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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5.14 :: 신명기 6장 10-25절 말씀 묵상
  2. 2018.05.13 :: 신명기 6장 1-9절 말씀 묵상
신명기 2018. 5. 14. 22:26

신명기 6장 10-25절 말씀 묵상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공로와 순종, 그리고 축복)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이스라엘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이러한 순종을 공로의 개념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순종과 공로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에덴의 경우에 있어서,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종말론적 축복이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하는 것이었다.

아담 언약이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하더라도, 순종의 개념을 공로의 개념과 연결시켜서는 안된다.

모세 언약도 아담 언약과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공로에 근거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의 범주에 넣으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러한 혼란은 순종과 공로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현상들이다.

순종을 공로의 개념과 연계시킬 때는 행위 언약의 성격이 변질될 수 밖에 없다.

행위 언약과 공로의 개념은 별개의 주제인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 언약에 근거하여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가나안에서 주어진 축복의 근거)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어지는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돌아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즉 구원 협약이라는 삼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성도들이 들어가게될 영원한 가나안 땅은, 이 땅의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에서의 건축물은 이스라엘의 공로가 없는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주장하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에서의 문화물이 천국에 보존되도록, 이 땅의 문화를 변혁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나안 땅의 건축이 이스라엘의 공로가 아니듯,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에서의 문화물은 이 땅의 것과 관계없는, 즉 이 땅의 수고의 산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 사상에는, 천국이 이 땅의 공로가 가미된 신인협력의 결과물이라는 공로주의 사상이 내포되어있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사상의 근거는 창세기 1장 28절을 전적으로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하는데서 부터 출발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전적으로 문화 명령이라고 규정할 경우,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의 개념이 사라지며, 통치 명령에 근거한 다스림의 대상과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은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3중직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근거가되는 것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접목은 통치의 개념을 상실시켰으며,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과, 다스려야할 대상에 대한 개념들을 상실시켰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에 들어갈 왕은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되었던 통치권이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컷는다.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 명령으로만 해석하는 이들은, 통치의 개념이 없기에, 요한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왕들을 이 땅의 각 나라의 왕들로 해석한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이 땅의 왕들이 자신의 문화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천국 입성후의 심판이라는 이상한 그림이 그리고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가나안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것과 같이, 천국에서 누릴 문화물은 성도가 이 땅에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필연적인 종살이 과정)

만약에 아담이 에덴에서 럼증 기간동안에 순종을 완료하여서 영원한 가나안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 복된 생활을 하게된다면, 천국에서의 아담의 후손들은 분명 교만하였을 것이다.

천국에서의 삶은 자신들이 잘나서 당연히 누릴 것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는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사단의 속성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창조 세계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놀라운 방법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천사보다도 교만하였을 것이며, 그리스도와는  전혀 은혜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에서의 눈물이 씻기움을 받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했지만, 과거를 잊은 이스라엘은 교만하여져서 결국 포로로 잡혀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축복을 누리지만,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도전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이 땅에서 택함받은 자를 구원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그리스도께 영원히 복종하게하기 위한 놀라운 사역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를 볼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스스로의 능력이 전혀없음에도, 맹세를 요구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그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를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선택을 하여도 능력이 없다면, 자유 의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신다.

강요에 의한 섬김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섬김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이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가 존중되어야만 한다.

타락 이전에는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에 결격 사유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의 선택에 따라서 에덴에서 추방했다.

이미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된 인간에게서는 참다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야만 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하나님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가나안에서는, 인간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이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해주고있다.

마치 장기가 손상된 환자에게 장기 이식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내주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노예 의지라는 사실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개신교를 다시 카톨릭으로 복귀시키면서 인간의 의지로 공로를 이루려고한다.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은 오직 한분 하나님만이 통치하신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가나안에서는 당연히 다른 신들을 섬기면 안된다.

당연한 요구이지만, 인간은 마귀의 자녀이기에, 자신의 애비 마귀를 따르게 되어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이 아니라고 항변 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 것이다.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의 땅에서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용납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마귀의 자녀가 되었기에,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에 부적합한 인간임을 대변해주고 있을 뿐이다.



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맛사에서의 경험은 불신이 밑바탕이 된 경험이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불신이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항상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의 필요를 체워주는 하나님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궁핍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쉽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변화를 입지 않고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남일 뿐이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며
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19  (18절과 같음)


가나안 땅에서의 복된 삶에는 조건이 있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복된 삶의 조건은 충성과 순종이었다.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헤세드)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서의 축복의 조건으로 요구되었던 충성과 순종은 처음 아담에게도 요구되었던 것이었으며,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었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충성과 순종에는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라는 보상이 주어질 예정이었지만, 처음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서 이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가나안에서 요구되었던 순종과 충성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재연Republication시키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과 순종의 성취는 모든 신자에게 전가되었기에 신자에게는 영원한 축복과 영생이 약속되었으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취될 것이며, 이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예시되고있다.

신자에게는 영원한 축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충성과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충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신자들을 위해서 고난을 담당하신 분이시다.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 뿐이다.


20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1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22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23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실제로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상황은 반대의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불행은 무엇때문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 규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불순종을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닥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한 현실이 복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경험하는 실패와 좌절과 불행에 대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음을, 자신과 자녀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가나안에서의 실패와 같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대신해서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이며, 이스라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며,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오늘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고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osted by Wonho Kim
:
신명기 2018. 5. 13. 22:49

신명기 6장 1-9절 말씀 묵상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가나안에서의 요구 조건은 사실상 이스라엘에게는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간에 정관이나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게 마련이다.

가나안이라는 곳은 오직 하나님 만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의 규범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속성에 적합한 조건과 방법들을 제시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보기에 좋으신 하나님이 꼭 좋으신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의 패역은 뻔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풍요의 땅인 가나안은 이스라엘을 부패시키기에 적합하였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 없었다면,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시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이상적인 가나안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상적인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은 에덴에 비교된다.

아담은 에덴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스라엘과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해서 쫓겨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참이스라엘이 되셨으며, 둘째 아담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된 성도는 참이스라엘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며, 더 이상의 율법의 요구가 없는 안식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러한 조건 제시는, 나중에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 이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제시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가나안에서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자신과 아들과 손자들에게 자신이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모습이 이어진다면, 가나안에서의 시간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이 되지 않는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은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조건이 충족되는 동안 한시적인 것이다.

가나안은 한시적 기간이 충족되면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이 이어지는 에덴과는 다른 곳이다.

에덴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진 곳이었지만, 가나안은 이미 타락하여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곳이기에, 이스라엘의 부패성을 증명해주는 곳일 뿐이다.

가나안의 역할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환경은 모두에게 가나안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문제가되는 환경의 일차적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딜레마는, 부정적 환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은 축복의 최우선 순위이다.

이는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노아에게도 명령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셨다.

번성한다는 것은 땅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가나안에서의 번성은 에덴에서의 번성을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속성을 가지고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는 번성을 행위 언약에서의 명령으로 제시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은혜 언약으로 제시되었다.

현재의 번성된 결과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번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들의 번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은혜 언약의 성취로서의 번성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유대적 이스라엘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여 소멸되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참 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의 번성을 볼 수 있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신을 섬기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은 본능이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적 존재와 함께 하려는 공동체적 본능이 있다.

신을 섬기는 것은 공동체적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선택하여, 다른 신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섬기는 다른 신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추구하는 첨단 과학은 신의 역할을 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앞으로는 첨단 기술이 인간을 상대해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면서, 혼자만의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할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다른 세계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종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심으로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최선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최선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저절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고무줄을 최대한 당기고있는 것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긴장 상태의 지속이다.

하지만 긴장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고무줄도 힘을 빼면 줄어들듯이, 긴장을 하지 않게되면, 인간의 마음과 뜻과 힘은 하나님께 향할 수가 없다.

긴장과 안식은 대조를 이룬다.

안식은 긴장과 당김의 시간이 아니다.

죄인에게 가나안은 긴장과 안식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진 곳이기에, 의인에게만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인간의 타락에 의한 본성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바리세인들의 문제는, 이러한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서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있지만, 이들의 본성은 긴장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거짓된 부패한 모습반 드러낼 뿐이다.

참된 안식은 인간의 본성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에서 회복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평안한 상태가 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모두를 대표한다.

현대인들도 부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에,  본능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정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이러한 시도조차 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에서 얼마나 멀어져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에게도 마참가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데까지 이르러야하는 것이다.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시에 마음에 새겨져있었던 것이 타락과 더불어 손상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담의 타락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마음 다짐을 하여서 마음에 새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마음에 새겨넣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죄인은 마음으로 원하여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죄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넣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마음에 새겨넣고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러한 부지런함은 가장 선하면서도, 가장 악이 될 수도 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이러한 삶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는데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공을 그리스도께 넘기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열정은 본 받을 만하지만,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열심은, 자신들이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는 이들 가운데,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하려는 악한 이들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할 것이다.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외적인 방식은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은 외적인 행동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내적인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이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하고있지만, 이러한 기준이 적용된다면, 과연 누가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내적인 변화가 없이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한시적일 뿐이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달리 이미 내적으로 부패해 있는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하는 것이나, 학교에서의 윤리 교육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교회에서의 설교는 외적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변화를 위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통로가 되어야한다.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주변 환경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인지 할 수 있도록 해야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있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종종 시내 도로 한 복판에 표어들을 붙이곤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기에 요즘에는 볼 수가 없다.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표어를 붙인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내적인 변화를 수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며, 내적인 변화가 없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될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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