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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에베소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과 질서를 지향한다.
에베소서의 중심은 유대인도 아니며, 역사적 이스라엘도 아니다.
에베소서는 우주 만물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관계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시킨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방인의 위치와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과 관점을 표현하여야만 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방인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관점에서의 유대인에 비추어 본 관점이다.
그렇다고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외인이지만, 유대인들 가운데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심겨진 유대인의 입장에서 논술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은, 이스라엘의 죄성이 어떠한지 드러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베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은혜의 복음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었다.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든지 간에 옛적에 자신이 어떠한 위치와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복음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에베소 성도나 우리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를 믿었던 이들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었던 언약 가운데 있었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비록 율법이라는 행위 언약 안에 있었지만, 율법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었듯이, 은혜 언약이 약속된 민족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에베소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에 과정적으로 참여된 역사적 이스라엘에 비추어보아도, 철저하게 외인이면서 이방인이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중요하다.
에베소 성도가 멀리있던 자들이었기에 가까이 있던 자들인 역사적 이스라엘의 비중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이다.
멀리있던 자들과 가까이 있던 자들의 통합이 이 시대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통합으로 발전되고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통합시키려는 이들은 엉뚱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배제하려고한다.
현대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신학은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위치가 이동되고있으며, 신학의 주제도 기독론 중심의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로 주제가 바뀌고 있다.
현대 신학의 이러한 경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를 정립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이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던 일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배척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지만, 유월절 만찬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막힌 담을 허신 것은, 유대 중심적인 편입과 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건축물로의 통합이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이스라엘의 흩어짐을 생각할 때, 막힌 담은 단지 육체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 불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 의한 분열이 끝났음을 말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산상수훈이라는 새로운 계명 아래에서 새롭게 통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산상수훈을 또 다른 율법으로 규정하는 행위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행위 공로 개념을 기반으로한 심판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관점의 해석은, 그리스도가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보다도 지키기 어려운 산상수훈을 주심으로,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된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본래의 목적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미 자연법이라는 양심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새 생명은, 육체를 심판 아래에 묶어 놓았던 율법과 자연법의 요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족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이 가능한 것이다.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 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민족 간의 분열을 하나로 통합시킴으로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의 취해야하는 행위는, 서로에 대한 정죄에 의한 분열보다는, 서로에 대한 용서와 기도와 위로를 통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저주를 소멸시킨 것이기에,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정죄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람과 민족 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나아가는 것이지만,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가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일 경우에는 이것이 또 하나의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시는 분이시다.
현대의 민족주의적 분열과 배타주의는 그리스도를 떠난 이들 가운데서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작품이다.
민족주의, 배타주의에 호소하면서 자기들끼리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사단의 좀비로서의 집단 이기적인 행동일 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자하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를 민족주의적 애국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 24)”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한 성령 안에 있기에 서로를 원망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
성령은 이 땅의 창조주로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으로서,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화목하여야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교회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 하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방인들도 이제 정정당당하게 하나님 권속이고 시민임을 말하고 있다.
그냥 바울이 선심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가 가져야 할 분명한 정체성이며, 이러한 정체성이 기반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아가야 한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모퉁잇돌이 없는 터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현대의 콘크리트나 빔을 박는 철골 건축 방식은 모퉁이 돌이 없지만, 이전의 모든 건축물은 모퉁잇돌 위에 세워졌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서의 실질적인 건축물로 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하나님의 의”라는 모퉁잇돌을 사용하고 있다.
톰 라이트가 시도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통합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순종의 의가 아닌,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모퉁잇돌로 삼는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주 안에서의 성전은 서로 연결된 건축물이다.
성도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성전으로 세워진다.
최초의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이 땅에 세워지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신 자들과 함께 세워져 간다.
이스라엘의 패망의 역사에는 개인의 범죄가 어떻게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담은 인류 공동체의 대표이었듯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머리이시며,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나아감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에덴-성전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몸됨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져가는 것이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은 창조 주이시며,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성도를 하나님의 처소가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가신다.
불순종의 자녀들은 사단의 뜻대로 이 세상을 파괴해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진 에덴 성전을 이 땅에 구체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일을 해야한다.
리처드 미들턴과 같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기반 위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28의 문화 명령을 마태복음 28:19-20의 대위임령보다 상위 명령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변화시키는 문화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워나가야 할 성전은, 창 1:28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것이 아니라, 마28:19-20의 대위임령을 근거로 하나님의 성전을 확장시켜나아가는 것이다,
(나가는 말- 교회는 과연 확장된 이스라엘인가?)
톰 라이트는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을 이방인과 화해시킨 중재자로 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후의 만찬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던 것에 대한 종료를 선언한 것으로 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못박은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의해서 못박힌 사건으로서, 로마와 이방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적으로 나아갈 때, 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희생을 받아주셔서, 확장된 이스라엘 개념의 교회로 재탄생시키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는 신약의 교회는 유대교의 변형일 뿐이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의 주요 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되었다는 내용이 관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화해 개념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화해 개념과는 다르다.
톰 라이트는 유대교를 율법주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 즉 율법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을 해석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모임을 통하여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 자료에만 치중하여 편협된 해석을 함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이 상실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해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확장된 교회의 모퉁잇돌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도인지, 톰 라이트는 새관점을 통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오랜 통합의 노력이 실패하였듯이, 실패 할 수밖에 없는 무리한 시도다.
기독교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 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전가 교리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배제된다면, 더 이상 기독교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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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1-10절 말씀 묵상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자)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살아갔던 시간을 살아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되면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는 바울의 말이 틀린 말이 된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는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동일시하는데서 나온 결론이다.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의 육적인 생명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생명이며, 육적인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바빙크가 부차적인 육적인 생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있었기에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시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자한 것이다.
영적인 생명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생명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화란개혁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과 달리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종의 의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빙크의 생명에 대한 언급을 확대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빙크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에 대한 것이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죽었다고 보아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바울의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생명이 없는 육신natural body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 6:3).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창조 당시에 아담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육신natural body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이다.
영적인 몸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하였으며,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은 영적인 몸을 지닌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던 곳이다.
동산에서의 생물들은 아담의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여야만 했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명령하는 다스림의 대상 가운데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인 뱀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생물(창 1:28)들 가운데 한 가지였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물”과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같은 히브리어 “חַי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반역자와 더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셨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서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닌 자였지만,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생명이 상실된 육신을 지닌 자가 되었다.
이러한 몸의 변화는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이었기에, 아담은 범죄한 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사탄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다스려야할 영적인 생물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것이다.
즉 육신이 되었다함은 그 소욕으로 인하여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죽음을 뜻하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은, 아담으로 인한 죄의 형질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에 의하여 집단적인 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의 체질은,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영적인 몸spiritual body에서 육적인 몸natural body로 변한 것이다.
영적인 몸은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만, 육신은 천상의 세계와 분리된 체질적인 한계를 가진 몸이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변화된 체질의 유전이라는 어거스틴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있는 모든 인간은,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는 선한 것 같아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악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이 사실상 죽은 존재임이 증명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죽은 존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나서야 그리스도의 구속의 손길이 다가왔듯이, 인간은 자연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 드러남으로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에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다양한 역경들 가운데에는,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이 고발되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살리셨다)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던 자에게만 적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원리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은 원리와 동일하다.
죽음과 삶은 전가에 의해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설명하였던 것과 같이, 유전적인 방식만으로는 아담의 죄성이 모든 인류에게 옮겨진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된 아담의 체질이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도 있지만,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강령에 의한 죄인으로의 규정은 전가 교리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3중 전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 되었다.
두 번째는, 택함받은 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 되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의가 택함받은 자에게 전가 되었다.
질서 가운데 움직이는 창조 세계와 달리,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부정적 현상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가 교리가 유일하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둠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고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성경은, 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죄 가운데 죽은 인생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유일한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인간이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새관점에 이르기까지 인본주의 신학은 전가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를 전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암묵적으로 종결된 것으로 주장한다.
아담의 죄의 종결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는 일종의 혁명적 행동방식이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새로운 삶의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죄성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죄가 아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말할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끊임없는 노력과 반복된 연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아담은, 단지 인간에게 안좋은 본을 보여준 인물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아담을 본받지 말고 예수를 본받자는 것이다.
인간이 영향을 받은 것과 전가되어 죽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향을 받은 자는 단순히 삶의 방식만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는 것을 전제로한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이 아닌 따름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서 행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전제로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묘사되지만, 에베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예수를 죽은 자를 살리신 분으로 기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보는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아니기에,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보는 허물과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 우월의식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극히 이스라엘 중심적인 해석이다.
복음은 삶의 교훈을 전해주는 소식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을 전해주는 소식이다.
성도의 삶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개선하거나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의 주체가 되셔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는 것이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인간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어느 종족이나 신을 섬기지 않는 종족이 없다.
어떠한 인간의 종교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신을 섬기는 행위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보다는 아담의 타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이라는 존재 가운데 누구를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적 결정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는 세력에 대한 정권의 교체와 같은 일종의 쿠데타였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영적인 몸을 입었지만,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아담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창 6:3)
그리스도의 부활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영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체가 어떠하신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아직 육신에 제한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될 영적인 몸으로 변화될 것에 대한 약속의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 수밖에 없지만, 아직 육신에서 자유할 수없는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소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말로 객관화시키기도하지만,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것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 종속된 것이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아직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거듭난 성도는 변화된 사람이기 이전에 섬기는 주인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의 변화는 성도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성화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행동 방식이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성화를 통해서 변화될 수 없다.
선택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육신의 소욕에서 자유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 죽은 날,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과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영적 전쟁은 자신의 외부의 상황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보통 개혁을 외치면서 외부의 환경과 싸우는 이들이 종종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작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을 입고 있는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사단의 좀비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이들은 사단의 종으로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육신을 좇는 이들 가운데서 볼 수있는 표면적인 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없다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종속되는 지옥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특별은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문화를 개혁하거나 환경을 개혁하려는 이들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을 상실하고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우매함에 빠지기도한다.
아담의 범죄는 단순한 불순종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서 사단의 종으로의 신분의 변화다.
신분의 변화가 없는 행동의 변화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실패는 신분의 변화가 없는 행동의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실패의 원인이 인간이 노예의 신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신분의 변화가 없이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서 자유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았기에 인간의 의지를 노예의지라고 표현하였다.
행동방식의 변화를 통해서는 성도가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보다는 고수가 될 수가 없다.
육신을 입은 성도는 그 육신의 소욕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더 이상 두 주인을 따를 수 없는 자이다.
성도는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살 수있을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던 것은 사단의 종인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의의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중 권세잡은 사단의 좀비 역할을 하는 인간의 문화의 종국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특별은혜를 위해서 파멸로 치닫는 것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복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은 이들의 이전의 상태가 어떠하였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있다.
복음은 일종의 죄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말씀이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 신학자들이나 현대인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죄에 대한 인식에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인간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정하기 싫어한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차이는,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를 규정하는데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가 유전적(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있지만)으로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을 가지고있다고 규정하는데 반하여,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있기에 사회 구성원들의 죄를 모방하고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는다고 규정하고있다.
이러한 차이는 죄를 짓는 원인이 내부에 있느냐 아니면 외적 환경이 있느냐의 차이이다.
죄를 짓는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죄를 짓는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있다면, 복음은 본질적 죄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며, 죄를 짓는 원인이 외적인 환경에 있다면, 복음은 외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수단으로 해석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이 죄인이었던 때의 상태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한다.
육체는 인간이 지니고있는 몸 자체를 말하기에 인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육체의 욕심에 종속되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있다.
결국 인간은 육체의 노예이며, 육체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외적인 환경들은 내적인 상태가 외부로 드러난 결과들일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이 없는 현상적 해결책은 그 때 뿐이며, 오히려 상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은 본질 자체에 대한 것이기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동물들은 각기 그 본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각기 그 종들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살아간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 방식도 본성을 따라가는 동물과 한 가지이다.
개가 개답지 않게 행동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가 죄인인 특성을 드러내면서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개가 자기들의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있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에 의한 선택이 없다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어떤 민족보다도 우월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행동 방식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신들의 본질적인 악을 가리기 위하여 무덤에 칠하는 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들의 행동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들의 죄성을 고발하며,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접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며 욕심을 내려놓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지만, 그곳에 모여든 교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도덕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고있다.
교회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있는 이유로 교회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는 것이 일차적인 본질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발하고있다.
이는 도덕적인 행동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들이 죄없다 생각하는 바리세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고백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가리려는 목적의 도덕적인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길 원하신다.
인간이 본질적 죄인인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고는 그 원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질적인 죄임임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를 전제로한 신앙고백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고백을 말하고있다.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에는 자신이 본질적 죄인은 아니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는 바리세인들이 행하려는 선행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참된 고백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즉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죄에 동참한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에게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있기에,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고행을 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적선을 하거나, 선행을 하기도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수는 없다.
거듭남이 없는 온갖 종류의 수행이나 선행은 또 다른 육신의 소욕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참된 거듭남은 자신에 대한 주체가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일 뿐이다.
수련을 통한 윤리 도덕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어느 종교에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과 연습을 해도 그 주체는 죄성을 가진 자신일 뿐이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며, 자신의 삶의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될 때, 윤리와 도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열매맺는 성도의 삶은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명령을 다시 실행하는 삶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명령을 이 땅에 선포하는 삶이다.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은 이들은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이 받았던 명령을 수행 할 수가 없다.
창세기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식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이 처음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한 명령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육신의 소육을 쫓는 사단의 종을 생육하고 번성시킬 수 밖에 없는 체질의 변화를 가져왔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지고있는 육신을 입고있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 문화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 성도의 과제가 될 수도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할 뿐이었기에, 세상에는 악이 가득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쌓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노아 홍수와 더불어,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물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듯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심령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진노의 자녀들이 될 수밖에 없다.
성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자신이 본질적인 진노의 자녀임을 외면하고 도덕을 쫓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아무리 도덕과 선행으로 자신을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더 나은 복지 사회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은, 행동 방식의 개선을 넘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해주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귀결되어야한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능적 속성에 속하여있다.
자녀가, 부모가 왜 나를 사랑할까 고민할때, 답은 자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긍휼의 사랑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하심이기에, 자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한다.
응답하지 않는 행위는 스스로 자녀임을 포기한 것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도 책임이 없으시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1절의 내용이 반복되지만 그리스도가 추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요구인 저주를 충족시키고, 종결시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 저주가 없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말씀은 아담의 후손에게 요구되었던 죄값을 다 치루셨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로서, 더 이상 첫 번재 아담의 후손에게 요구되었던 저주가 더 이상 요구되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신자에게 거져주어진 속량에 의한 죄사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아주신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의 핵심 주제이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을 대표하고 존 파이퍼는 개혁주의를 대표한다.
새관점에서는 죄인에 대한 선고는 전적으로 재판관 재량에 달려있기에 누가 대신 죄값을 지불함으로서 무죄 선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재판관이 무죄 선고를 하는 근거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아브라함과 약속한, 하나님의를 근거로 한다.
개혁주의를 대변하는 존 파이퍼는 죄인의 죄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에, 죄인에게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기에, 무죄 선고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신자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개혁주의는 신자의 의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는 개혁주의의 주장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새관점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제시키고 있다.
신자는 자신의 죄값을 지불하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값주고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새관점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시다.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종말에 이루어질 신자의 최종적인 위치는 놀라운 것이다.
보통 노예를 값을 지불하고 살 경우, 노예에게는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노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의 비밀은 값주고 사신 종을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로 부르시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위치를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며, 성도는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이를 증거해야한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간의 반응일 뿐이기에, 믿음이 구원을 얻어내는 행위에 속할 수가 없다.
믿음은 단지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 손을 뻗는 행위에 불과하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행위- 공로)
최근에 새관점의 경향을 보이는 김세윤 교수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은, 믿음에 행위가 추가되어야지만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서, 인간의 행위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이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전적인 선물이라는 관점에 상충되는 개념이다.
또한 메튜 베이츠Matthew Bate는 믿음보다는 행위가 포함된 충성allegiance으로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메튜 베이츠는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받았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문제가 있으면, 최종적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바울은 행하는 것과 믿은것, 그리고 성취하는 것과 받는것을 대비시키몀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충성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행위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기준이 되어야하기에, 인간적 관점에서 보이는 충성이나 선행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이나 선행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충성된 행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한 가지 방식의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행위는, 인간 스스로의 생각에서 출발된 충성된 행동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개념과 관련이 있어야한다.
모든 인간은 이미 불순종의 아들로서, 구원을 위한 순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매튜 베이츠가 새롭게 제시하는 충성allegiance의 개념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마찬가지로 제2성전 유대교의 문서를 근거로한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만,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어있는 신분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행할 능력도 없다.
구원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적 형태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에, 톰 라이트나 메튜 베이츠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행위의 부족함으로 최종적 구원이 상실된다는 개념이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공로에 의지하여 구원을 완성하려고 하지만, 이는 인간이 보는 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희망 사항일 뿐, 순종하고는 관계가 없다,
알미니안들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제한함으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손상을 입히는 개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새관점이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이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는 선행은 인간을 다시 행위 구원론으로 집어넣는 이론이다.
인본주의 신학들은 어떠한 형태이든간에 한결같.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를 요구한다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가 지음받은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마땅한 행위이다.
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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