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5. 25. 23:22

신명기 12장 20-32절 말씀 묵상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히신 후에 네 마음에 고기를 먹고자 하여 이르기를 내가 고기를 먹으리라 하면 네가 언제나 마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먹을 수 있으리니
21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너는 여호와께서 주신 소와 양을 잡아 네 각 성에서 네가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먹되
22  정한 자나 부정한 자를 막론하고 노루나 사슴을 먹는 것 같이 먹을 수 있거니와
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24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물 같이 땅에 쏟으라

25  너는 피를 먹지 말라 네가 이같이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면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누리리라
26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
27  네가 번제를 드릴 때에는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에 드릴 것이요 네 제물의 피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위에 붓고 그 고기는 먹을지니라

28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


피는 육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에, 피는 생명과 동일시 될 만큼 중요하다.

피는 손상된 조직을 회복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피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직은 썩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피는 육적인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있다.

모세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영적인 생명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신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광야에서와 달리 직접 살육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행함의 지침이 필요하였다.

가나안이 비록 안식의 땅이었지만, 가나안에는 살육에 의한 죽음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속죄제로 인하여 동물의 희생이 필요하였기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와는 달리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죄와의 관계 가운데 정립되어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고기를 먹는 것 자체에 대하여는 비교적 엄격한 규율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피에 대하여는 분명한 지침이 주어진다.

피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은, 에덴에서 있었던 생명 나무와 연계시켜 볼 수 있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되었다.

그렇다고 동물의 피를 먹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아니다.

참된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기에, 동물의 피는 생명을 예표하는 역할을 한다고하더라도, 단지 표상일 뿐이다.

약에서는 피를 먹는 행위에 대하여 엄격하게 금하고있는 반면에,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피외에는 피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것을 본다.

신약에서는 피를 죄사함과 연계시키고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있는 피는 정결케하는 피이면서, 피흘림을 죄사함과 연계시킨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죄를 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피흘림보다는, 희생을 강조하지만, 그는 예수가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하지만,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보혈은 분명 속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에서 속죄의 개념을 제거한다면, 구약에서의 속죄제를 비롯한 피흘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를 먹지 말아야하는가?

성경에는 피에 생명이 있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있다.

노아에게도 고기가 허락되었지만, 고기를 생명되는 피째 먹지말도록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피를 먹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피는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잔에 담긴 포도주를 자신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성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성도가 성례에서 마시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성도에게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마시는 잔으로서의 피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지 말라고 금한 것을, 참된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기에, 성도는 성찬식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기념하며, 생명에 초대받음에 감사하는 것이다.

피는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하면서, 또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속죄제에 드리는 동물의 피로서는 사람이 깨끗하여질 수 없다.

속죄제로 드려지는 짐승은, 이미 타락한 피조세계의 한 존재로서, 사람의 죄가 안수를 통하여 전가되었기에, 결코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피가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드려짐으로 깨끗함을 입을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된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여 잔을 마시는 행위는 주의 몸을 먹고 마시는 행위이기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여야한다.

고린도 전서 11장 27-30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잔을 마시는 행위는, 다시 생명에 이름으로서, 영적 자녀를 낳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피를 금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영구한 복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되는 축복과,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게 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과 더불어,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자녀를 낳았어도, 이들 가운데 참된 생명이 있는 자녀를 낳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너와 네 후손이 영구히 복이 있으리란 말씀은 획기적인 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인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후손에게 주어진 복은 피로 인한 생명과 연관되어있다고 생각된다.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과 가나안에서 피를 먹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안식교에서 피를 먹지 말라고하는 이유를, 피에 독성이 많다는 성분 분석에 의존하여 해석하고있다.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몸 속의 독성들이 피로 스며들어서 독성이 많다고 말한다.

이는 피를 먹지 말라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해석 방법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게 하실 때에
30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통치 명령 가운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이 있다.

자녀를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욕심을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속성들을 지닐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24. 21:25

신명기 12장 1-10절 말씀 묵상

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성이 요구되기에, 인간적인 방식이 배제된,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준수되어야한다.

이 땅에서의 삶의 영역은 가나안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자연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통치 영역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과 통치 영역이라는 두 나라two-kingdom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구분은 이원론적 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이 아닌 통치 영역에, 하나님의 구속 영역에서 요구되는 사항들을 적용시키는 오류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속 영역의 속성을 추구하는 가나안 땅에서 요구되는 방식을, 일반 은혜의 통치 영역인 삶의 영역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가나안은 더 이상 인간적인 방식이 허락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의 방식만이 요구되는 배타적인 곳이다.

인간적인 방식은 이미 타락한 자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배제와 포용은 인간 사회에서 항상 논의가 되어왔던 주제이다.

일반 사회에서 개인의 주관적 기준은 배타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하나님 말씀의 배타성을,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인, 삶에 적용시킬 때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을 자신의 삶에 얼마나 적용하여야하는가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배타성은, 가나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요구되듯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나라가 아닌,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만 적용시켜야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타적으로 적용시켜야한다.

성도가 자신이 속해있는 일반 은혜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 배타적인 행동을 하게될 경우, 강한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실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모형은, 오직 교회 공동체라는 범위 안으로 제한되어야한다.

하지만 교회의 범위를 확장할 경우, 또 다른 유형의 혼란이 생기게된다.

사회의 문화변혁과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Christianizing world 주제를 가지고있는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는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있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두 나라two-kingdom이 아닌 오직 하나의 하나님 나라one- kingdom를 주장한다.

이들에게 배타성은 허락되지 않는다.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배타성은 구속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배타성이다.

성도의 배타성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가나안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심의 산물들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파멸시킬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작업들이다.

이는 옛사람에 익숙해있던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성도들이 제거해야할 방식들은 주로 인간적인 방식들이다.

이 가운데에는 인본주의나 자유주의 방식의 사고도 포함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역에서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방식이 요구되기에,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해야한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 이외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들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울에 관한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근거는 1세기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들을 근거로하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해석에는 몇가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근거로 전통적 성경해석을 부정하고서, 유대주의적 성경 해석을 시도한다.

제2성전 유대교의 자료는, 주로 에센파를 중심으로한 보편성이 결여된 자료였으며, 또한 해석에 있어서도 부분적이어서, 객관성을 상실하고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산물로서, 성경에서의 해석조차도 뒤집어 놓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이전의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적 사고를 뒤집었다고는 하지만,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몰두했던 슈바이처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주제로 만든 기독교는 윤리 도덕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있다.

거룩함을 위해서는 윤리 도덕을 넘어서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필요하다.

성경에 대한 해석도 성령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인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에덴에서는 완전한 통치가 요구되었지만, 가나안에서는 이미 오염된 부분을 제거해야했다.

에덴과 달리 가나안은 과거의 우상 숭배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러한 면에서는 가나안에서 요구되는 청결작업은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청결작업의 실패는 성도가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령이 자신을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이렇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거룩한 모습은 성도가 참된 교회의 모형이 되며, 영원한 교회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살아가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청결 작업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며, 이는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서, 성도는 더욱 겸손해져야한다.

도덕과 윤리는 인간적인 청결 방법으로서 참되고 거룩해져야할 성도에게 원론만 제시할 뿐, 각론적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능이다.

우상과 우상의 제단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는 수단이었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면서 남녀가 성적인 문란을 합법화시킬 수 있었던 음란한 장소였다.

우상의 제단은 풍요를 기원하는 빌미로 온갖 악을 합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인의 악행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우상을 따르게 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며,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간은 기독교 마저도 우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우상화된 기독교를 허물어버린 이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개신교는 개혁주의라는 기본 구조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부패될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우상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숙이 들어와있다,

현대인들의 섬기는 우상은 경제 활동 가운데 깊숙히 자리잡고있다.

국가의 행위의 정당성의 기준은 이익에 있으며, 현대인들은 경제가 모든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경제 원리는 합법적인 것이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행동 방식을 합법화시키고 있다.

현대인의 경제 원리와 이익의 추구는, 하나님께 향하여야할 사람들의 모든 관심을 사로 잡아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간다.

주식에 몰입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하고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동산으로 투기에 몰입하는 사람은 일상에서의 삶의  즐거움과 가치를 상실하고 삶의 목적을 이익을 추구하는데 내어던짐으로서, 자신을 우상에게 얽어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주식과 부동산은 합법적인 자본주의 경제 원리이지만, 신앙 생활에는 치명적인 것이다.

투기와 도박은 제거해야 할 가장 심각한 우상 가운데 한 가지이다.



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드려져야한다.

실제 사람들은 우상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뒤바꾸어 행하기도한다.

입시철에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교회가 우상에게 하는 것과 같이 행하고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간이 모두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준비되어질 수 있도록하는 것이다.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자손 가운데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만나주시지 않으신다.

타락한 이들 가운데 철저하게 구별되고 성별된 가운데 모든 조건이 충족된 곳에서만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은 성결함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곳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12지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하여 완성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로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다고하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삶의 모든 영역과 내용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한다.

이는 모두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드려짐으로 마침이 되었다.

비록 성도에게는 더 이상 이와같은 드려짐이 요구되지 않지만,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모든 삶이 드려지는 형태를 취하여야한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가나안에서의 드려지는 다양한 형태의 예물들은, 대표성을 가지고있는 것으로서, 신약에 와서는 모든 삶의 영역이 드려지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기에, 자기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하나님의 것을 지혜롭게 관리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은 시내산에 강림하신 여호와 앞에서 임시적으로 실현되었다.

모세를 비롯하여 장로들과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였다.

출애굽기 24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출 24:11)”

가나안에서도 여호와 앞에서 먹는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이는 에덴에서 상실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가나안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원의 장소는 아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구원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순종이라는 조건이 요구되었다.



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에서는 자기의 소견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론과 우주적 교회론등은 WCC가 세상에 관여하기 위한 교회론으로서 지극히 세상적인 교회론이다.

교회는 세상적인 방식과는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이들의 모임이 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는 구별됨을 철폐하고, 세상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세상과 하나로 모임을 가지며, 우주 전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보는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간다.

선교적 교회, 즉 미셔널처치missional church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며, 실존주의 철학의 산물이기에, 인간의 소견에서 출발된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라는 용어가 들어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는 흩어지는 교회로서, 모이는 교회로서의 선교에 전념하는 교회missionary church와는 구분되어야한다.

가나안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을 철폐하여야했듯이,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는 교회는 인간적인 방식이 제거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운영되어야한다.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


모세는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했지만, 가나안을 안식과 기업이라고 봄으로서, 가나안을 최종적 안식의 땅으로 보고있다.

출애굽 여정 가운데 순종하는 자에게 입성이 허락되었던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안식의 땅을 예표하는 모형으로서의 안식의 땅이었다.

안식의 땅으로서의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과는 구별되며,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가나안에서 허락된 안식은, 하나님의 조건적 은혜 가운데 주어진 한시적인 것이었다.

영원한 안식과 대비되는 조건에 의한 한시적 안식은, 안식의 모형일뿐 영원한 안식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업과 안식은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체로서의 영원한 유업에서의 안식을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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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3. 21:09

신명기 11장 18-32절 말씀 묵상


18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으면서 내면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면서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은, 외적인 변화를 추구할 뿐,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불행만 낳을 뿐이다.

쉐마 방식의 규제는 죄인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죄 가운데 절망에 빠지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율법과 달리 복음은 인간의 근본을 바꾸어 거듭나게하는 것이다.

윤리 실천적 접근 방식은 근본이 거듭난 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무력한 대안일 뿐이다.

윤리 이상의 율법으로도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이 윤리로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더 이상의 윤리나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다.

교회의 영역에서 생기는 도덕적 문제는 주로 거듭나지 않는 이들의 문제일 뿐이다.

거듭난 이들은 설령 범죄하였다고하더라도,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19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20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현재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잘 지키고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킨만큼 형통한 길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은혜 이전에 보편적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가지고있다.

성공한 유대인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말씀이 가지고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혜의 원리에서 기인된 것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유대인의 전통은,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였을지 모르겠지만, 성공한 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그들의 삶을 고착화시키고있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교만한 삶은,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씀의 의도하는 바와 말씀의 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때문이다.

신명기의 중심 주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한다는 것보다는, 다윗과 같이,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참한 상태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신명기는 은혜 이전의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창조 원리인 자연법적인 원리를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법적인 원리를 넘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은혜의 원리를 이해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죄를 드러내는 자리에 임하게된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도를 윤리 규범 안에서 바른 생활을 하게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으로 고발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장수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자연법의 원리에 속해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는 아직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지는 않는다.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주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운영하시는 원리이다.

십계명이 자연법의 모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십계명에 창조주의 가장 근본적인 창조 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법과 같아서, 말씀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원리로 적용이 된다.

복음은 자연법을 거스리지도 않으며, 이를 대적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받았다고 자연법이나, 일반 상식을 무시하거나 경히 여기는 경우를 종종 본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을 통해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한다.

자연법과 상식이 무시되는 교회 생활은 사회의 지탄이 되면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23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순종을 전제로하는 조건적 축복이다.

축복과 저주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저주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원리 안에 담겨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모든 이들에 대한 삶의 원리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상적 접근은 더 많은 문제를 불러올 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행의 근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기보다는 이를 애써서 외면하면서 주변국의 도움을 청하곤하였다.

현대인들도, 상황과 환경의 어려움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서 외면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한 가지이다.


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2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말씀이 어느 정도 지켜졌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한시적인 것이었지만, 이마저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 이스라엘 분열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의 분열의 원인이 르호보암에 있기 이전에 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다.

나타나는 현상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많은 문제에 직면하는 현대인들은 그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외면한다.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모세는 신명기 전체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본론을 언급하고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에 따른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음을 말함으로서,  모세 언약이 전형적인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띄고있음을 보여준다.

모세 언약의 가장 기본되는 골격은 아담 언약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이기에, 은혜의 요소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전적인 행위 언약이며, 모세 언약은 타락한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기에, 은혜 언약의 요소가 담겨있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아담 언약도 은혜 언약에 포함시키기도하지만, 이는 아담 언약이, 창세 전 구속 언약이라는 큰 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 은혜 언약에 포함되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각의 언약을 자체의 속성만으로 볼 때는 아담 언약이나 모세 언약이나 동일한 행위 언약이기에,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재연 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이 오직 은혜 언약이라고 주장하지만,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본질substance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지만, 표변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고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검증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시험에 응할 자격이 주어졌다고 해서 이들을 은혜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에덴이 안식이 성취되지 않은 장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은 안식이 성취된 장소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으로서의 언약적 율법주의, 즉 신율주의는 가나안이 은혜의 장소이며, 율법은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주장인데, 이는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선택이 요구되는 장소에는 적합하지 않은 주장이다.

모세 언약이 행위 언약으로 규정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사역은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새관점에서보는 복음은 윤리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새관점을 좋아하는 신학자나 목사들의 설교는 윤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이들이 말하는 복음은 단지 삶의 형태를 바꾸는 윤리에 불과할 뿐이다.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복과 저주를 상징하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은, 결코 안식이나 은혜의 개념 가운데서는 설명될 수 없다.

비록 안식이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였다하더라도, 여기에는 조건이 주어지기에 참된 은혜와 안식은 아닌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이나 은혜를 예표할 뿐이지, 그 자체로는 은혜 가운데 거하는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왜 기필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야만 했는가?

가나안 땅은 에덴의 유형적 재연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된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불순종을 재연시킴으로서, 모든 사람이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아담의 불순종을 재연시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에덴에서의 아담과 차이가 있다면,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모든 인류를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가나안이라는 무대에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연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불리워졌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있으며, 양심의 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자연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명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 이전에, 모든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시다.

가나안은 영원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야할 영원한 나라를 예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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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2. 21:12

신명기 11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십계명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마땅한 자세를 설명한다.

모세의 강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이 아닌 의무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자상하게 설명하면서도, 권위를 가지고 강변하는 것이다.

국민이 한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규정하는 이스라엘에 부합된 의무를 마땅히 수행하여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을 받았지만, 축복과 저주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속적인 교훈을 받아야만 했다.

마치 자녀가 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 것과 같다.



2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출애굽의 과정에서 보여주신 이적과 기사는 택함받은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 장면이었다.

교훈과 위엄과 강한 손과 펴신 팔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가르치는 모습이며, 가르침을 받는 이는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고, 그의 펴신 팔에 안기어서, 강한 손에서 꼼짝못하고 교훈을 들어야하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음을 본다.

성도의 걸어가는 길도 하나님께 붙들린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험난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3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출애굽의 전 과정은 택함받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가는 전과정과 유사하다.

성도 한 사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출애굽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강림하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내포되어있다

애굽에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는 성도를 세상과 분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보여준다.

성도를 위한 세상과의 싸움은, 택함받은 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아야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승리를 이 땅에서 경험하여야한다.



4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출애굽 과정에서 행하신 이적들은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영적 전쟁에서의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분리를 통한 영적 전쟁은 고통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세상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평생 신앙생활의 동력이 되며, 현재의 삶의 위로가 된다.



5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적들은, 미숙하고 아직 불신자였을 때의 모습이 남아있는 가운데,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보여준다.

광야에서의 여정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과정이다.

장성한 분량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보살핌과 돌봄 가운데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많은 관심을 받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까지, 그리스도와 삶을 공유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6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다.

자신이든, 혹은 주변 상황이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시험하고, 반항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단의 통로가 되는 이들은 나름대로 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기에,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성도에게는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7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았음에도 이를 담을수 있는 마음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애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명해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문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으로는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험하게하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눈으로 보게 하시지만, 택한 자에게는 경험하고 본 것을 담을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존적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적 사고는 하나님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실존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고의 출발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보편적 사고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의 선택에 대한 요구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축복이 가능한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적인 실존주의 방식으로서, 자신들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음으로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 즉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축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은, 모든 인간은 축복의 길을 선택할 수 없으며, 설령 축복의 길을 선택하였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우리의 사고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에 힘입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종이 요구된다.

하지만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한 순종을 하였던 것은 아니다.

에덴에서부터의 삶을 시작한 아담과 달리,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에게는,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즉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였으며, 광야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순종과, 가나안 땅에서의 순종이 요구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는 불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종은 가나안,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조건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약속의 땅은 타락으로 인하여 쫓겨난 에덴의 바깥에서 다시 구원에 참여되는 땅으로서, 에덴과 에덴의 바깥의 대조를 보여주고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타락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 소산을 먹는 땅과 대조를 이루는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에덴을 상기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을 예표하고있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기업은 순종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다.

아들은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아들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서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지 보여주고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순종의 능력이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의지하여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다.


10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 땅은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동해야지만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나안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기보다는,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리는 안식의 땅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주권적 공급 하심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하였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사는 동안 안식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탐욕의 방식을 취하였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의 안식을 넘은 영원한 가나안을 이 땅에 구현하면서 사는 삶이다.

성도는 주일,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안식의 날을 일주일의 첫 번째 날로 삼으면서, 한 주를 그리스도의 안식 위에,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생활하는 안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누릴 안식은 조건적인 안식이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안식은 순종을 전제로한다.

이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순종을 통한 안식이 요구되었던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에덴을 돌이키면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역할을 하면서,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성도가 누리는 안식은 에덴과 가나안을 넘어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땅의 종말은 에덴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에덴에서의 과제가 성취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안식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누리는 안식의 삶이 되어야한다.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불순종은 다른 신을 섬기고 그것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불순종과 악행은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불순종과 악행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거부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족하려는 것이 불순종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신은 자기를 위해 만든 신으로서, 자기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있다.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가나안에서의 공급이 끊기듯이, 현대인들의 자족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체워주지 못하는 죽음의 굴레인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불순종은 인간 모두의 불순종을 대변해주고있으며,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들은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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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21. 22:26

신명기 10장 1-22절 말씀 묵상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처음 산에 올라간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원론적 죄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번째 산에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의 집행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한 계명보다는 오히려 죄를 정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와 새로운 중보자를 세우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을 들고 나무궤를 만들고서 중보자로서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모습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장작을 준비해서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모습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를 메고 손수 피흘리시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신 모습이었다.

두 번째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비통하였으며, 그들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성도는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한 존재이기에, 중보자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처음 돌판과 달리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정죄와 은혜를 내포한다고 생각된다.

처음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의 반역으로 인하여 이미 깨어졌지만,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 주신 명령은 궁극적으로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 돌판이 아담 언약을 상기시키는 행위 언약에 강조점이 있다면, 두 번째 돌판은 심판과 구원을 위한 은혜 언약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에 이르기까지는 정죄가 전제가 되어야한다.

정죄와 심판은 행위 언약에 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 언약에 의해 규정된 죄값를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거두어지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언약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기에, 모세 언약 자체는 행위 언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두 번째 돌판은 더 이상 불순종에 대한 진노로 부수어뜨릴 것이 아니기에, 언약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담겨있는 언약궤에 보관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을 목도하시면서, 이를 직면하시면서 풀어나가시지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길이 없었고,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산에 올라가는 모세의 심정을 알 수도 없었다.

성도의 세상을 향한 관점은 모세가 다시 두 돌판을 다듬어서 시내산에 올라간 것과 같이, 첫번째 돌판보다는 두번째 돌판의 심정으로 나아가야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중보자 모세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음을 깊이 깨달을 때, 결코 사회에서 욕을 먹는 그리스도인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두 번째 돌판은 수정되거나 처음 돌판에 쓰여진 것이 취소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되거나 수정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맺으신 언약은 처음 아담과 맺었던 행위 언약이 수정되었거나 취소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종결과 더불어 새로 시작된 것이기에, 아담 언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본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담의 범죄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문제 삼질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며, 아담의 범죄에 대한 문제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더불어 종료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톰 라이트는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아담과 대비시키는 둘째 아담의 개념에서 해석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것인지 본을 보여주신 혁명적 메시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처음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은 것과 같이 아담의 범죄는 결코 묵과될 수 없는 것이다.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두 번째 돌판은 언약궤 안에 있었으며, 이는 속죄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속죄소는 백성들이 죄를 사함받기 위한 곳인데, 십계명의 돌판으로 죄가 규명된 가운데 사함을 받는 것이다.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제대로 알고서 용서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를 받은 것은, 십계명과 더불어 율법으로 규정된 죄에 대한 용서라는 것을 인식하여야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의 처음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다른 신은 욕심을 위해서 자기가 만든 신이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회 생활은 교회가 다른 신을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이들이 교회를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는 이렇게 변질되는 교회를 정결케할 의무가 있다.



6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  또 거기를 떠나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를 떠나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으며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더불어 종료되었다.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각종 제도도 종료되었으며, 십일조도 그 가운데 한 가지이다.

십일조는 첫번째로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지파는 오늘날의 목회자와는 관계가 없다.

십계명과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마침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레위지파와는 관계없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쫓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름으로서 더 이상 죽음에 종속되는 제사를 행하지 않도록 하였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지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한시적인 것이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에서 십일조를 교인의 자격과 연계시키는 것은 욕심에 의한 것이며, 더 이상 개혁주의 교단이라고 표방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인격적 관계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한다.

인격적 관계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셨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은, 모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심판의 대상은 하나님과 비인격적 관계에 놓여있는 이들로서, 우리의 이전 상황이 이러했었다.

일찌감치 멸망되었을 우리도, 중보자로 인하여 화를 면한 이스라엘과 같이,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하여 화를 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는 이만이 가능하기에,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면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기에, 중보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성도의 중보기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중보는 그리스도 뿐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는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중보 기도의 삶은 성도의 삶을 한 차원 더 높여주는 존귀한 특권인 것이다.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보다 먼저 길을 떠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셨느니라


중보자는 동시에 인도자의 역할을 한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중보자가 되어야한다.

하나님께 중보하지 않고는, 백성을 사랑할 수 없으며, 또한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모세가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 먼저 앞서서 가나안을 향하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먼저 앞서서 성도가 거할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시는 참된 인도자가 되신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확장되어간다.

중보자와 인도자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시켜나아갈 수 있어야한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은 자로서, 서로 중보하는 가운데 서로를 인도하면서,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모세의 말은 율법이 단순히 형식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보여준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들은 반복적으로 일정한 형식과 틀을 가지고있지만, 모든 것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형식과 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새길 삶의 규범이 되었지만, 모세가 마음의 중심에서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고해서, 형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쉽게 무너진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형식들은 궁극적으로 그 안에 담겨질 내용을 위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모두 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었으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현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이러한 마음 속 깊은 데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형식마져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악하기에 형식만으로 내용을 대체하고 싶어한다.

로마 카톨릭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의 교회는 어느덧 로마 카톨릭과 같이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되면서, 모세가 말한 것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가고있다.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었지만, 단순한 이치도 깨닫고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보편적 인간의 현실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훈계하고 야단치는 근본에는 자녀의 행복을 위하는 깊은 뜻이 있지만, 아이는 철이 없기에 부모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고,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알고 조금만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여호와를 마음 깊이 경외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하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인 죄인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는 철든 자식과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모든 하늘의 하늘은 더 높은 하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는 상위 구조upper register로서의 하늘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의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 즉 하늘upper-register과 땅lower-register의 구조 안에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위 구조와의 단절을 맛보아야했다.

사람이 살아나아가는 것은 눈에보이는 하위 구조lower-register만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

신앙 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인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만물에 대하여 주권과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 앞에서, 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구원은 받았다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을 받은 것은, 일종의 쓰임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되는 선택을 받았지만,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초대될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역할을 한 것이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영광의 자리에 초대받았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교인이라할지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이 뿐이다.

인간에게서는 택함받을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택하시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기에, 왜 나를 택하시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다.

택함받은 백성이라도 택함받은 것의 근거를 자신들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택함받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이다.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행위로는 이미 처음 돌판이 깨어짐으로 인해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두번째 돌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더 이상 행위로서의 선을 기대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 마음 중심에서 이루어질 마음의 할례, 즉 거듭날 것을 요구하시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 두번째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속이는 것이다.

교회 생활도 교회에 대한 외적인 충성 봉사를 강조할 때, 같은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표면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려고했던 바리세인들은 회칠한 무덤이었으며, 독사의 새끼들일 수 밖에 없었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외적인 화려함과 선함을 추구하는 신앙 양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왜곡은, 외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회자들도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편승하여 자신의 성공의 수단으로 예배당 건축에 몰입하였다.

수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미화시키는 왜곡된 거짓말을 하고있다.

그리스도만이 성전되시기에,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교인들을 속이는 계략일 뿐이다.

화려한 예배당은, 강단에 조형물을 없애려는 노력을 비웃듯이, 하나님 앞에서 외모를 꾸미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행위였다.

화려한 예배당에서 가난한 자들은 소외될 수 밖에 없었고, 능력없는 자는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다.

하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 외모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일 수 밖에 없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아담은 후손은 누구나 다 고아이며, 과부이며, 나그네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 버렸으며,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하며,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고아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되시며, 잠시 이 땅을 살아가는 나그네의 구원자되신다.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던 것과 같이, 인간은 누구나 죄의 종노릇하는 나그네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나그네는 나그네 삶의 청산을 위해 출애굽의 과정이 필요했듯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구원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힘든 광야 생활로 인하여 애굽을 그리워하던 것이 하나님에 대한 죄악이었듯이,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직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한 광야와 같은 여정의 삶을 살아가야한다.

표면적인 나그네를 사랑함으로서 실질적인 나그네였던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의 표상적 삶의 형태들은 성도의 실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표상들이기에, 표면적으로 만나게되는 이 땅에서의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존중하여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신다.

성도는 사는 날동안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며, 의지하여야 하기에, 인생의 기쁨을 오직 말씀 가운데서만 찾아야할 것이다.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출애굽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할 인생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시진 않으신다.

구원받을 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증거를 경험한 성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아담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가인과 같은 육적인 자손을 나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득하게하는데 실패하였다.

성도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손을 증대시키는 일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문화 변혁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영적인 자손을 확장시켜 하늘의 별과 같이 가득하게 하는 일이 참다운 하나님의 일일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21. 05:00

신명기 9장 13-29절 말씀 묵상


13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악인이라는 사실과 악행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최선을 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을 경험한지 불과 사십일이  되지도 않고, 시내산에 하나님의 불이 붙고있는 상황이었다.

불의를 아시는 것과 보시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어떠한지를 아셨지만, 이를 직접 목도하심으로서 진노를 그치지 못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예정하셨다고하더라도,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도하며,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선행에 대하여 기뻐하시기도 하고, 신자의 악행에 대하여 분노하시기도 하신다.

심지어 악한 왕 아합이 돌이킬 때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도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정죄를 피하였을 뿐, 목이 곧은 것은 매 한 가지이다.

거듭남과 성화의 과정에 참여된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자신 안에서 의를 찾아볼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심판을 면한다는 것이지, 악을 행하여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방종과 죄악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삶 가운데서의 행함이 하나님의 기쁨과 슬픔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행할 필요가 있다.


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애고 너를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의 역사는 외적인 규모와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으로 수 많은 인류를 만드셨고, 노아 홍수를 통하여 노아 가족만으로도 새 인류를 만드셨다.

애굽에 내려가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신 것도 소수인 야곱의 가족을 택하신 결과이다.

모세만을 택하셔서 충분히 새롭게 시작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외적인 규모를 키운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S교회의 건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O목사는 중국선교를 위해서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중국선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 교회들의 교만이 보편회되었다면, 한국의 수많은 거대한 교회들이 초토화되는 것도 순간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규모를 보지 않으신다.

아무리 많은 수의 무리가 모였다고 하더라도 불순종하는 이들은 순종하는 한 사람보다도 못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큰 교회라고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쉽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큰 규모의 교회는 어김없이 장사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명예와 성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교만한 이들이 넘쳐나게마련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추구할 교회는, 모세와 같이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겸손히 엎드릴 수 있는 소수가 모인 소규모의 교회를 지향해야한다.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두 돌판은 받은 모세의 마음은 감격 자체였을 것이다.

사십일의 금식을 통하여 얻어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모세가 직면한 상황은 정반대의 절망의 상황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축복과 저주를 가르는 행위 언약이 며칠만에 저주로 결정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두 돌판을 주신 하나님은 구속 사역을 위해서 불 가운데 뜨거운 마음으로 모든 상황을 이끄시고자 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열심을 비웃기라도하듯, 백성들은 사단의 좀비가 되어 하나님을 조롱할 뿐이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그리스도가 신이거든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열심과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진노의 대상일 뿐이다.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인간의 본능은 마치 당긴 고무줄을 놓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

교훈이나 명령이나 강요에 의한 윤리 도덕은 다 순간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본능에 따라 행동하기에, 본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겨진 고무줄이 오무라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산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에서도,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할지를 예측하게해준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속도는 하나님께서 쫓아오시는 속도보다도 빠르다.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은 없다.

기독교가 윤리로 제대로 세워질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 윤리를 다루는 학자들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고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그들의 신학의 기초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서 출발되었으며, 인간의 의지를 자율성이 상실된 노예 의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죄성이나,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인간의 노예의지라는 주제를 애써서 외면하거나 부정한다.

카이퍼나 바르트, 톰 라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기에 윤리적인 기독교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신칼빈주의의 문화명령을 근거로한 문화변혁운동이나, 신정통주의의 선교적 교회론이나,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같이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모세가 두 돌판을 던진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로 인한 언약의 파기를 뜻하였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모세의 진노나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세가 중보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으신 언약, 즉 행위 언약의 깨어짐을 경험하셔야했고, 두 번째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도 깨어짐을 경험하실 수 밖에 없으셨지만,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심으로, 택한 이들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모세가 깨뜨린 두 돌판은 인간 모두의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진노하실 수 밖에 없으신 분이시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이 멸절을 면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19  여호와께서 심히 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였노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때에도 내 말을 들으셨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 사십 일을 금식과 달리, 모세가 사십 주야를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지낸 두 번째의 금식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구한 시간이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공생애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앞서서 사십 주야를 광야에서 굶주리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구속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금식은 모세의 두 번째 금식과 마찬가지로 중보를 위한 금식이었다.

중보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이 속하여야할 공동체의 원형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 안에 담겨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에 왜곡을 초래했고, 이는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었다.

교회는 이 땅에 회복된 하나님의 공동체의 표현이기에, 모세의 사랑에 기초한 중보의 모습과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현재의 교회가 비난받는 것에 대하여 항변하기 전에, 교회가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하고있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세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론은 소극적 범죄를 하였던 것이다.

아론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상황이나 현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나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끊임없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구미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시도들을 한다.

강단에서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대하여 선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많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다.

바르트는 실존주의라는 인간 중심의 철학 위에 신학을 정립함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판넨베르크의 경우는, 신학교가 대학의 학부와 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자연과학과 철학과 소통이 가능한,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는 형태의 ‘보편사적 신학’을 정립시켰다.

스탠리 그렌츠는 펜넨베르크의 신학을 이어받아, 이머징처치의 대표적 리더였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에게 영향을 줌으로서, 이머징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탄생시켰다.

스캇 맥나이트는 새관점주의자인 제임스 던의 신학을 이어받아, 신칼빈주의와 새관점과 신정통주의를 혼합시킨, 이머징미셔널 처치라는 금송아지를 발전시켰다.

현대신학자들의 금송아지 만들기 작업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 개념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왜곡을 통해서 빚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신학의 산물 앞에서 환호하는 이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진노하셨듯이,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노하실 것이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중보를 배운 성도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할 것이다.


21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죄를 짓게 하는 우상을 흔적도 남지 않게 없애버렸다.

아마 어느 정도 형체가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을 가져다가 또 다시 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작업은 욕심을 위한 형태를 만드는 것으로서, 성도는 이러한 형태들

을 조심해야한다.

특히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는 금송아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는 성도가 주식 투자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만, 주식은 속히 부하고자하는 마음을 활성화시키는 속성이 있기에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잠언 28장 20절에서는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있다.

일단 성도가 주식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시간과 마음이 주식에 빠져들어가서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수가 없다.

주식을 한다는 것은 사단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어리석은 짓이다.

모든 투기나 도박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을 했다고 모두 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가속시키는 외형을 가능한 버릴 수 있어야한다.


22  너희가 다베라와 맛사와 기브롯 핫다아와에서도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은 시종일관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격노시킬 것을 아셨으면서도 이일을 진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교훈과 훈계, 명령등으로 고쳐질 수 없는, 본질적인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신 것은 참된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를 잉태시키기 위한 과정을 시작하셔야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단 번에 주신 선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고통을 수반한 기나긴 과정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한 것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격노케할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러한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보고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로마라는 세상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이스라엘을 확장시키신 분이시고, 그에게 교회는 확장된 이스라엘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려는 사단의 궤계일 뿐이다.


2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은 자신이 어떠한 이들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본질적이고 체질적으로 거역하는 이들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들을 품으신 것이다.

이러한 목이 곧은 백성들이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담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은, 인간에게서는 구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들이기에,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가 없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내세울 아무런 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25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모세의 중보 사역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있는 것이다.

중보자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사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성의 숫자이다.

죄와 관련되어서는 죽음밖에 없기에, 사십 주야의 금식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세의 사십 주야의 금식은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임하신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과 같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십 주야를 죽음을 담보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동일하게 죽음을 담보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중보 사역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립에는 모세의 중보가 있었듯이, 현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중보자가 없었더라면, 멸절될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중보 기도를 하는 사람이 과연 어디있겠는가?

부정적 상황을 대하는 대부분의 입장은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기에 바쁘다.

금식하면서 죽기까지 그들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이기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면서, 결코 정죄하기에 앞장 서서는 안된다.


27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약속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절시키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과정이다.

구속사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있다.

언약 신학은 성경 전체를 보는 틀을 제공해준다.

언약에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시작으로, 아담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 그리고 새언약으로 결론이 난다.

이러한 언약들을 은혜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 언약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개혁주의와 달리 아브라함 언약에서 시작하여 모세 언약으로 완성되며, 나머지는 부차적인 주제일 뿐이다.

개혁주의에서의 중심 언약은 그리스도의 새언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정통주의는 모든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며, 행위 언약의 개념을 배제한다.

존 머레이도 이에 동참하면서, 개혁주의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단성을 가진 페더럴 비전이 탄생하기도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압 땅에서 선포되는 모세 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아담 언약이 재연되었다는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를 심각하게 반대한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이면서 동시에 새언약을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참으시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새언약을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8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논리는 합당하다.

인간적인 논리이기보다는 전체 그림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리이다.

인간에게는 쉽게 저주하는 속성이 있는데, 중보자로서의 마음을 가진 모세의 온유함을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의 생각과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먹히는 신자들의 행태를 깊이 생각해보아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9. 22:49

신명기 9장 1-12절 말씀 묵상



1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세상이 전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인간에게 세상을 정복하는 과제를 주신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복해야할 세상은 인간적 논리로는 정복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정복이 가능하다.

정복해야할 대상은 가나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살던 에덴에도 있었다.

아담도 하나님께로부터 통치 명령(창 1:28)을 받고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다스려야할 대상으로서의 들짐승 가운데 간교한 뱀에게 유혹을 받아 도리어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나게 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결코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담대하게 정복하라고 말씀 하시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정복했다고 착각하며 교만해진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담의 후손이기에 불순종의 자식들이며, 이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과 합류할 수 밖에 없는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을 대표하는 백성들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바로 타락한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들이기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참여할 자격과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거듭난 이들이야말로 참된 이스라엘로서의 언약 백성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사십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 하셨고,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거듭난 신약의 성도들이 참된 가나안 정복 전쟁인 사도행전의 역사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질적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이 아니기에, 성경은 유대 이스라엘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2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세상에서 잘난 백성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잘나고 성공한 이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못나고 부족한 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신다.

성추행으로 유명했던 J 목사는 항상 젊은 이들에게,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잘난 이들을 사용하시지 않으신다.

유명한 강사를 소개할 때 종종 그가 어떠한 경력을 가졌던 사람인지 그의 화려한 과거를 소개하곤 하지만, 그들이 종국에는 교만하여 실족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아낙 자손들을 물리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잘난 민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듯이 교만해진 것과 같이, 잘난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도, 자기가 잘나서 쓰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쓰임을 받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한번 쓰임받은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자신이 잘나서 구별된 민족이 되었다는 교만에 사로 잡혔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택하셔서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쓰임받은 자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발전과 더불어 체구가 커진 현대인들은 마치 아낙 자손과 같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사용하시지는 않을 뿐더라, 오히려 하나님보시기에 멸망받을 이들일 뿐이다.

북쪽이 개방되면 너도나도 선교에 앞장서려고하며 자신들의 능력을 자랑하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3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낙 자손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아낙 자손을 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사용되어질 뿐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려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이지만,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리고다닌다.

인간에게는 능력이란 있을 수가 없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사용되어질 뿐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설령 이스라엘 족속이 아낙 자손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랑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다고 자신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설령 자신에게 세례를 준 목회자가 타락을 했다고하더라도,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목회자는 사용되어지는 수단일 뿐이지, 목회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유명한 목회자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못된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사용되어질 뿐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잘 나가거나 쓰임받을 때 교만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절벽 위에 땅떠러지와 같은, 실족의 지름길이다.

인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도둑질인 것이다.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정죄를 위한 공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가나안에 대한 정복을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낙 자손들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의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악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정의를 외쳐서는 안된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의가 상실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권이 행사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원하셨지만, 이는 아담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아담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를 수행하는 이스라엘은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게된다.

인간이 종종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시키거나 포장하기 위해서, 정의를 내세우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권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영역을 확장하려했던 것이다.

이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에 대하여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의 확장이지, 결코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성장과 확장도 실상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인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 교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교주는 자신이 신이 되어서 자신의 공의를 선포하려고하지만, 이는 실상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한 가지일 뿐이다.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아낙 자손을 쫓아내는 작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가나안에서 아낙 자손은 이미 죄악이 심판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가득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세상은 이미 아낙 자손과 한 가지로 죄악이 가득차고있다.

가나안에서의 아낙 자손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할 때에 임할 심판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대한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똑같은 죄인이지만, 단지  죄용서를 받았다는 차이일 뿐이다.

세상에서 성도의 성공은 성도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힘을 실어주심으로 성도를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은 성도의 잘남이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가 받는 축복을 세상에서의 성도가 하여야 할 역할과 연계시키기보다는, 교회에 충성 봉사하고 헌신할 것을 말하며, 또한 헌신한 이들이 받은 복을 간증하면서 교회에서의 헌신과 축복을 연계시키려고한다.

축복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성도의 성공은 성도의 공로와는 상관없는데도, 이를 왜곡시켜서 세상에 대한 성도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에 대한 충성과 축복을 연계시키는 분위기는 목회자가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목사도 끊임없이 이러한 강조를 하였던 것을 보았다.

아낙 자손을 진멸해야할 이스라엘에게서 공로를 찾아 볼 수 없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겸손히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준비를 하여야한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공의를 말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 부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부자나 가진 자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가지면서, 정의를 외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내세우면서 자신은 그들과 다른 의로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다.

아낙 자손을 진멸시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도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이들이다.

자신이 의롭기에 사회의 악에 대하여 정의의 칼을 휘두를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난 것이 없다고 성경은 증언하고있다.

미국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력은 인구 비율에 비하여 엄청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택함받은 민족이라고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이 욕심이 많은 까닭이다.

인간은 남과 다른 상황에 놓이면 스스로 착각하게되어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아담의 후손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의로움이란 없다.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특히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쓰임받는 백성들일 뿐이다.

요단 강가에 이른 이스라엘의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다.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모세의 중보 기도가 없었다면 이미 다 멸절되었을 목이 곧은 백성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문전에 있게된 것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성도가 불신자들에게도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하는 이유가 된다.


8  호렙 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잠시 지도자가 안보이는 사이를 못참아서 불이 붙고있는 하나님의 산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라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방식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우상 숭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이방 신상을 들여놓고, 성전에서 일월성신을 섬기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다 같은 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호렙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교회당도 마찬가지이다.

수능 때만 되면, 절간이나 예배당이나 똑같은 모습이 재연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한 가지는 교회당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곳의 목회자들은 교회당의 화려함과 자기를 섬기는 이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를 예배와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격노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사십 주야의 금식은 모세가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기 위해서 호렙산에 머무른 완전한 시간이었다.

이 완전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모세가 40주야를 호렙산에 머무르면서 떡과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를 완전히 비우는 시간이었고 그 비움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사십 주 사십 야를 금식하신 후에 떡으로 유혹하는 사단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의 모습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실현됨으로서 십계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필요를 내려놓은 금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과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견고한 글로 쓰여졌다.

고대 근동에서는 종종 사람이 돌에다 법을 새겨넣음으로서 사람들이 수정을 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는데,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돌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문화하심으로 사람이 수정 할 수 없게 하였다.

두 돌판은 언약궤 안에 보관됨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한 매개체이기에, 성도는 구약의 대사장이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말씀이 매개체가 되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1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노아 홍수 때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듯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주신 것은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진노가 더 이상 비로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행위 언약으로서,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지만,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확실하였기에, 사십 주 사십 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노아의 홍수에서의 진노의 비를 재연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아시고 대신 아들이 진노를 받도록 준비하셨기에, 사십 일간의 기다림은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 진노와 고통의 시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만듬으로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금송아지를 만듬으로서, 어느 누구의 유혹이 없어도 스스로 부패한 백성임을 드러내었다.

인간의 공백으로 인한 불안은, 스스로를 부패하게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기에, 모세가 올라간 공백의 기간에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는 모세의 인도가 표면적인 안정이 되었지만, 모세가 안보이는 기간에 평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도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목회자에게 의존하면서, 목회자가 안보이면 불안하여 세상 것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

유명한 목사를 따라가 집단을 이루면서 눈에 보이는 큰 교회 건물을 짓고서 안정을 찾으려는 성향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의 성향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성도는 목회자의 유무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평안 가운데 거 할 수 있어야한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사람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도, 하나님만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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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18. 22:14

신명기 8장 11-20절 말씀 묵상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칠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면 당연한 것이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분명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인간은 스스로 잘못된 것을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인데, 인간은 자신이 왜 죄인인 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나쁜 짓을 하여야만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나쁜 짓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시면서, 인간에게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그 문제의 원인을 찾게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문제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고하지 않는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하게될 때 자신들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보게하는 말씀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나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러한 문제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켜야한다는 끊임없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지 않는 한에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기에,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통로가 된다.

인간은 궁핍할 때는 아쉬워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일단 문제가 해결되고 풍요 가운데 거하게되면 더 이상 공급하시는 이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왜 어려운 일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고 사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불편하며,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고있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인간이 가장 위험할 때가 풍요로운 때이다.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는 풍요에 있다.

한국 교회는 수십년 전에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타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 교회의 타락이 일차적으로 풍요로 인한 것임에도,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있다.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동일시하게되었다.

어려움과 환란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의 저주와 동일시하면서, 성도를 두려움 가운데로 몰아가기도한다.

어느덧 교회는 욕심을 채우는 통로가 되면서, 세속적 욕심에 물든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었다.

목회는 세속적 성공의 통로가 되면서, 신학교와 교회가 변질되어버렸다.

로마 카톨릭이 이를 증명해 주었는데도, 한국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개혁주의를 외치면서 실질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는 욕심의 굴레로 빨려들어가고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이라고하더라도 전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을 인식하면서,  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되어야한다.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특히 성공한 이들은 자신이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성공한 대형 교회 목회자 가운데 교만하지 않은 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입성한 후의 사시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알아서 행하였다.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죄책감과 의무감을 감당하며 살아 갈 수가 없다.

인간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생리적 현상이지만, 이러한 본능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광야를 지나는 동안의 수 많은 이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드러내고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면서, 직접 훈련을 시키시는데도, 인간 속에 자리잡은 고집과 저항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상적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을 지나게하심으로서 오직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그 많은 훈련이 과연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는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변화가 불가능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자신의 책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이 훈련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다.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낮아져야한다.

높아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기의 능력을 믿기에, 하나님께 의존할 수가 없다.

교만한 자에게 믿음의 대상은 자신인 것이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외적인 확장을 통해서 자신을 강화시킨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인간이 추구하는 외적인 확장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붕괴 속도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동안 교회가 외적인 확장에 있어서 세계 최고임을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교회가 성장한 곳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높아져서 변질된 곳이 되었기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곳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곳이 되어버렸다.

교회는 많은데 정녕 다닐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있다.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의 교만을 질타하였다.

교만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외적인 풍요가 자신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과시한다.

외적으로 확장된 교회의 목회자는 어김없이 자신이 숭배를 받으려한다.

유명해지면 어김없이 타락하는 목회자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된다.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잘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이 있었으며,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약속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공동체의 속성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공동체에 속하여있으면서, 공동체적 책임을 감당하여야한다.

인간은 조상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후손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조상과 후손의 모든 운명은 삼위 하나님의 창세전 구속 언약으로부터 시작된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도에게 주시는 능력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주신 선물이다.

성도는 언약 안에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예민하여야하며,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을 드려야한다.


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은혜 언약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축복만이 약속되어야한다.

모세가 말하는 우상 숭배에 따른 멸망은, 행위 언약의 속성 가운데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지만, 모세 언약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행위 언약을 배제하고 오직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나, 율법 자체를 은혜 언약으로만 보는 톰 라이트의 언약적 울법주의는 모두 개혁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 개념이 배제된다면,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의 개념도 배제되며,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이 배제된 페더럴 비전과 같은 복음의 왜곡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에 대하여 멸망이 약속되어있는 행위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며, 아담과 달리 이미 타락한 백성이기에 은혜를 예비하는 백성일 뿐이다.



20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실행할 마음과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죄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질 때 교만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낮아져야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된다.

인식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인간은 어떠한 행위로도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이어야한다.

오직 충성만으로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된다는 메튜 베이츠의 주장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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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018. 5. 17. 21:38

신명기 8장 1-10절 말씀 묵상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같은 유형의 명령이 반복된다.


이러한 유형의 명령은 아들됨의 조건이었으며,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순종의 문제는 가나안에서 정착하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요구되었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아들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겟ㅓ 마찬가지로 재연되고있다.


이러한 재연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순종의 문제로 무너졌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선지서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가나안에서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의 문제는,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순종의 능력이 상실되었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자에게는 신론보다도 기독론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기독론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의를 근거로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 주제를 기독론에서 신론으로 옮기면서, 전가 교리를 소외시키고있다.


신론 중심적 신앙에는 또 다른 순종을 통한 자기 의의 성취가 자리잡고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이다.


새관점은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주장한 의를 넣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말기에 순종의 문제가 무시되었듯이, 현대인에게 믿음에 대한 주제와 기독론은 구시대적 산물로 취급되면서, 새관점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나, 문화변혁을 통한 문화물의 천국 보존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운동이나, 혹은 세상을 기독교화하자는 선교적 교회론이 주요 주제가 되고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거듭 순종에 대한 주제가 언급되고있는 것은, 가나안을 에덴과 대비시킴으로서, 에덴에서의 실패를 상기시키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다.


명령을 지켜행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통치 명령(창 1:28)과 선악과 금령을 내리신 것과 유사하다.


가나안은 에덴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면서, 동시에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성도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처의 모형이며, 에덴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안식처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는 순종은 불완전하기에,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해주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라고 주장하고있는 것이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성경에서는 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한 충만한 준비 기간으로 40이라는 숫자를 종종 볼 수 있다.

40년 간의 광야에서의 기간은 가나안을 준비하는 충만된 기간이었다.

에덴에서의 검증기간도 무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행위로는 아무리 충만한 기간이 준비되어도 불완전하다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 증명해주고있다.

이는 에덴에서 검증기간 동안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고하더라도 영원한 안식처에서 완전한 순종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설령 검증되었다고하더라도, 검증된 인간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교만으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또한 만나를 자기 방식대로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 의존적인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개벽을 뜻하는 에녹이란 명칭으로 자신의 아들과 성에다 이름을 붙였다.

도시의 기원은 그 속성상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내포하고있다.

도시 문화는 인간의 모든 필요를 인간 스스로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다.

문명의 속성은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발전되는 것이다.

첨단 문명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낮아진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훈련으로 인한 것이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문명의 힘에 의존하면서 극도로 교만해졌다.

예레미야는 교만해진 유다의 패망을 예언하였듯이, 극도로 교만해진 현대인에게는 최후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헤어지지 않은 의복과 부르트지 않은 발은 인간의 기본적인  염려를 없애주는 사건이다.

인간은 언제나 삶의 여정 가운데 소모되는 생활용품과 건강의 쇠약해짐에 대한 염려로 항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인간의 수고의 대부분은 영원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 가운데 생기는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인생은 많은 수고에도 불구하고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생기는 더 많은 필요를 감당하여야하기에, 삶의 굴레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인생은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결책보다는 현상만을 쫓아가다가 멸망하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기에, 결국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생을 위해서는, 필요를 공급하기 위한 삶의 굴레를 넘어서, 하나님의 초월적 공급하심을 의지하며,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을 하여야한다.

영생을 준비하는 참된 삶이, 한 주의 시작을 주일로 시작하듯이,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거하는 삶이 되어야한다.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음을 다시 한 번 상기 시켜 주고있다.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장자로서 부름 받았음을 말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신분을 가지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부름받은 신분은 처음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다.


처음 아담도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신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있다.


특히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개념이 결핍되어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강조하지만, 자녀로서의 신분과 이에 상응되는 순종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백성을 대표하는,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고난받으신 왕이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단지 본을 보이는 모델로서의 예수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분명 아들로서 부름을 받았다.


아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 조건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순종이었다.


아들됨과 순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있다.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은 인간으로부터는 아들됨의 자격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고있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아들로서 요구되었던 순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스라엘의 아들됨의 역할이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백성을 대표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관의 상징으로서의 가시 면류관, 왕의 홀로서의 갈대 지팡이, 왕복으로서의 자색 옷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고난받는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징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조건인 순종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가 받는 징계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징계인 것이다.


성도에게는 삶 가운데 직면하게되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삶의 온갖 어려움은 자녀를 자녀답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삷의 환경 가운데서의 역경과 어려움은 더욱 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동력이 되어야할 것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곳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어야한다.

가나안 땅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보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곳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되어야하며, 더 이상의 검증이 요구되지 않는 안식의 장소이어야한다.

하지만 가나안이 예표하는 영원한 안식처와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을 누릴 자격이 없음으로 인해서, 땅은 황폐해졌다.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어도 이를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땅은 황폐해 질 수 밖에 없다.

자연 생태계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동물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오직 인간의 손이 미치는 곳은 어김없이 황폐해진다.

신킬빈주의는  문명의 발전을, 에덴에서 주어진 명령으로 보고있지만,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인간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려는 본성이 깔려있다.

하나님으로 독립하려는 인간은, 광산에서 광물을 캐듯이 땅을 황폐화시키고있다.

몇십년 전만해도 이 땅에서 황사나 미세먼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중국의 발전은 곧바로 환경의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가나안과 같이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면서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만든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게는 아무리 풍요로운 땅이 주어진다고하더라도, 결국에는 욕심으로 황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는 저주를 받았다.

에덴에서의 소산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운 소산이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요는 에덴의 풍요를 상기시키고있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인간에게 있음을 드러내고있다.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도 잠시일 뿐,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이 독사의 자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로 인하여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이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스라엘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교회의 부작용은 교리의 잘못이 아니라, 모양만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는 거짓된 이들에 의한 부작용인데도, 이를 교리의 문제로 간주하고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넣거나, 혹은 오직 믿음을 오직 충성으로 바꾸려는 매튜 베이츠Matthew Bates의 시도와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간이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인데도 신학자들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행위를 끝까지 집어넣으려고한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6. 21:49

신명기 7장 12-26절 말씀 묵상

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하나님의 행하심은 언약을 근거로 하신다.

은혜의 근거는 조건적 행위 언약이다.

사랑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행하시지만, 백성들에게는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실 것을 요구하신다.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더라도 조건에 의한 것이기에 은혜 언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행위를 근거로한다고 공로 개념을 적용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근원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근거로한다.


13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가나안에서 베푸실 축복은 에덴에서 베푸셨던 축복이 재연되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에서 누릴 수 있었던 풍요는, 아담이 힘써서 일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주된 것이었다.

아담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소산을 먹을 수가 있었다.

아담의 타락은 수고의 주체가 하나님에서 아담에게로 넘어간 것이었으며, 아담이 직접 수고를 하여도 이전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의 풍성함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덴과 가나안에서 아담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에 있었음을 근거로 은혜 언약을 주장하기도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순종이라는 조건적 언약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행위 언약에 속하였다고 보아야한다.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현재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순종이라는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기에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율법 아래나시어, 에덴에서의 아담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적극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행위로서 충족시키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볼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개념이 상실되며, 전가 받을 그리스도의가  상실되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

행위 언약 개념을 거부하는 새관점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의롭게 되기에, 그리스도가 없이도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새관점으로는, 그리스도는 더 이상 구속주가 아니며, 우리의 주가 되실 수도 없기에, 전통적 기독론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가나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지만,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4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것이라고 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많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그들의 자녀들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겠지만,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경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지기에,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이 허락될 수가 없다.

신약의 시대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일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점점 더 심화된다면, 이러한 일반 은총 마져도 거두어 가실 것이다.

오늘날 결혼을 기피하고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환경적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환경적 요인 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만큼 이 세대가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진 세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왔음을 알 수 있다.


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질병의 근본적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질병은 고통이며, 고통은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와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다.

질병의 보편성은 죄악의 보편성과 관계있다.

질병과 죄악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흡연이 죄악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담배를 피는 사람은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보다도 질병에 취약하므로, 하나님의 몸된 성전을 파괴시킬 수가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담배피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나쁜 공기를 마심으로서 그만큼 몸과 마음이 상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은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되지만, 이것들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보편적으로 손상되었다.

질병의 원인을 특정인의 죄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편적 은혜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가 보편적이듯, 질병 또한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질병을 치료하는 수단이 발달되어있어도,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있는 상황이다.

인간을 문제 해결 방식은 대부분 근원적이 아니라 현상적이다.

현대 의학의 치료 방법도 마찬가지로 표면적이고 현상적이다.

과학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근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과학에 의존하는 한에는 근원적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로 개선될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치료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으며,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 항복할 수 밖에 없다.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구약의 시대는 신약의 시대와는 입장이 다르다.

보편적인 일반 은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반 은혜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을 구원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이다.

신약의 시대에 구약의 시대적 상황을 적용시키는 것은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은혜가 임하지 않은 시대에 행하는 것은 정죄밖에 없다.

무슬림들이 끊임없이 테러를 가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은혜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 사상이 담겨있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민족을 죽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반 은혜의 개념이 없는 구약에서는, 인본주의적 관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민족을 진멸하실 권한을 가지고계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이들이 존재할 수가 없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으로 거룩이 요구되기에 악을 진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들에게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결과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게된 것은 우상의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사단의 종이 되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 것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

믿음은 자연의 논리를 벗어날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을 한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은 자기 확신을 기초로해서는 안된다.

믿음의 근거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죄라고 할 수 있다.

죄악은, 하나님의 논리가 아닌 자기 논리를 근거로 하는 일이며, 자연법적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나가야한다고 생각에는 가인과 마찬가지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죄성이 드러난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능력을 의지한다.

인간이 명예와 부를 쌓음으로서 안정을 찾고 외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근거로한 힘을 가지고있기에, 삶의 원동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으려고하여야한다.



18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모든 도우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의 어떠한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신자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많은 경험들을 하게한다.

눈 앞에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악한 상황에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어떠한 부정적 상황도 그 안에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발견하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그와 같이 행하실 것이요

신자는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우리에게 좋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간섭하심도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자하는 우리의 내면적 성숙을 위한 것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안정을 찾는 것은, 외적인 성취에 의한 것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기인되어야한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사람의 행함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기반을 둘 때는 인간이 수고하는 것보다도 더 일들이 순리대로 풀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악과의 싸움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발견해갈 뿐이다.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을 위협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하겠지만, 그보다도 정작 두려운 일은 믿음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은 인생이 짊어진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자아에 집중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려는 자보다도, 영혼을 죽이려는 자를 경계하여야한다.

담대함을 위해서는 육신의 연약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도의 육신보다도 영혼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모든 인생은 한번은 죽게 되어있기에, 육신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중요하다.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급격한 변화는 혼란과 공백을 초래할 수가 있다.

이방인을 조금씩 쫓아내는 것은 점진적 환경의 변화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도 삶의 여정동안 평생에 걸쳐서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인격적 성숙이 없이 단번에 거듭났다고 급속한 변화를 갖게된다면, 온갖 부작용 가운데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성도 안에 거하는 악도 삶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씩 드러내심으로서 성도가 이를 극복하도록 하신다.

많은 경우 실제 악은 외부보다도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넘겨주신 대적들을 진멸했을 지라도,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 남겨진 악들에 오염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악은 내부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넘기신 이방인들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악의 모습들은 궁극적으로 아담의 자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극복하여야할 과제이다.



24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행하였더라면, 가나안에서의 타락은 좀 더 더뎠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승리자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결국 이방인에게 패배자로 남게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 말씀보다는 이방인들의 우상을 더욱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총체적으로 가나안에서 살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이러한 일들과 동일한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일들에 합류하게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있다.

우리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이들로부터도 이익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하기에, 일상에서는 항상 이러한 유혹이 노출되어있다.

성도는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가증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락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을 더욱 좋아한다.

이스라엘 성전에 가증한 것들이 들어왔던 것과 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경받던 목회자도 간음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의 부패를 보았던 루터나 부쳐, 칼빈등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의지에 대한 강조를 하였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를 하는 경향이 있다.

신칼빈주의나 신정통주의, 그리고 새관점등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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