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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예레미야 15장 1-9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 15장 10-21절 말씀 묵상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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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
예레미야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였지만, 아무런 보람도 느낄 수가 없었기에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많이 격해져있어서 자신을 낳으신 어머니까지 들먹이고있다.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은 격혀져가기만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과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인하여 지쳐가기만 했을 것이다.
선지자의 직책은 세상과의 싸움이기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모든 산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신자도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세상과의 싸움으로 인해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1, 하나님의 응답)
지쳐가고있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 과정이 힘들지만 공동체의 위로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12, 북방의 철)
북방의 철과 놋은 유대인의 교만을 깨뜨릴 강력한 금속으로서 깨뜨려져야할 유대인의 완고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완고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더 큰 완고함을 사용하신다.
이는 이미 유다의 불순종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갈 수 밖에 없는 상태인 것을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이들을 이방 민족의 포로로 내어주는 것은, 자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의 노예로 내어준다는 것과 같기에,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운행되기에,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는 창조 세계의 공동체적 질서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한 부분의 무너짐은 모든 창조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창조 세계의 보존을 위해서 불순종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13, 예레미야의 죄?)
13절의 뜻이 모호해서, 다시 번역해서 해석해본다.
“너희 나라에 만연한 너희들의 모든 죄악들로 인해서, 너희의 부와 보물들을 아무 값없이 탈취 당하게 할 것이다.-NIV번역)
13절은 예레미야 한 개인의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가 포함된 공동체적 죄로 인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징계를 말씀하신다.
(14. 원수에게 내어줌)
중립지역은 없다.
어린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악한 세력에 귀속되듯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민족은 자유가 아닌 다른 세력에 종속 될 수밖에 없다.
참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참 지유를 누리는 길이다.
(15-17, 예레미야의 기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완전히 자기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의 응답과 관계없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만을 계속 하고있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핍박하는 자에게 보복을 해달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은 미움에 의한 간청보다는 유다 백성의 심각한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8, 하나님을 불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다.
이러한 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종 느끼는 감정들이기도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체질적으로 손상된 아담의 자손이기에,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경우들이 있다.
예레미야가 바로 이 경우라고 생각된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으로서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유다 백성과 다르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기도한다.
기도는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여야한다.
신자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복받는 것에 대한 것보다는, 이 세상과 구별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세상은 심판받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가고있기에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19,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강요 하시기 보다는 설득 하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21, 마음의 중심을 아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비록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항변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에 오히려 예레미야를 위로하시면서 다시금 예레미야를 굳건히 세우신다.
하나님은 단편적이시거나 감정적으로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에 대한 항변을 견뎌내지 못한다.
세상 권세들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항변하는 이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댓가를 치르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 경직되게 만들지는 않는다.
참된 권위는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할 때 세워질 수 있음을 본다.
(결론)
신자의 살아가는 것이 고달프다.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창조하셨기에 신자는 비록 힘이 들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처하게되는 공동체적 환경은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관계없이 공동체적 환경에 대한 책임을 지게되어있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변질되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야의 탄식의 기도는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대한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동체성으로 인하여 가장 피해를 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파괴한 것이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자기 이외의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본능을 나타내고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아담에 의하여 파괴된 공동체의 회복이며, 신자의 신앙생활은 공동체의 회복에 관여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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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장 1-9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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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백성을 멸망의 재앙으로 몰아넣으실 수가 있으신지 항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마음에서는 사랑하시고 아끼시지만,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불순종한 백성에게 이미 내려진 결정을 집행하셔야만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결정을 내리셔야만 했다.
시내산 언약에 순종 할 것을 맹세로 화답한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했고, 가나안에서 추방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불순종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상황의 형태학적 유사성은,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하셔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순종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순종의 문제를 감당하실 것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2-3, 피할 수 없는 불순종의 댓가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결정은 공의에 의한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불순종의 죄값은 반드시 치뤄져야만 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순종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에 죽어야만 한다.
불순종한 유대인들에게 내려진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는, 피할 수 없는 결정으로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 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눈물과 사랑의 표현이며, 신자에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공의에 대한 손상이 없이 죄인을 구원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지만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재판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으로서, 누군가의 보상이나 대신 값을 치룸이 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을 근거로 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의를 위해서 대신 누군가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재판장의 일방적인 용서이기에, 죄인이 의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지가 않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주어야하기에,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최종적 구원을 이루기 위한 행위의 기준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어느 누구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죄인이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되고,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의 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고보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의에 대한 성부의 공의적 속성을 변질시키며, 성자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며, 성령의 구속적 창조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부정하기에,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다분히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각광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유대인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들은 유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기독교에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기에, 새관점에 대하여 아무 생각없이 단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유행처럼 합류하는 것은 심각하게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공의로 집행할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분명하게 감당할 것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신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거짓말하는 것과 같이, 아무런 댓가의 지불도 없이, 일방적인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4, 므낫세의 죄악)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모리 족속을 멸하게 하신다.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징벌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다 왕 므낫세는 이스라엘 성전에서 아모리 족속이 범한 악행보다도 더욱 심한 악행을 행하게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아모리 족속보다도 더 심각한 범죄를 하게한다.
비록 그가 말년에 회개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전에 들여온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들은 유다의 말년까지 지속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에 대한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힘들어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므낫세가 성전에 도입한 가증한 것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유다로하여금 불순종이 고착화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수가 없으시기에,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내신 것과 같이, 유다를 가나안 밖으로 흩어버리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고, 신약 교회의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에, 유대 성전에서의 부패와 같이, 가시적 교회의 부패는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고, 개혁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일단 잘못된 길에 들어선 교회는 부패되고 붕괴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 투쟁하기보다는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세워나아가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 가운데 한 가지 일 것이다.
(5, 여호와의 이름을 짓밟은 므낫세의 악행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루살렘은 다윗성이 있었던 곳으로 성전의 근거지가 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시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되는 곳이다.
므낫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전에 온갖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서 그곳에서 하나님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증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시대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외형적 교회의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온갖 세상적인 방식은 다 도입시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거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 할 수 없었듯이, 목회자의 잘못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이용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인들의 잘못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6, 아담의 후손이 가야 할 길)
유대인들의 악행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절히 말씀하시면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는데도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을 스스로 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고 계신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죄악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7, 불순종에 합당한 징벌)
더 이상 열매맺지 못하는 이들을 흩어 버리실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책임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있기에, 공의에 의한 하나님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한 가닥 회개할 희망까지도 기대하셨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을 근거로하기에, 어느 누구도 불평도 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유대인들의 범죄에 마찬가지로 참여한 자들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설령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할 근거가 전혀없다.
(8-9, 불평할 수 없는 죄인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은 인간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유대인에게 임한 재앙과 같이,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두 다 재앙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이나마 평안을 누리는 것은 일반은총에 의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 하지만, 문제는 부정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잘못된 사고 방식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이기에,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인간들이다.
이 세상은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이 세상이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구원 할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은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단지 누릴 수 있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형벌 안에 있다.
사형을 기다리는 자는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이지, 그 이 상의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마지막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자 일반 은총을 베푸신다.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할 자격만 주어졌을 뿐이지 불평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에 내재해있는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인들로하여금 하나님께 나오도록하는 수단이 되어야한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의 내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기에, 자칫 신자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을 유발 시킬 수가 있다.
신자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을 함으로서 멸망할 자들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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