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약속, 즉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원협약을 근거로하여, 구속의 역사가 진행되며, 가나안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축복을 예표하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적절한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풍성한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계절과 때에 맞추어 내리는 비와 적절한 일조량은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심을 나타내는 놀라운 자연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자연 재해들이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에서 기인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인간의 욕심이다.

인간의 욕심은 우상 숭배와 직결되며, 현대 문명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인 것을 볼 때, 현대 문명과 우상 숭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는 세상 문명을 통한 성취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복된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행사하는 왕의 역할을 하였다.

아담이 높은 자리에서 행사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반역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할 수가 없었고,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은 두려움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다시 안식의 땅으로 초대되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어떠한 복을 받는지 증거해주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을 뿐이며, 모든 인간은 구속주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자임을 증거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높임을 받는 자가 되었다.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모압 땅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은 시내산 언약을 좀 더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주어진 명령은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를 선언한다.

이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축복과 저주가 반복된다는 면에서, 모세 언약을 아담의 행위 언약이 재연되는 행위 언약으로 보기도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5. 00:28

신명기 27장 1-26절 말씀 묵상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과 장소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존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선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선조들은 애굽에서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렸으며, 가나안 입성은 선조들의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무조건적 응답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주관자가 되며 하나님은 단순히 반응하시는 분이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하며, 하나님의 법은 일종의 자연법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는 하나님의 법은 자연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순응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법이다.

특히 가나안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거룩한 땅으로서, 자연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기에 주어진 자연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과 저주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거룩한 땅은 의인에게는 축복된 땅이지만, 죄인에게는 저주의 땅이다.

내면에 죄성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결코 축복의 땅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에 힘입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한 날에 에덴에서 쫓겨나는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는 다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세울 큰 돌은 가나안이 명령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는 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은, 안식의 성취가 아니라 안식의 성취를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위한 요구가 주어지는 검증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쇠연장을 대면, 모양 자체가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위적인 형상이 만들어지거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에 돌을 다듬는다면, 금송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가 있고, 이 돌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상들은 물건 자체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숭배의 대상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가나안은 영원한 화목제이신 그리스도와 달리, 인위적이고 지속적인 제사가 필요했던 곳이다.

인간이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언젠가는 상황이 변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가나안 생활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율법의 모든 말씀을 기초로하여 시작되어야한다.

이는 가나안 생활의 조건이다.

미국에 가면 미국의 법을 따라야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안식의 땅으로서, 이를 누리기 위해서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야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 즉 행위 언약이 가나안에서 재연되는 면이 있지만, 에덴은 언약의 성취를 통하여 안식이 약속된 반면, 가나안은 성취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 언약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에덴은 아담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이 약속되어있던 반면에, 가나안은 순종을 통하여 현재적 안식을 누리는 곳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누리는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에덴이나 가나안이나 공통적으로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을 향하여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은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 즉 행위 언약이 재연republication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영원한 안식이라는 은혜 언약을 내포하고 있다.


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되었지만, 조건이 있기에,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은혜는 더 이상 사람에게 조건적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

조건이 주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거래의 성격을 가지고있는 것이다.



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면, 율법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해보아야한다.

율법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인가, 아니면 규범인가 구분해야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요단강을 건넌 백성들에게 율법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 것을 제차 강조한다.

율법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가나안 생활에서의 요구 조건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있어서 실패하였기에, 가나안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율법이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라 조건임를 말해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적 울법주의에서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규범이라고 말하지만, 율법은 규범을 넘어서, 행위 언약의 기준이 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11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가나안은 축복을 받기 위한 땅이면서, 동시에 저주를 받기 위한 땅이다.

마치 무균실에 넣어진 음식이 부패될지, 아니면 계속 신선하게 유지될 지를 검증하는 실험실과 같아서, 부패되는 현상이 생기면 버려질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어도 검증을 위한 과정에 참여된다는 점에서 은혜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번째로 우상숭배에 대한 검증을 받는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검증에서 문제를 보였듯이, 모든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특징되는 우상은 문명의 기술이다.

조각하거나 부어만든 우상은, 현대에 와서는 문명의 발전이라는 형태를 띄고있다.

신칼빈주의에서는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문화 명령을 근거로,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종말론적 천국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즉 발전된 문명이라는 것이 원시 에덴에서 고도로 발전된 천국을 이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문명의 기술을 지향한다고 말하며, 이를 선한 방향으로 전환시켜 천국에서 보존되도록 해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는 문화명령의 개념은 성경을 너무도 왜곡시키는 해석이다.

기술은 하나님 의존적인 방식을 떠나, 인간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도시 문명의 산물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으로 생기는 문제들 조차 기술로 해결하려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다.

기술의 발전은 우상을 미화시킬 뿐이다.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태초의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께로 이른다.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없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어야하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지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러하지 못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변하는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구세주를 필요로 함을 증명해 주고있을 뿐이다.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에서는 각 사람에게 땅을 배분해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허락하셨다.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간이 훔쳐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을 다스리라고하였다.

사단은 아담을 실족시킴으로서 아담으로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영역에서 쫓겨나게끔 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환경이 있는데, 사단은 서로에게 불법적인 해를 가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훼손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있다.

인간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면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분명하게 순종을 통한 종말론적 안식을 제시하셨다.

사단은 아담의 길을 굽게하여 실족하게하였다,

가나안은 실족하여 길을 잃은 자에게 다시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고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곳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길을 스스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길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는 사단이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어 버린 자에게 길이되시고 생명이 되시면서, 능력이 없는 죄인에게 능력과 힘이 되어주신다.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객이나 고아나 과부였다.

이들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망각하는 것이다.



20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해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이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악한 행위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였다.

사단은 인간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까지 모독하려는 시도를 한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면서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범죄를 저질렀다.

가나안에서는 노골적인 범죄가 일어난다.

압살롬은 공개적으로 이러한 일을 범한다.



21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자연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짐승과 교합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구속 사역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다.


2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압살롬은 마찬가지로 이러한 악한 일을 벌인다.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남자가 집을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예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행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는 일이다.



24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구현으로서,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되고 보호받아야한다.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일종의 청부 살인으로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이다.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저주에 대한 선포는 단순한 규범을 넘어서 행위 언약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과 선악과 명령이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였던 행위 언약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과 같이, 에발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저주는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저주는 행위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물임을 말해주고있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3. 23:25

신명기 26장 1-19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처음 소산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받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자의 기본 자세이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하였던 오랜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이었다.

현재의 존재와 풍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과정에 빚을 진 것이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성도가 현재 누리는 풍요는 수천년의 구속 역사의 과정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룬 결실들이기에, 결코 감사함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가진 것을 아무리 많이 하나님께 드린다할지라도, 이제껏 주신 축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예배하려오는 자는 감사 예물을 가지고 온다.

제단 앞에 놓여진 광주리 안의 맏물은 속죄와는 무관한다.

가나안에서의 제단의 우선적 역할은 속죄에 대한 것보다도 감사에 대한 것이다.

속죄에 대한 것은 이차적으로 가나안에서 드러나는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었다.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제단 앞에서 아뢰는 고백은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기에, 아뢰는 것은 사실을 고하는 것보다는 마음에 새기기 위한 것, 마치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서, 마음에 기억하게하는 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일종의 신앙고백을 함으로서,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를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선택받아 애굽에서 크게 번성한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에 가나안에서 다시 번성하여 크고 강한 국가가 되는 것으로 반복된다.

이는 애굽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된 상태가 최종적 상태가 아니었듯이, 크고 강하고 번성되었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최종적 상태가 아니라 그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세계에 유래가 없는 발전을 하면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지만, 이는 최종적 상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크고 강하고 번성된 민족은 오직 패망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이 고난 가운데 출애굽을 하였고,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를 맞이했듯이, 번영된 대한민국은 어려움 가운데 또 다른 희망을 기다려야만 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어려운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또 다른 희망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부당한 대우와 고통과 심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결코 애굽에서 나와야 할 필요성을 못느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이방인의 압제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일제의 압제가 없었다면, 선교사들에게서 희망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며, 한국이 복음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제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는 마치 바벨론이나 애굽과 같은 필요악일 뿐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졌다고 이를 미화한다면,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미화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악이 미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36년은 이조 500년의 뿌리깊은 유교 사상의 맥을 잘라내는 역할을 함으로, 대한민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으며, 한국전쟁은 각 지역의 뿌리깊은 배타성과 지역 텃세를 없애는데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아직도 지역 텃세가 남아있는 경주와 제주와 강릉이 가장 복음화율이 낮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는 것이다.

일제와 한국 전쟁도 어디까지나 애굽과 바벨론 세력과 같은 존재로서 결코 미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였다는 이유로 미화될 수 있음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더라도 악일 뿐이다.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가 원동력이 된다.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인격적 반응이며, 응답으로 이루어진 상황에 대해서는 기도한 이들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기도를 원하신다.

기도 없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인격적 반응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중보자의 기도가 있었지만, 구체적 응답을 위해서는 당사자의 기도가 요구된다.

기도는 인격체로서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인격은 삼위 하나님의 인격에서 출발된다.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존중되어야하며, 기도 응답은 인격적 존중으로 인한 반응이다.

말을 하는데도 반응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한다고 느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부여한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시기에, 결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출애굽 과정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간섭은 애굽에 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이미 애굽의 문화에 깊게 물들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내에 자리잡고 있던 내면의  세계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보여주시는 것은 외부의 세력 못지 않게 내면에 자리잡은 세계관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이들에게까지 항상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기도하지만,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방법이다.

어느 정도 성장한 신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방식을 끊임없이 구해서는 안된다.

지속적으로 부흥회를 쫓아 다니거나, 신사도 운동에 심취하거나, 관상기도에 몰입하여 잘못된 인위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한다면, 이는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성한 신자는 오직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 요구되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안식의 땅이다.

가나안에서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거룩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능력 밖에 것이었다.

가나안과 달리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도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으며, 교회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거룩함의 요구라는 점에서 가나안이 애굽과 구별되었듯이,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곳이다.

외적인 건물 위주의 유형의 교회는 무형의 교회를 제대로 표현해주지는 못하지만, 세상 속에 들어가는 무형의 교회는 거룩함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한다.

무형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세력이 커지면 경계의 대상이 된다.

이는 애굽에서 번성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결코 교회를 수용하려고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변화시켜서 거룩하게 만드시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구별된 거룩함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상에서 성도를 구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는,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에서, 거룩함에 참여한 구별된 사람들이 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지만,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탄생된 교회가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 처치이며,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구별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려는 전통적 교회와 구별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문화칼빈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은 모든 피조세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우주적 교회를 지향하고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One Kingdom개념이며,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두 나라Two Kingdom와는 구별이 된다.

One Kingdom개념의 선교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되었기에,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시켜야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를 종식시키는 안식의 땅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안식은 거듭난 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피조세계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으며, 새옷으로 갈아입을 헌옷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이라면, 이미 이 피조 세계는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어야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너무 앞서나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신앙의 고백 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산물을 가지고 왔다.

성도는 이제껏 자신을 인도하신 것에 대한 고백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성도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13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는 공동체적 풍요로 이어져야한다.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는 빈곤한 자들이다.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풍요를 어느 정도만 나누었다면 세상이 교회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이다.

성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풍요를 나눔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성물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애곡하는 것과 부정한 것과 죽은 자는 생명과는 반대되는 것들이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풍요를 제대로 누릴 수만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의 요구가 성취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곳이 될 수 있었다.

가나안은 생명으로 향하여있기에,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의 소산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덧입혀져서는 안된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산물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감사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에덴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면, 하늘과 땅은 완전한 연합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가나안은 이 땅에서 특별하게 구분되어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과의 연합을 준비하는 거룩한 안식의 장소로 준비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하늘의 풍요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의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준비된 가나안에서, 정작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한 아담을 대변해주고 있으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참이스라엘이 되시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도록 필요성을 제기하는 도구가 되었다.

성도는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현재적으로 임한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한다.


16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살기에, 규례와 법도를 넘어서는 안식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가나안은 한 가지로 획일화 되어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이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법도이며 삶의 방식이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여야한다.

가나안과 달리 이 세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진리의 기준이며, 자신의 생각이 삶의 방식의 기준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말하는 자를 용납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사회는 이스라엘의 종말과 유사하다.



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요구이다.

가나안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먼저 들어가게 하고서 자격이 있는 삶을 살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 응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 된 것은, 이들이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하시고, 후에 가나안에 합당한 삶을 요구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서 모든 명령을 지키라고하는 것은, 마치 돈을 벌어서 물건을 사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물건을 주고서 후에 갚으라고하시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애굽 땅에서 먼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간구에 응답하시고 명령을 지키라고는 요구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이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전부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인 공급만  하신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였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도 누구나 다 하나님께 간구한 응답으로 구원에 참여하였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의무가 있다.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선택받은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뛰어나게 하신 것이지 원래 뛰어난 민족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만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기대되었던 성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성도들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백성인 성민이 된 것이다.

성도의 존재와 위치가 어떠한 지를 생각할 때, 최소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은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2. 23:24

신명기 25장 1- 19절 말씀 묵상


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아무리 사람이 범죄를 하였을지라도 인격체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손상된 형상이 회복되어야 할 땅이기에, 범죄한 인간이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경히 여김을 받으면 안된다.

공정한 재판에 의한 판결이라도 사십이 넘는 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는 집행이다.

재판은 공정하게 하되, 인격에 손상을 입을 정도의 지나친 집행은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십은 더 이상이 필요없는 충만한 숫자다.

성경에는 사십에 관한 숫자는 수 없이 많이 나온다.

모세는 사십세에 광야로 도망을 갖고, 사십년을 광야에서 지낸 후에 사십년을 사역했다.

노아 때에는 사십주야를 땅에 비가 내렸으며,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셨으며,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가나안 정탐꾼들은 사십일 간을 정탐하였던 것과 같이, 사십은 더 이상이 요구되지 않는 충만한 숫자임을 볼 수 있다.

죄인에게 사십 이상을 때리는 것은 인격의 손상을 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존중받아야할 사람을 경히여기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예표적으로 회복되는 곳이다.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일을 하게하면서 먹는 것을 금하게 하는 것은 비열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성이 상실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가나안은 모든 피조계물의 탄식을 씻어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선취적으로 경험하는 곳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선취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다.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곡식을 떠는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한 하나님 나라를 떠는 사람으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는 특혜를 누릴 수가 있다.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바울은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

”라고 남편이 죽으면 자기 뜻대로 시집 갈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을 말하고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일부러 형수치수제를 거부하는 것인가?

바울이 전하는 말에 형수치수제를 지키고있던 이들은 혼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바울은 반율법주의자가 되고말 것이다.

하지만 형수치수제가 원시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에까지 존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구속을 약속하신다.

흔히들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통해서 구속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할 것을 알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고자, 헤롯을 이용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

가나안은 영원한 구속의 나라를 예표하는 곳으로서, 구속주가 오실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원시복음이 실현되어야 할 곳이었기에, 형수치수제는 꼭 필요하였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룻이 들어간 것은 형수치수제에 의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신약에서는 이미 원시복음이 실현되었기에 더 이상 형수치수제가 필요치 않다.


11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그의 남편을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지니라

정당 방위나 성적인 개념보다는 대를 이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위를 손상시킴으로서 대가 끊길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단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를 상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이러한 조치를 취함으로서 사단의 계략을 사전에 막고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대를 끊는 행위를 한 손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이므로 불쌍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16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두 종류의 저울추는 상대방을 속임으로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속임수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은 가나안이 받게될 심판을 왜곡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속이는 것은 비단 저울추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과대포장하는 것도 일종의 속임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학위라든가 경력등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나간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가치 평가는 경제 활동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하는 위선적 행동은 일종의 속이는 저울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에게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속이는 행동이다.

서구에서는 종종 기독교인을 hypocrites라고 부르기도한다.

즉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사회에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을 이해한다고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은 상대방으로하여금 판단에 오류를 일으키는 공정하지 못한 저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자신을 과대포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사회이기에, 가나안의 속성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을 막는 행위는 단순한 방어 전쟁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가로막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다.

아말렉이 악한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고자하는데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서 산꼭대기에 선것은,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이 일종의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 속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뱀이 되어 애굽 술사들의 뱀을 잡아 먹었던 지팡이였다.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수아의 승리는 사단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아말렉이 천하에 기억되지 않으리라는 모세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1. 22:44

신명기 24장 10-22절 말씀 묵상


10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11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약자, 가난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규정된 법이다.

비록 가난하여 돈을 빌렸을지라도,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을 당하면 안된다.

집 안의 영역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 되어야 할 영역이다.

집 안의 영역은 공개적으로 노출되어서도 안된다.

초대받지 않고 집 안에 들어오는 행동은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옷을 해입히심으로서, 수치를 가리우셨다.

벌거벗겨진 아담의 수치를 가림으로서, 아담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셨다.

아담의 인격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담의 수치는 하나님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약자건 강자건 간에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들로서, 이들의 고유 영역에 대한 침범은 하나님의 인격적 영역까지 침범하는 행동이다.

약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침범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행동이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수치를 가리우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수치를 가리우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희생을 넘어서, 인간이 받을 모든 수치를 받으시면서, 수치를 직접 담당하셨다.

집 안의 영역을 침범하여 수치를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립이 된다.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함으로서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빚진 인간의 수치를 가리시는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가나안에서 시행되어야 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실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이 담겨있는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인격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현대 문명의 악함은, 상대방에 대한 영역 침범 방식에서부터 볼 수 있다.

19세기말 산업의 발달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과 자원이 필요했다.

영국이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일찍 발달된 산업으로 말미암아, 상품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고, 산업 시설을 가동하기 위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다른 나라의 영역을 침범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뒤늦게 산업의 대열에 합류한 나라들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나머지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산업화가 늦은 독일은 물건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이미 산업화가 된 나라를 침략하면서 제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것이었다.

현대 문명 사회는 산업의 발달로 특징 지워지며, 시장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영역 침범만이 생존의 길이 되었다.

시장 경제 원리로 운영되는 현대 사회는 국가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빚진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일제 식민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외국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IMF기간에는 나라 안의 영역을 외국의 자본가들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원칙은, 역으로 현대 사회가 하나님의 구속 원리를 거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회 개혁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해방신학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만 사용될때는, 그 안에 담겨있는 구속의 원리를 상실하게 된다.



12  그가 가난한 자이면 너는 그의 전당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13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


인간에게 매일의 안식은 그 다음의 생활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매일의 안식은 한 주의 안식을 이루어가고, 매주의 안식은 점진적으로 희년으로까지 나아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실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 주지 않으면, 그는 그 다음날 생계를 이어갈 수가 없다.

해질 때에 가나한 자에게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은, 자연법적 일반 은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행동이 그리스도의 안식을 예표하는 행동이 될 때,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면 안되는 것이나, 해질 때에는 전당물을 돌려주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은, 가나안이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일상의 삶 가운데 적용되는 자연법적 원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안식이 전파 될 때,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비록 가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었지만, 땅에서는 빈부 격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빈부 격차는 제도로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속성을 가지려면, 함께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이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이방 민족들에서나 볼 수 있는 행동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공동체적 연대감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 사역과 같은 속성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가나안에서는 학대가 재연되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의 학대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를 망가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당일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매일의 안식은 성취 후에 가능하다.

에덴에서의 매일의 삶은 매주,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있었으며, 이는 아담의 수고를 근거로하였다.

에덴에서 수고의 결실로 안식이 약속되었듯이, 가나안에서의 수고에는  안식이 예정되어있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수고에 의한 안식으로 귀결된다.

타락한 인간은 품삯을 간절히 바라는 가난한 자들이기에, 하나님의 공급하심 가운데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있는지를 인식하여야 한다.

사람은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다면, 매일의 안식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16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 가운데 놓여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더 이상 죽음이 전달되지 않게 생명을 공급해 주신 것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죄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곳이 되어야했다.

하지만 실제 가나안에서도,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일원의 범죄로 말미암아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의 죄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불순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대립된다.

아간의 범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다.

아간의 범죄는 마치 암조직과 같아서, 제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암수술을 할 때는 암조직만 제거하면 쉽게 재발된다.

건강한 조직이라도 암조직 주변의 조직들은 이미 암 조직의 영향을 받은 상태이기에, 주변의 건강한 조직도 어느 정도는 같이 제거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아간에 속해있는 것들은 이미 아간의 범죄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이다.

이 부분도 같이 제거되지 않으면, 또 다시 아간의 범죄와 같은 죄가 재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은 언제나 환경만 조성되면 죄악으로 나타나게된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고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가나안에서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식이 죽은 것을 이해하려면, 내면의 본질적 죄와 죄를 짓는 악행을 구분하여 이해 할 필요가 있다.

가나안에서 행함의 죄가 없었다면,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행위 언약은 본질적 죄에 대한 것보다 행함의 죄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의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으리란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본질적 죄의 단절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내면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문제 해결이 없이 외적인 행함의 죄가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죄성의 문제에까지 접근한다.

그리스도는 행함의 죄에 대하여 용서하면서, 본질적 죄에 대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하게하신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인간은 거듭났다고하더라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체질 자체가 사망의 몸이다.

본질적 죄는 해결되었어도 죄의 체질은 그대로 가지고있다.

성도는 행함의 죄와 본질적 죄, 즉 아담으로 인한 죄의 문제는 해결 되었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해결 될 것이다.

완전한 죄의 단절은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성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을 하셨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약자에 대하여 강퍅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을 성취하였다면, 인간의 교만은 통제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그리스도께서 속량해주셔서 자유인이 되었다면, 이는 평생에 기억에서 잊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되며, 교만의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종이었던 자가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속량 받았음을 인식한다면, 결코 약자를 괴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는 자신이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자신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였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소득의 일부를 남겨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의 부요를 자신에게 나누어주신 것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고아였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홀로 지냈었지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이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는 나그네이지만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있는 부요한 자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10. 21:15

신명기 23장 19절- 24장 9절 말씀 묵상


19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20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자를 받는 행위는, 꾸어주는 대상을 상대로 이익을 취하는 행위이다.

세계는 경제 원리로 운영이 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경제 원리로 운영되지 않는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았듯이,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 유지된다.

이자를 받는 행위가 조직화 되고 확대된 것이 은행이다.

은행은 자본주의 운영의 핵심주체이다.

가나안에서 형제에게 이자를 받는 행위가 공식화될 때, 가나안의 공동체는 이익 공동체로 전락 될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투영되는 곳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방인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기에, 이들에게까지 이자를 받지 않을 필요는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려면, 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서 이익을 취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청년들에게 창업 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줘서 청년 실업률을 낮추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청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경제 원리도 도입되면 안되며, 도와주려면 차라리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도와 주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기독교화하자고하지만, 경제 운영의 원리에서 교회가 사회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경제공동체는 단지 자연법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될 뿐이다.

무슬림 국가는 종교와 국가가 하나가 된 곳이다.

무슬림들은 국가를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 생각한다.

무슬림들은 은행에서 서민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대출해주는 국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도 이를 본받아서 시행하려고하지만, 신정국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한다.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은 생각이 그리스도에까지 미치지 못하고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가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희년에는 꾸어준 것까지 면제해주는 제도를 가지고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서로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은, 더 나아가 이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전가받아야할 것을 예표한다.

이자를 받지 않는 행위는, 희년제도로 이어지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이다.


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은 언약은, 지켜지지 않을 경우 쪼개진 짐승과 같이 죽음을 각오해야했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일종의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언약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행한 서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죽은 자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으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 갚겠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이다.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말라는 구절은, 교회에서 약정한 헌금을 독려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약정의 성경적 근거가 모호한 상태에서, 서원에 적용된 구절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은 하나님과의 거래이며, 돈주고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서원한 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이유로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였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한나의 경우는 하나님께 수 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행한 약속이기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입다는 그러하지 못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주님의 소유이기에,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인식 부재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전에 예배당 건축 후에 있은 부흥회에서, 부흥 목사가 와서 갑자기 쪽지를 돌리면서 그 자리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 헌금을 약정하도록 쪽지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부인은 성가대석에서 떨어져있는 남편과 손짓으로 서로 싸인을 하면서 적어내는 것도 보았다.

부흥회가 교인들을 상대로 협박하며 삥뜯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성도는 결코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며, 성경 말씀이 헌금 강요에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잘못 약정한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깊이 회개하며, 정리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서원을 무조건 지키어야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서원을 하지 말아야하고, 서원을 했을 경우에는 가능한 지켜야하겠지만, 능력이 없을 때에는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서원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주고 얻어내려는 잘못된 방법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가 아니다.

약정헌금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나쁜 방식이다.

약정을 해놓고 교회의 여러가지 낙담되는 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도 보게된다.

헌금은 오직 감사를 기초로하는 것이며, 이미 주어진 능력 안에서만 하면된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헌금을하게 하고서는 대단한 신자라고 설교에서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한다.

목회자의 의도도 나쁘고, 성도도 자신의 욕심과 명예, 체면을 위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헌금을 독려하는 방법으로 종종 사용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교인이 마음에 낙담이 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나쁜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 보면 안되는데, 이러한 방식의 헌금은 서로가 서로를 이익의 대상으로보면서 나오는 결과이며, 교회 변질을 가속화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다.

한국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려면, 이제껏 한국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고치면서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즘도 가장 잘 써먹는 나쁜 관행 가운데 하나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칭하면서, 헌금을 성전건축헌금으로, 헌당예배를 성전 봉헌식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다.

예배당은 절대로 성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단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을 볼 때, 아직도 교회와 교단이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부흥의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러한 제도를 이방인과 나그네를 위한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포도원과 곡식밭의 이웃 사람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

전혀 못먹게 하면 서로 각박해지며, 그릇에 담아가면 대책이 없다.

도움을 받는 규모를 정하는 것은 서로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규모가 없는 과도한 요구는 서로에게 해를 줄 수가 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가끔 가진 자나 능력있는 자가 교회의 과도한 기대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적용하면 대책이 없어진다.

교회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좋겠지만, 서로에게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해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이 거룩한 안식의 땅이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강한 제도적 규제가 없으면,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님을 드러낼 뿐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고,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생길 수 있는 악행을 규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에 재결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아내를 맞교환하고서 즐기다가 다시 돌려받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내를 서로 바꾸어 일주일간 생활해보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었다.

이것이 좀 더 발전 된다면, 충분히 아내를 교환하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 8)”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제도를 악용하여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다.

스와핑같은 극단적인 예를 보게되기도 하지만, 이는 순결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희롱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가나안은 거룩함에 부합된 행동만을 하여야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심이 되는 존재들이었다.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어지는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여도,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가 없이는 어떠한 대책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값으로 성도를 사심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남으로서, 더 이상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영원한 종말론적인 나라를 예표하듯이, 교회는 거룩함을 입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다.

이 땅에서의 가나안은 많은 대책을 세워도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더 이상 율법의 규제가 없어도,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영생을 누릴 수가 있다.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혼인의 귀함을 강조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하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다.

일 년이라는 기간은 일반 군대에서 결혼한 이에게 주는 며칠간의 휴가와는 비교가 안된다.

1년이라는 기간은 혼인하고서 아내가 임신과 출산후에 산모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는 기간이다.

일 년의 휴가는 혼인한 이에게 단순히 함께 하는 즐거움보다도 출산과 더불어 생육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다.

남자가 혼인하고서 바로 군대에 간다면, 모든 힘든 상황은 아내의 몫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혼자 놓아두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장성하게된다.


6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 땅에서 실천하여야한다.

맷돌의 위짝을 전당 잡는 것은 가나안을 야박한 사회로 만드는 행위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본래 아담 안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그나마 가나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생존의 기회를 얻게하심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한다.

생존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는 자의 원조는 사단이다.

사단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한다.

사단은 현대인들이 자신에게 종속되도록, 온갖 유혹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의 필수적인 문명의 기기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걸려들게 하는 속성들이 있다.

현대인들은 발달될 문명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시간과 공간을 사단에게 종속시키고있다.

현대 기기들의 편리하고 빨라진 처리 속도들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더욱 시간이 모자라게된다.

더욱 편리해진 기기들은 사람들의 모든 관심들을 빼앗아가면서 하나님께 향할 시간을 없애버린다.

스마트폰의 보급은, 사람을 더욱 더 바보로 만든다.

얄팍한 정보들은 결코 사람을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가나안이 심판을 받은 것은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하였을 때이다.

하나님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죄악의 보편성은 마지막 심판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8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

9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나병 환자가 진영 안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에 나병이 번질 우려가 있다.

나병 환자를 진영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미리암의 경우와 같이, 나병은 잘못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병 환자가 격리되어야 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자들은 공동체에서 일정 기간 격리하는 조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이를 행사하기 위해 교회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을 치리하여야한다.

요즘 교회에서 치리가 사라진 것은, 잘못한 이들이 없거나, 아니면 교회가 치리를 행사할 만큼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6. 9. 23:34

신명기 23장 1-18절 말씀 묵상



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자들이다.

여호와의 총회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생식기관은 혼인과 자손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혼인과 구원 사역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환이 상하거나 음경이 잘린 것은 돌이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인 것이다.

흠이 있는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저주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의 거룩한 영역에 참여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에 참여시키신다면, 이방인인 우리도 다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라고 하더라도, 백성까지 안식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라고 할 수는 없다.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단지 땅이 주는 축복을 넘어서 공급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 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의 땅에서  하나님과 정상적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조건이 주어진다.

가나안의 속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구원의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잘못된 해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율법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직결된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적당히 은혜를 베푸셔서 해결하신다면,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성경의 중심이고 그리스도는 부차적인 존재라면,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은 이제껏 잘못을 범해 온 것이 된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가 맞다면, 개신교 500년 역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 된다.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하여 밑에 따로 정리해보겠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신율주의적 관점은, 복음을 전혀 다르게 풀어나가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함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게된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하나씩 더해짐으로서 이스라엘은 점점 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만약에 현대 사회에서 사생자에게 총회에 들어올 자격을 제한한다면, 아마 법적인 고소가 들어갈 것이다.

인권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 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는 자격 제한이 본인의 잘못이 아닌 태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절에서 고환이 상하거나 음경이 잘린 것도 사고로 인한 장애가 요인이었다면, 이들에 대한 제한도 인권 문제를 야기하였을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사항들은, 보편적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나안에서의 여호와의 총회는 거룩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가나안 땅이 안식의 땅이기에, 가나안에서의 안식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참된 안식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며, 온전한 의가 조건적으로 요구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하나님께서 충족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이다.

은혜가 참된 은혜가 되려면, 인간에게 조건이 요구되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태생적인 조건은 인간의 능력 밖에 문제이기에,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과제만을 안겨주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태생적으로 잘못된 존재들이다.

육체적 결과들은 타락의 이차적인 결과물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흠이 있는 자들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궁극적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면, 하나님은 실패하신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충족되어질 것을 예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이었다.

새관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가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있다.

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거룩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질 참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를 위한 것이다.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한 이들이었다.

일종의 성령 훼방 죄에 속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모압 여인 룻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듯이, 구원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민족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되고있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과거의 행적이나 선조의 악행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모압 여인 룻이 그리스도의 족보에 참여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이방인들에게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넘어서는, 인간의 본질적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실 뿐이다.

사용되어지는 사람은 중요하지가 않다.

발람이 활동하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이방신들의 발상지였다.

발람은 이방신들 사이에서 움직였던 점술가였다.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으며, 마치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던 자일 뿐이다.

발람은 결국에는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구원 사역이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로막는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한때 가룟 유다는 과연 죄인인가?”라는 논제로 활발한 토론이 있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나중에 배도한 교역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효력이 있으며,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고하더라도, 이로인하여 발람이 복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저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이 받을 모든 저주를 감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받을 저주를 대신 다 받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는 피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저주는 변경되지도 않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임하는 것이다.

성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저주를 하여서는 안된다.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행함을 기억하시고 이를 자손들에게 적용시키신다.

인간의 존재는 조상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다.

“인간이 무엇이며,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끝없는 사고를 하는 철학자들이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아담 이후로 쌓아온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악에 대하여 자유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여호와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한 에돔과 애굽 사람에 대한 징계는 비교적 가볍다.

암몬이나 모압 사람과는 달리 에돔과 애굽 사람에 대하여는 가벼운 징계가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과 존재가 어떠한 지를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적으로 잘못된 관계에 있어도, 그 근원은 축복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러한 차별 마저도 없어진다.

구약에서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공로가 인정되었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마치 달빛에 의지하던 이들이 해 아래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성도는 불교에서 공양을 하듯이 이 생에서 업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조명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9  네가 적군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지니
10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영 밖으로 나가고 진영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11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
12  네 진영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13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14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온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용되어지는 자는 정결함이 요구된다.

인간적인 불결함은 자칫 하나님의 거룩성을 손상 시킬 수 있다.

성적인 것과 배설의 본능은 인간의 체질적인 것이지만, 이는 인간의 체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기에 부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도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체질까지도 변한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거룩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것을 볼 때, 값비싼 복음이 너무 값싼 복음이 되어버린 것 같다.


15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16  그가 네 성읍 중에서 원하는 곳을 택하는 대로 너와 함께 네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고 그를 압제하지 말지니라


이는 마치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말아야하는 것과 같다.

탈출한 종을 그 주인에게 다시 돌려보낼 때 그 종은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성도는 사단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된 이들이다.

그리스도는 종되었던 우리를 결코 옛 사람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신다.

배교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되었던 이들이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실체가 드러난 것 뿐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의 모양만 가지고있었을 뿐이었다.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는 가나안의 더러운 문화가 수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 세워지는 현대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창기나 남창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성을 더럽히는데 가장 앞장 선 이들이다.

성은 궁극적으로 구원과 직결되어 있으며, 우상 숭배는 성적 타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이들이 여호와의 전에 번 돈과 소득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혼전 순결은,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성도의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순결을 경히 여기고, 성을 문란케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를 거부하며 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어야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선교적 교회나 이머징 처치는 창기나 남창들의 헌금도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있으며, 동성애자들의 결혼 장소가 되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출애굽을 하였듯이, 교회는 잘못된 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곳이 되어야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졌는가?


여호와의 총회의 거룩성이나, 이스라엘 진영의 거룩함,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서 창기가 허락되지 않음등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가운데 있기 위한 조건들이다.

여기서 가나안 땅의 거룩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성은 구분이 된다.

가나안은 거룩함이 요구되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거룩성에 맞게끔 거룩함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해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는 새관점의 주장은 너무나도 확대된 해석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지 실체는 아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고 묘사하는 새관점의 주장의 토대는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으며,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지킨다는,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하여 간단한 정리와 비판을 하고자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와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2.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4.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선택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5. 순종에 대한 요구는 선택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이다.

7. 속죄를 통해 언약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롭게 할 수 있다.

8.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이나 속죄, 혹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9. 선택이나 궁극적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상이 언약적 율법주의를 제창한 새관점주의자인 샌더스E. P. Sanders의 주장이다.

울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방식으로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을 조사해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지침으로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이 톰 라이트의 주장이다.

이 자체만 볼 때에는 설득력이 있고,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기에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몇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다.

1.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 중심은 출애굽과 율법이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출애굽과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었기에 그리스도에게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언약적 율법주의 구도에서의 구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거나 예표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적 저주를 제거하는 죽음일 뿐이었다.

만약에 예수의 역할이 이러하였다면, 구태여 하나님이신 예수의 성육신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통적 삼위일체 개념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우상 숭배나 불순종의 개념은 주요 주제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 즉 음식법과 제사법과 할례법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이스라엘이 감당했어야했던 선교적 사명을 배타적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교만하여졌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개념을 아담의 범죄와 연계시키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는다.

3.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제거하고 언약 축복을 온 세계에 전달하는 것으로 본다.

이로서 신약의 교회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4. 새관점의 근거가 되는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가 과연 당시의 초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변해주고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예수 탐구에 근거한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해석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이라는 근거가 없다.

좀 더 광범위한 자료들을 살펴보아야하며, 해석 또한 부분적이 아니라 포괄적이어야만 한다.

몇몇 표본 자료만을 토대로, 신율주의라는 전제하에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5. 사도행전의 주제와 제2성전 유대교의 주제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변이 없다.

성경의 자료보다는 성경 이외의 자료에 더욱 비중을 둔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개혁주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6. 언약적율법주의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말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다.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부분적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하며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선행을 요구한다.

은혜언약이 은혜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행위언약이 성취되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은혜를 성취하기 위하여 행위가 요구된다면 이 요구를 누가 담당하는냐에 따라서 전적인 은혜냐 아니면 절반의 은혜냐가 결정이 된다.

새관점이 말하는 은혜는 인간의 행위가 요구되기에, 반펠라기우스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7. 언약적 율법주의의 주제는 믿음이 아니라 행위이다.

바울은 행위 구원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갈라디아서 3:1-4 )

이외에도 많은 비평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복음이 성도에게 또 다른 행위를 요구한다면,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복음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이다.

새관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인간이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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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8. 23:03

신명기 22장 13-30절 말씀 묵상



13  누구든지 아내를 맞이하여 그에게 들어간 후에 그를 미워하여
14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이르되 내가 이 여자를 맞이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가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15  그 처녀의 부모가 그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가지고 그 성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16  처녀의 아버지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17  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에게서 처녀임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의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18  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19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을 씌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평생에 버릴 수 없는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에덴에서 창조된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룰 처녀에 비유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신부는 무조건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한몸을 이루기 위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다.

한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받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귀중한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는, 지상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귀한 존재이며, 바로 성도가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비방거리가 되거나 미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성도는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20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21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할지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어야했던 아담이 범죄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처녀성의 상실에 비유될 수 있다.


처녀성이 상실된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했던 것과 같이, 아담과 하와는 에덴으로부터 쫓겨나서 죽음의 길로 들어서야만 했다.

처녀성은 에덴에서의 유혹을 통한 범죄로 상실되었으며, 사단과 간음한 것이 된 것이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의 종말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귀결되어야만 했었다.

안식은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도달될 혼인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아담의 범죄로 처녀성을 상실하였지만 ,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끝까지 구원하시어, 자신의 의로 옷을 입히시고, 정결케하시어, 다시 신부로 맞이하신다.

비록 에덴에서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종말론적 안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서 순종을 통하여 종말론적 안식에 이르시고서, 성도를 자신의 의로운 자리로 초대하셨다.

성도가 신랑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서 거할 종말론적 안식의 관점에서볼 때, 에덴에서의 아담은 결혼을 위하여 준비된 처녀였으며,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처녀 이스라엘이었다.

혼전 순결의 중요성은 처녀 이스라엘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를 통하여 간음을 한 것이다.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 처녀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듯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서 우상 숭배를 하지 말아야만 했던 것이다.

가나안의 주제는 우상 숭배였으며,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답게 끝까지 순결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결함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었기에, 순결을 잃은 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인간이 이미 순결을 잃은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의 우상 숭배는 성에 대한 자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동거 문화는 혼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거부하며, 인간 방식을 고집하는 타락한 이들이 보여주는 문화인 것이다.

동거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잃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인간은 간음 할 수 있어도, 영원한 천국에서는 간음 할 수가 없다.


간음은 아담의 타락에서 유래되었다.

유부녀는 이미 남편과 한 몸이 된 자이다.

유부녀의 간음은 남편을 욕되게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우상숭배를 하게되면, 그리스도를 욕되게하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그리스도께 사신바되어있지 않다면, 인간은 언제나 타락한 천사와 같이,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영원한 땅에서 인간이 타락 할 수 없는 것은, 심성이 변화되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영원한 땅에서 타락할 자격이 이미 상실된 것이다.

영원한 가나안 땅에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인간의 공로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비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약혼한 상태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기에, 정당한 사유가 없이는 약속을 파기 할 수가 없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는 서로에 대한 의무가 주어진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약혼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행위 언약이 존재한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약혼한 여자가 어떤 남자와 동침하는 것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약혼과 마찬가지로 언약 관계에서는 서로가 의무를 지키지 않게 되면 이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을 맹세함으로서 하나님과 약혼한 사이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기에, 하나님을 배반한 자, 곧 불순종한 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불순종한 자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성도를 값으로 사셨기에, 성도는 더 이상 선택의 자유가 없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인 것이다.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과 공존 하실 수가 없으시다.


인간이 하나님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악이 허용되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성결이 유지되기 위해서 악을 끊임없이  제거하여야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나안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과제만 안겨줄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2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26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27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강간의 원조는 사단이다.


음란한 마음을 품는다는 자체가 인간이 사단의 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인간이 사단의 종이지만, 강간하는 자는 마음의 소욕을 제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성폭력은 하나님의 기본 창조 질서를 파괴하며, 하나님의 구속을 방해하는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한 죄는 분명한 죄가 있다.

사단이 유혹을 하였을때 거절할 수도 있었고, 에덴을 거느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사단에게 강간당한 자가 아니기에,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와가 에덴에서 속임을 당한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유혹에 이끌린 쌍방적인 것이다.

일방적인 성폭력과는 다른 것이다.


28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29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결혼하지도 않고서 동침을 하고, 결혼에 대한 의무감도 가지지 않는 것이 동거문화이다.

이들은 둘이 한몸이 되는 원리를 무시하고, 필요할 때 자유롭게 헤어진다.

동침하는 것은 한 몸을 이루는 통로이다.

성에 대하여 자유하는 이들은 성관계로 인하여 둘이 하나가 되는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고전 6:16)


동침하는 것은 한 몸이 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한 책임이 따라야 할 것이다.



30  사람이 그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이미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근심이 되었던 일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함으로서, 공개적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에덴에서 사단에게 기회를 허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잘못이 있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약혼한 이들이었다.

비록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함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종말론적 안식에 이를 자격이 상실되었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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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7. 22:08

신명기 22장 1-12절 말씀 묵상


1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2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 줄지니
3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공동체의 일원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타인의 잃은 것에 대한 관심과 회복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데 기본이되는 속성들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공동체 안에 있으면 형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이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참된 이웃에 대하여 설명하셨듯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성이 성도들 가운데 구현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형제의 잃어버린 가축이나, 곤경에 빠진 가축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참모습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수치와 고통을 감당하시면서 구원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 모르는 성도라도 형제로 인식하고서,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곤경에 처한 형제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5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시대가 점점 더 남녀간의 경계가 없어진다.

성별의 구별은 창조 질서, 더 나아가 구속의 원리에서 중요하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교회를 예표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원리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성에 대한 구분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중요한 원리이기에, 성에 대한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6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아무리 동물이라도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인간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레위기에서는 “암소나 암양을 막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지니라 (레 22:28)”고 기록하고있으며, 신명기에서는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신 14:21)”고 기록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

동물들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표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속을 기다리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어떠한 형태의 모습도  취하여서는 안된다.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의 땅의 유형적 표상이기에,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구속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형태도 허용이 될 수 없다.



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다.

안식의 땅에서는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는 어떠한 모양이라도 허용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간섭하심과 배려에도 인간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사고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서의 여러가지 사고들은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이 성취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가나안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결국 새 옷을 입은 영원한 가나안에서만이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종자마다 그냥 자라는 것이 아니라 공급되어야 할 환경이 있고, 종자마다 배타적인 특성이 있다.

서로 다른 종자가 같은 포도원에서 자란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해를 입힐 것이며, 좋은 결실을 보기 힘들것이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들도 각각의 특성에 따라 활동 영역이 구별될 필요가 있다.

성도들도 교회 공동체에서 각자가 가진 달란트에 따라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해야한다.

서로 다른 종자는 그 생육 조건과 특성이 다를 수 밖에 없듯이, 교인들에 대한 지나친 획일화나 관여는 오히려 불협화음을 야기할 수 있다.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는 자연법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한가지이다.

특성이 다른 동물을 같이 일을 시킨 것은 많은 불협화음에 노출 될 수 밖에 없다.

소나 나귀는 서로 다른 특성이 있기에, 한쪽의 발달된 점은 다른 쪽의 부족한 점이며, 한쪽의 부족한 점은 다른 쪽의 발달된 점이 있기에, 동물 간에 분열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와 나귀의 특성이 다르듯,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성과 성격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동업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장점이 다르기에 자신이 잘하는 부분을 항상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좀 열심히 하거나 잘함으로서 얻는 이익은 서로가 나누어 갖기에, 서로 항상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익을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또 다른 방식의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교회 공동체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성도는 아직 죄성을 가진 이들이기에 자연법이 존중되어야한다.

세상에서 일을 해본 사람은 이를 알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조심하거나 많은 요령을 터득할 수 있지만, 교역자를 비롯하여 주로 교회의 영역에만 있어본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 일을 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에 대한 이해와 해결 방식이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난감한 경우는, 일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초자연적인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자연법이 무시되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잠깐은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항상 요구되거나 일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자연법을 무시하다보니까, 교회는 상식이 가장 통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성도가 일상의 영역에서 목회자를 상대할 때,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교회 생활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는 자연법적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자연법이 존중되어야함을 말해주고있는 것이다.


11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양 털과 베 실은 특성이 전혀 다르다.

특성이 다른 것은 조화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도있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않는 것이나,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않는 것이나,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않는 것은 다 자연법에 속하는 것이다.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서도, 자연법과 상식은 존중되어야 할 기본법이다.

오목사는 “사회법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면서 사회법을 무시한다.

하지만 반두르넨은,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백성으로서, 사회에서는 사회법의 지배를 받아야한다고 말한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목사의 발언은 지금 대한민국을 중세로마시대에서의 상황으로 칙각하고있다.

교회는 국가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교회를 국가 위에 놓으려는 작업은, 특성이 전혀 다른 양털과 베실을 섞어 짜려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특별법이 적용되는 곳이라고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은 자연법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12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에 장식 술을 만들지 않는다면, 겉옷은 쉽게 말려 올라가거나 형태를 유지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식 술은 옷의 형태를 유지해주면서 동시에 옷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준다.

장식술이 없다면, 옷의 모양을 제대로 줄 수 없을 뿐더러, 옷이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옷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을 넘어서, 미적인 감각을 살려서 서로에 대한 배려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

네 귀에 만들어진 옷의 술은 옷의 기능을 최대한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도 자신이 가지고있는 재능이나, 자신의 역할을 다듬고 잘 살려내는 작업을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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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6. 7. 00:55

신명기 21장 1-23절 말씀 묵상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피살된 시체가 들에 엎드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 쳐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거든


무조건적인 용서는 성경적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댓가를 치루지 않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은 공의라고 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라고 말씀하신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 대한 살인이기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이다.

땅에 흘려진 피는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을 하나님에 대한 살인으로 더럽히는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을 거룩하게 유지하는데 합당한 행동을 하여야한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주검을 만들어서 땅을 더럽히는 행위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행위에 속하여있는 것이다.

영원한 가나안인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주검이 없는 거룩한 곳이다.



2  너희의 장로들과 재판장들은 나가서 그 피살된 곳의 사방에 있는 성읍의 원근을 잴 것이요


공동체에서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이 주어진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나 도움을 받아야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자에게 일차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삶 가운데 함께 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어려움이 생긴다면, 일차적으로 가까이 있는 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하는 것이 성경적 공동체의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은 가까이 있는 자들이 문제를 함께 공유함으로서 공동체를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3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이 그 성읍에서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여


아직 부리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는 아직은 거룩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재물이 될 수 있다.

부림을 당하고 멍에를 맨 송아지는 이미 죄의 영역에 들어가있기에 속죄물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인자이시면서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속죄물로 드려질 수 있었다.


4  그 성읍의 장로들이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로 그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송아지의 목을 꺾을 것이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도 흘려야하기에, 오직 깨끗한 곳에 흘려진 피로서만 정결케하는 효력이 있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창조의 순수성이 유지되는 곳이다.

생명의 원천에 있으면서 아직 죄로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만 깨끗케하는 속죄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물이 항상 흐르고 갈지도 않고 씨를 뿌린 일도 없는 골짜기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피흘림을 통하여 속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셨다.



5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레위 자손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일정 권한을 위임한 자이기에 행함에 권위와 효력이 있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가졌던 권한이었지만, 범죄함으로 상실된 직책이었다.

송아지의 목을 꺽음으로서 피살된 시체로 더러워진 땅에 대한 청결의식에 대한 공적인 판결이 레위 자손 제사장들에 의해서 판결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6  그 피살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의 모든 장로들은 그 골짜기에서 목을 꺾은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7  말하기를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암송아지는 피살의 죄를 감당함으로서 가까운 성읍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안수는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택한 자들의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됨으로서 택한 자의 죄가 다 없어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지만, 모든 인간의 죄가 다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은 아니다.

오직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됨으로서 신자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장로들의 안수로 피살체에서 가까운 성읍이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정죄에서 자유케되었듯이, 성도는 믿음의 고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공의에서 자유케된 것이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9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


주의 속량하신 백성이 거룩의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사람이나 짐승의 첫 태생을 죽이고서 속량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었다.

이러한 속량을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근원적 죄에 대하여까지 속량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속량하신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되었던 상태에서의 해방이었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속량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듯이, 애굽에서의 속량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죄로부터의 속량을 예표할 뿐이었지 실체는 아니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구원받은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해석을 하고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반면 새관점은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대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어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새관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지만, 기독교에서는 정결케하는 제사의식은 아담의 죄를 속량할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보혈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적 행동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10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울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기시므로 네가 그들을 사로잡은 후에
11  네가 만일 그 포로 중의 아리따운 여자를 보고 그에게 연연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거든
12  그를 네 집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는 그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13  또 포로의 의복을 벗고 네 집에 살며 그 부모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애곡한 후에 네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의 남편이 되고 그는 네 아내가 될 것이요
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지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지니라


가나안족속들과 달리 가나안 족속에 속하지 않은 족속들에게는, 대적하는 남자를 모두 죽이고 여자들과 아이들만 남은 상태에서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준다.


포로를 결혼 상대로 맞이하는 것은 점령 당한 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생각하여야한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할 염려가 별로 없기에, 이들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인 대립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성도의 일상의 삶에서도 이원론적인 접근법보다는 일반 은혜의 영역을 자연법을 적용하며 살아야할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의 원리, 즉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야하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하여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연법의 원리를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도가 일반 은혜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성경의 원리를 따르도록한다면, 이는 결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이 장자이면
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인간의 사랑은 객관적 진리를 넘어설 수가 없다.

편협된 사랑은 미움을 낳는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으면서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으로 마땅한 권리를 좌우하게된다면, 공동체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틀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결정이나 개인적 판단은 절제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키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는 객관적 진리의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한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토대에서 세워지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족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자식에 대한 편애에서 출발된다.

자식은 모두 다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권리가 인정되어야만 한다.

자식에 대한 편애는 자식 간에 다툼과 미움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자식 간의 다툼이 꼭 편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편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가인의 불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가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패역한 아들의 첫번째 특징은 불순종이다.


불순종의 원조는 아담으로서, 아담의 자손은 모두 불순종의 아들이다.

불순종하는 아담의 자손을 교훈이나 두려움으로 다스릴 수 있다면, 성경은 교훈으로 끝나는 책이었을 것이다.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죽이는 방법은, 악한 아들을 다스리는 본보기가 되어, 다른 악한 아들에게 두려움을 낳게 하여, 악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이는 시내산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새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본질의 문제를 표면적인 교훈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사람이 교훈으로 다스려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있다.

톰 라이트는 인간이 꾸준한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한지를 간과한 주장이다.

복음은 교훈의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수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죽음을 넘어서 명예까지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대속의 차원을 넘어서, 극단적인 모든 수치까지도 감당하신 것이다.

성도는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 때문에, 왜곡된 행동을 하는 것을 삼가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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