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9장'에 해당되는 글 2건
- 2018.06.20 :: 신명기 29장 14-29절 말씀 묵상
- 2018.06.19 :: 신명기 29장 1- 13절 말씀 묵상
신명기 29장 14-29절 말씀 묵상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이스라엘의 대표성은 시간적인 수직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공간적인 수평적 관계까지 대표한다.
수직적 대표성으로는, 후대에 가나안에서 태어난 이들도, 비록 자신들이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어도, 선조들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한 자로 여겨짐으로 인해서 시간적 수직성의 영향하에 있다.
수평적 대표성으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간다.
마치 상품을 출하할 때 모든 상품을 검사하기보다는 대표되는 몇가지 상품을 검사함으로서 전체의 상태를 파악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모세 언약이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과만의 언약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도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 될 수 있다.
새 언약이 모든 인류를 향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 언약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은 선택적으로 모세 앞에 세워진 것이다.
모세 언약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직적인 관계성으로만 대표성을 가진다면, 성경은 유대 중심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새관점의 경우가 그러하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대표성을 갖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공동체적 대표성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공동체적 인식 아래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16 (우리가 애굽 땅에서 살았던 것과 너희가 여러 나라를 통과한 것을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구원은 거룩하지 못한 땅에서, 거룩한 땅으로의 이동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지 못한 이들을 경험한다.
이스라엘은 거룩하지 못한 자들 가운데서 구별되어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이다.
이들은 여러 나라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의 가증한 것을 보았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자신들의 종말이 그들과 한 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실패하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아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내면의 한계는 하나님의 감추어졌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사건을 통해 극복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거룩함에 참여한 이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관점에서 부장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삶의 본을 보여주여주신 분이 아니시다.
인간에게 기대할수 있는 변화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변화로만 가능하다.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깨닫지를 못한다.
가나안 입성은 앞둔 이스라엘에게 선포되는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았을 때 기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자신들이 얼마나 오만한 자였는지 경험함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었다.
인생의 하프타임은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것이 무너지면서 오게된다.
인간은 짧은 인생을 살지만, 어느 시기엔가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후에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듯이, 인생의 목표가 무너지고, 자신의 뜻대로 안되고, 극단적인 우울증과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인간은 철저하게 무너지는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모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였던 이들도 무너짐이 없이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셔야지만,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다.
모태신앙을 가졌던 이들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다시만나는 기회를 가져야만 참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하나님의 분노는 질투의 불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하고 싶어하시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억지로 생명책에 기록하시지는 않으신다.
잔치를 베푸느라 많은 수고를 하셨지만,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마음에 없는 이를 강제로 앉히시지는 않으신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될 수 있다.
21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저주받을 이를 구별하시는 것은, 조밀한 헤파필터와 같다.
율법은 청소기 필터와 같이 악한 이들을 구별해 낸다.
흡입한 공기중에 깨끗한 부분은 통과시키고, 더러운 이물질은 걸러내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과 같다.
오염으로 더러워질수록 세밀한 청소가 필요하다.
예전의 청소는 빗자루로 충분하였다.
요즘은 먼지가 작아져서 빗자루로는 청소가 되지 않는다.
진공청소기도 이전과 달리 좀더 촘촘한 필터가 있어야만 한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결코 필터를 통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일으키는 먼지만큼이나 인간의 죄악은 점점더 조밀해지고, 율법의 필터를 통과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악한 이들이 이스라엘의 지파중에서 철저하게 구분되어제거되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신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조밀한 필터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의 필터를 통과하여 오염되지 않은 거룩한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22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23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재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며, 이스라엘의 희망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된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흥했더라면, 이방인들이 그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교훈은 모든 이들에게 경고가 되면서도, 이스라엘에게는 수치가 된다.
언약을 파기한 자는 수치를 감당하여야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육체적 고통 뿐만이 아니라, 모든 모욕적인 수치를 감당하셔야만 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당한 수치와 모욕은, 이스라엘이 박아야했던 수치와 모욕이면서, 동시에 모든 인류가 받아야만 하는 수치와 모욕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받을 국가적 저주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의 죄를 없애주면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종결을 선언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저주를 직접 받음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또 한편으로 유대 이스라엘의 정당성과 확장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기독교를 유대교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의 교회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으로 규정하고서, 신약의 교회를 유대교의 틀에다 맞추는 시도를한다.
모세를 통해서 선포되는 이스라엘의 수치와 저주는 국가적인 수치와 저주를 넘어서 인간이 본질적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임한 저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세워지는 신약의 교회라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가 참 이스라엘로서의 실체이고, 구약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모형일뿐이다.
톰 라이트는 이와 반대로,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고서, 신약의 교회는 이차적으로 파생되어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을 철저하게 왜곡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의 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언약은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였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기에, 언약은 인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언약을 어긴 자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서 이미 죽음이 선포된 자들이다.
생명되신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의 생명은 덧없는 것이며, 아무리 외적인 성공을 하였다하더라도, 심지어 재벌이나 왕,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그늘에서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구속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불리워 나간 이들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인간의 타락한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시된 울법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는 율법을 근거로 한 언약이 근거 기준이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의 요구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재앙의 기준이다.
언약은 버린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현대인은 스스로의 기술과 경제를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도시 분명은, 모든 삶의 형태가 도시를 중심으로한 기술의 보편화와 인간 중심의 경제 구조 가운데 하나님을 필요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한다.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심은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심이었지만, 은혜 안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거부함은 영원한 진노의 자리로 인도되는 것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침묵하심과 평안은 마치 폭풍 전야와 같이 결코 평안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
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그때 그때 감정에 따라서 달라지시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일관성이 있으시며,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다.
이스라엘에 격노하심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 가운데 오래 참으신다고, 결코 하나님을 경히 여겨서는 안된다.
현대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구속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구속은 표면적인 인간의 일차적 이해를 넘어선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알 수가 없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 알지를 못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일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회개하는 일에만 치중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회개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한다.
회개는 행위적인 것은 넘어서 존재론적인 것까지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복음을 표면적으로 보는 이들은, 복음을 율법의 연장선에서보며, 윤리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감추어진 일과 나타난 일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양면을 보여준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소홀히 하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가볍게 만들려고한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 수가 없다.
율법은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인간에게서 출발된 지식으로는, 하나님께서 깨닫는 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깊이있는 철학적 사고를 가진다고하더라도,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신명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31장 1- 13절 말씀 묵상 (0) | 2018.06.22 |
---|---|
신명기 30장 1-20절 말씀 묵상 (0) | 2018.06.21 |
신명기 29장 1- 13절 말씀 묵상 (0) | 2018.06.19 |
신명기 28장 58-68절 말씀 묵상 (0) | 2018.06.18 |
신명기 28장 36-57절 말씀 묵상 (0) | 2018.06.17 |
신명기 29장 1- 13절 말씀 묵상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은,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웠던 처음 세대는 거의 광야에서 죽고서, 그의 후손들과 세워진 것이다.
단순한 세대교체의 의미보다는, 광야에서의 4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을 경험하고서 세워지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호렙산 언약보다는 좀 더 심도있다고 할 수 있다.
호렙산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세대였다면,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하고 알 수 있는 세대와 세워진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 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을 행한다면, 이전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세워진 언약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입교를 하는 것과 같이, 이제 광야에서 사십년의 충만한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판단력은 오랜 경험 못지 않게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앞으로 살게될 환경이 과거와 비교하여 어떠할지를 스스로 판단하여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상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연륜은, 젊은 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판단력을 높여준다.
이는 젊은 이들이 노인을 존경하여야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노년의 판단은 그만큼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삶의 연륜을 통해서 깨닫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근본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도 자연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그토록 고민하고 연구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인간을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풀이라도 소가 먹으면 소똥이 나오고 염소가 먹으면 염소 똥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40년의 충만한 시간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환경이 바뀐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준비가 안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 자손들로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자연법적 과정을 중요시 여기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교만한 지를 알아야만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장 과정이 필요하며, 자신의 문제와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성장의 첫 걸음이다.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호렙산 언약보다도 성장 과정에 따른 좀 더 구체적인 명령이 제시될 수 밖에 없다.
거듭남의 과정은 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때에만 거듭날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80년의 시행착오 과정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눈과 귀를 허락하셨다.
거듭남과 성령의 함께하심이 없으면, 인간은 외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깨닫고 알 수가 없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간의 공생애를 같이 했어도, 예수님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어도 깨닫지 못했으며, 알 수가 없었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의 차원이 아니며, 표면적인 율법의 차원을 넘어선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깨닫는데서 출발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를 강조했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거부한다.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며, 인간의 행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이들 가운데에서 점점 더 부패하고 변질되어가는 기독교를 보게된다.
현대 기독교의 변질과 부패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된 복음만이, 오직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마음으로 깨닫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40년 간의 공급하심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말해준다.
사십 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에도 인간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 세상 최후의 심판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며, 세상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사십 년 동안의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핑계 할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의 마지막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재앙에 의하여 멸망되어 갈 것이며, 하나님께 불평 할 수가 없을 것이다.
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농사를 지울 수도 없었으며, 소산으로 인한 포도주와 독주도 취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만이 살길이었다.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자신들의 우상 숭배의 토대로 사용하였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타락한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거듭나게 하시지 않고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거할 수가 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편적 안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로 삼질 않는다.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훨씬 편한 존재이다.
인생은 분명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 이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느낀다고하더라도 무능력한 것이 인생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바랄 뿐이다.
7 너희가 이 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주어진 땅은 그냥 공터가 아니라, 점령에 의하여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 땅은 이전의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땅으로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패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땅을 인간이 다시 오염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간섭하심은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정화하시는 작업을 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뢰하고 맡길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호렙산 언약보다도 경험과 신뢰가 더욱 다져진 상태에서 또 다시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다.
언약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는 모세 언약의 속성이 행위 언약임을 다시 한 번 더 나타내는 것이다.
은혜 언약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행위 언약은 쌍방적인 요구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상태이기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다시 한번 더 강조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성숙된 이들이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성숙된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분별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끔 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바탕으로 충분한 지식이 주어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10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가나안에는 언약에 참여한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기에,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야한다.
에덴에서의 생존 조건도 가나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에 참여한 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언약을 어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 날 수 밖에 없었듯이,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언약의 종결이며,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복귀는, 이미 종결된 행위 언약을 토대로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맹세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조건적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맹세에 참여한 백성은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백성이다.
언약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 할 수가 없다.
저주의 근본 원인은 불순종한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에서 한시적 복을 누리는 것이다.
현재 인간이 누리는 축복은 결코 인간이 잘낫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 가운데 있으며, 결코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거룩한 백성이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부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다.
부패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을 실질적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get in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stay in 규범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주된 점은, 유대인들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며,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에 가해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시고서,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에 전파하는 길을 여신 분으로 보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면서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관점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고 수용하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며, 단지 행위를 본받을 선지자에 불과할 뿐이다.
'신명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명기 30장 1-20절 말씀 묵상 (0) | 2018.06.21 |
---|---|
신명기 29장 14-29절 말씀 묵상 (0) | 2018.06.20 |
신명기 28장 58-68절 말씀 묵상 (0) | 2018.06.18 |
신명기 28장 36-57절 말씀 묵상 (0) | 2018.06.17 |
신명기 28장 1-14절 말씀 묵상 (0) | 2018.06.15 |